승합차 한 대가 검은 세단의 호위를 앞뒤로 받으며 세 시간을 넘게 달려 도착한 곳은 작은 섬이었다. 개인 소유지인 이곳에는 호텔로 운영되던 건물만 하나 있을 뿐, 대부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섬과 연결된 다리도 하나뿐이어서 외부의 접근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승합차 앞에서 달리던 세단이 먼저 다리 끝에 닿았다. 천천히 속도를 줄이던 세단이 멈춰 섰다. 그 뒤로 승합차와 다른 세단도 차례로 멈췄다. 철조망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철문이 그들을 막고 있었다. 잠시 후 밤의 찬 공기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세 대의 차량이 차례로 모습을 감췄다.
한참 후,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차 한 대가 라이터도 켜지 않은 채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반대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휠체어를 탄 변회장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다리와 팔, 그리고 목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그가 들어온 문 맞은편에는 한 사내가 묶여 있었다. 변회장과 함께 들어온 용주가 묶여있는 사내의 뒤에 자리를 잡고 섰다. 두건으로 얼굴이 가려진 그는 겁에 질린 채 몸부림치고 있었다.
“읍! 읍! 읍!”
재갈까지 물려 있는지 사내는 말 못하는 짐승마냥 울부짖고 있었다.
“두건 벗겨봐.”
변회장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용주는 두건을 벗기려다가 말고 변회장을 응시했다. 그의 얼굴에 자부심이 드러났다. 용주는 여전히 두건을 벗기지 않고 있었다. 그는 지금 변회장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칭찬다운 칭찬을 받아본 일이 없는 그였다.
“잘했어.”
변회장이 마지못해 강아지에게 간식거리를 주듯이 칭찬을 던져줬다. 하지만 용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부족하다는 듯이 눈을 감고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용주는 변회장의 진심을 원했다.
“잘했으니까 빨리 벗기라고!”
결국 변회장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용주는 서둘러 두건을 벗겼다.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변회장은 두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보기도 싫다는 듯이 깁스를 하지 않은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변회장의 예상과 다른 반응에 용주도 앞으로 와서 사내의 얼굴을 확인했다. 우재가 아니었다. 곧 경악하는 표정이 그의 얼굴을 가득 메웠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용주는 혼잣말이 아닌 혼잣말을 했다.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 뒤통수에서도 보였다. 잠시 눈을 굴리던 용주는 사내의 재갈을 풀었다.
“누구세요? 네? 저한테 왜 이러세요?”
길상이었다. 우는 소리 때문에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불안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너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재갈을 푼다고 길상이 우재로 변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용주는 열심히 눈알을 굴리며 방법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답이 없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네?”
용주의 질문에 길상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자기를 왜 납치했는지 정말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질문이 자신에게 돌아왔다.
“납치조!”
복도를 향한 용주의 목소리가 매서웠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중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확인 안 했어?”
사내의 몸이 움찔했다.
“그게 오늘 갑자기 인원이 바뀌어서. 윽! 죄, 죄송합니다.”
용주는 사내의 말이 끝나길 기다리지 못하고 정강이를 걷어찼다.
“어떡하지?”
용주의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가득 드러났다.
“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변회장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냥 준비해.”
변회장의 목소리는 체념에 가까웠다.
“아닙니다. 제가 다시…….”
“됐어. 그냥 저놈으로 해.”
길상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으나 두려움에 이미 이성이 마비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대화는 아무리 노력해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닙니다. 제가 다시…….”
“됐어. 그냥 준비해.”
“아닙니다. 제가 다시…….”
“됐다고!”
변회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용주는 여기서 그만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용주는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목소리까지 가다듬었다.
“아닙니다. 제가…….”
“다시!”
변회장이 용주의 말을 끊었다.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아닙니다. 그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너부터 죽여 버린다.”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날 선 목소리였다.
“주, 준비, 하겠습니다.”
용주의 간신히 자신의 목소리를 먹어가며 대답했다. 그제야 길상은 안경을 쓴 사람의 실수로 자신이 잘못 납치됐다는 것을 알았다.
“아저씨! 저 아닌 거죠? 네? 그런 거죠? 아저씨! 살려주세요! 네? 살려만 주시면 아무 말도 안할게요! 정말이에요! 저 입 되게 무거워요. 진짜에요!”
울부짖는 길상만 남겨두고 방 안에 있던 사내들이 전부 빠져 나갔다. 창문이 잘 닫혀 있는지 일일이 확인한 용주는 마지막으로 방을 나가며 문을 꼭 닫았다. 방 안에는 변회장과 길상만 남았다.
“그렇게 무서워할 것 없다.”
방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변회장은 길상을 향해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살려주세요. 아저씨, 살려주세요.”
길상의 울부짖음은 어느새 흐느낌으로 바뀌어 있었다.
‘찰칵.’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던 길상은 낯선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변회장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길상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길상은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의 공포에 사로잡혔다.
“사, 사, 살려주세요.”
길상에게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현실이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을 겨누고 있는 총구를 쳐다보며 이게 모두 꿈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걱정마라. 너 안 죽인다.”
변회장은 얼굴에 인자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길상을 향해 있던 총구를 천천히 자신의 머리로 가져갔다.
“뭐, 뭐에요? 왜 그러세요?”
길상의 표정이 아까보다 한층 더 일그러졌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변회장은 총구를 자신의 머리에 겨눈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탕!’
길상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반드시 꿈이어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미친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