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 상쾌하다.”
서희는 편의점 문을 활짝 열었다. 신선한 밤공기가 서희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곧 차가운 공기에 직접 닿은 피부가 닭살로 변했다. 길상과 우재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부터 서희의 집에 나타났다. 편의점에도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가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태욱도 다녀갔다. 아침의 일상도 그리고 학교에서의 생활도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서희의 오늘은 편의점에서 그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서희는 문득 태욱의 얼굴을 떠올렸다.
“고생 했어.”
10시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오빠가 조금 일찍 와줬다.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이런 날도 있어야지.”
오빠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었다. 서희의 처지를 알고 있는 오빠는 가끔 서희의 편의를 봐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여유 있게 인수인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10시 정각에 편의점을 나설 수 있었다.
“그럼 갈게요.”
“그래, 조심히 가.”
인사를 마치고 편의점 문을 나서는 순간 서희의 눈에 그녀만 보이는 장면들이 빠르게 재생되었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편의점 앞에 세워져있던 차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내렸다. 그들의 모습을 본 서희는 결심한 듯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은 서둘지 않았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직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희는 그들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걸어가다가 갑자기 골목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알파, 따라가!”
“브라보도 따라가겠다.”
“찰리는 현 위치에 대기하라.”
서희의 돌발 행동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서희는 몇 분 후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 가보는 길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만큼 능숙하게 그녀는 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지만 서희는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이 본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녀는 검은 양복의 사내들에게 곧 잡힐 것 같았다. 포위망은 계속 좁혀졌고 도망갈 공간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그들의 사이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멀리서 그 모습을 봤다면 다르게 생각했을 것이다. 먼 곳에서는 그녀가 도망 다니는 모습이 전혀 아슬아슬해 보이지 않았다. 서희를 포함한 그들 모두가 잘 짜여진 대본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 시간이 조금 못되는 시간이 지났다. 서희도 지쳤지만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은 만큼은 아니었다. 그들은 거의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양복은 땀에 다 젖었고 머리 위로는 김이 올라왔다. 지쳐있는 검은 양복들을 뒤로 하고 서희는 산동네를 내려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행적을 놓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그녀를 다시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은 지하철역 앞에 있는 그녀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지하철역 아래에서 대기하던 팀도 합류했다. 아무리 봐도 더 이상 그녀가 도망갈 곳이 없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 초조한 빛이 떠돌았다. 두리번거리는 것이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띠링!’
그녀의 스마트폰에서 11시를 알리는 알람 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할머니 약 챙겨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애써 지우며 지하철역에서 올라오는 사람들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곧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돌았다.
그녀는 몸을 던졌고, 그와 함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