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 서희는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우재와 길상이 편의점을 다녀간 지도 벌써 한 시간이 다되어 갔다. 이상하리만큼 손님이 별로 없는 날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진열대를 둘러보았다. 부족한 걸 그때그때 채우고, 뭐든지 바로 정리하는 습관 때문에 다시 둘러봐도 손 댈 게 별로 없었다.
“어? 하나밖에 안 남았네.”
서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태욱이 먹는 도시락이 하나만 남아 있었다. 서희는 아직 편의점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태욱이 궁금해졌다.
“역시 돌아보길 잘했다니까.”
서희는 혼잣말을 하며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나 남은 도시락을 챙겨 계산대로 돌아갔다. 아직 날씨가 쌀쌀해서 몇 시간쯤은 실온에 둬도 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서 오세요.”
태욱과 같은 교복에 반가운 마음이 생기려다 말았다. 함께 들어온 세 명 모두 인상이 좋지 않았다. 불길했다.
“담배 주세요.”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교복만 안 입었어도 그냥 줬을 얼굴들이었다. 무서워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그냥 주지. 피곤하게 일 만들지 말고.”
한 명이 짝 다리를 짚으면서 이죽거렸다.
“미성년자한테는 못 팔아요.”
서희는 일부러 눈을 피한 채 말투에 감정을 싣지 않았다.
“에이, 우리도 내년이면 성인이야.”
계산대에 손을 짚고 있던 학생이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서희를 위협했다. 서희는 살짝 뒤로 물러섰다.
“시끄럽게 안 할 테니까 빨리 주라고!”
지금까지 조용하게 있던 학생이 입을 열었다. 다른 학생들과 달리 중압감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지만 덩치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앞을 가리고 서 있는 세 명도 돌아보지 않았다. 들어온 사람이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서희와 달리 그들은 아무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선배, 여기서 뭐해요?”
“어? 태…욱? 최태욱!”
편의점에 들어온 태욱은 단번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맹수들에 둘러싸인 채 잔뜩 움츠리고 있는 서희가 먹잇감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태욱은 그녀가 자신을 향해 보내던 간절한 눈빛을 읽었다. 그의 예상과 달리 겁먹은 눈빛이 아니었다. 태욱이 읽은 그녀의 눈빛은 ‘도와주세요’가 아니었다. ‘어서 도망가’였다. 잠깐이었지만 태욱은 서희에게서 아우라를 보았다. 홀로 어둠과 싸우고 있는 작은 촛불 같았다.
정신을 차린 태욱의 눈에 덩치들이 입고 있는 교복이 들어왔다. 그때가지도 그들은 태욱에게 눈길도 안주고 있었다. 안 그래도 도망갈 생각이 없던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태욱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비쳤다.
“너는 여기 어쩐 일이야?”
“저 여기 단골인데요.”
“단골? 아, 단골이구나.”
들어온 사람이 태욱인 걸 확인했을 때 서희는 걱정이 먼저 되었다. 내년이면 성인이라고 한 말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태욱과 같은 학교 3학년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그 학교에서 어둠을 담당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런 그들에게 태욱이 맞서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차라리 그대로 도망가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녀와 눈이 마주친 태욱은 도망가기는커녕 태연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다가왔다. 홀로 그들과 기 싸움을 하고 있을 때보다 더 긴장됐다. 그런데 태욱을 대하는 그들의 반응이 그녀의 예상과 너무나 달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태욱을 어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이 태욱을 대하는 태도를 확인한 순간부터 서희는 평온한 표정을 되찾았다.
“여기, 도시락이요.”
서희는 갑자기 생각난 듯이 아까 챙겨두었던 도시락을 내밀었다.
“없는 줄 알았는데, 고맙습니다.”
태욱이 반갑게 도시락을 받아들었다. 계산대에서 비켜서 있던 덩치들은 태욱과 서희를 번갈아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뭐 사러 왔어요?”
계산을 마친 태욱이 덩치들에게 물었다. 덩치들은 서희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 아니야.”
서희에게 위협을 가하던 녀석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네?”
“어, 어, 없대. 우리가 찾는 거. 그치?”
친구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표정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 그래. 맞아. 없다고 했지?”
그들이 동의를 구하듯이 일제히 서희를 보았다. 그들을 따라 태욱도 서희를 보았다. 서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만 갈까?”
“그래, 그러자.”
“우리 먼저 갈게.”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만담을 마친 덩치들은 들어올 때보다 세 배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서희와 태욱은 잠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네. 고맙습니다.”
태욱은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서희는 태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붉어진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