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식사하세요.”
길상과 우재의 도움으로 상차림을 마친 서희가 할머니를 불렀다. 대부분 우재와 길상의 어머니가 보내주신 반찬들이었다. 우재와 길상은 일부러 서희의 집에 와서 아침을 먹었다. 서희가 학교에 갈 준비를 할 수 있게 할머니를 돌봐 드리고, 서희의 아침도 챙기면서 길상이가 서희와 함께 학교로 갈 수 있는 핑계도 만드는 일석삼조의 방안이었다. 서희가 이모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는 건 덤이었다. 모두 우재의 생각이었다. 길상은 아침마다 서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신나했다.
“내가 모시고 나올게.”
길상이 할머니가 계신 방으로 움직였다. 우재는 말없이 수저를 놓고 있었다.
“나간다.”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였다. 문이 열렸다. 할머니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츠하이머, 할머니는 치매에 걸렸다. 불편한 몸 때문에 많은 시간을 누워서 지내던 할머니에게 얼마 전 새로 생긴 병이었다. 아직은 초기 단계여서 대부분의 시간을 제정신으로 지내시지만 기억을 잃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그 주기도 짧아지고 있었다.
넷은 한 식구처럼 자연스럽게 식사를 했다. 주로 길상이 떠들었고 서희가 보복을 했다. 우재도 간간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할머니는 가끔씩 엷은 미소만 보이며 식사에 집중했다.
할머니가 편찮아지시면서 서희는 부모님이 남겨주신 보험금 대부분을 할머니의 치료비로 사용했다. 아깝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지금 서희에게는 할머니가 전부였다. 다만 나아지기는커녕 현상유지도 시켜주지 못하는 병원의 치료가 원망스러웠다. 부족한 할머니의 병원비를 충당하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서희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몸이 힘든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할머니만 곁에 있다면 웃을 수 있었다. 서희에겐 가난쯤은 씩씩하게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가 치매에까지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서희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말의 의미를 생생하게 느꼈다. ‘이젠 정말 포기해야 하는 건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마 우재와 길상이 덕분에 겨우 버티고 있었다.
아들들을 통해 서희 할머니의 소식을 듣게 된 이모들이 다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서희는 그동안 정중하게 사양해오던 이모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숨통이 조금 트이는 것 같았다.
서희는 가끔 이모들이 없었다면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오래전에 처분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상상만으로도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오래된 만큼 낡고, 수리해야 할 곳이 많은 집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저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간 옛날 동네에 자리한 언젠가 철거해야 할 낡은 건물일 뿐이었지만 서희에겐 부모님과의 추억을 고스란히 담긴 소중한 공간이었다. 그녀에게 집은 곳곳에서 부모님을 느낄 수 있는 보물 상자 같은 곳이었다.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길과 현관, 마당, 그리고 집안 구석구석에서 서희는 부모님을 만났다. 그렇게 서희는 힘들고 지칠 때마다 집에게 위로를 받았다. 세월의 흔적까지는 어쩌지 못해도 그녀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집을 깨끗하게 유지했다. 그것이 그녀가 집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나, 할 말 있어!”
식사가 끝나고 식탁을 대충 치웠을 때쯤 길상이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계속 눈치를 보던 이유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서희야, 이거!”
반지였다.
“웬 반지냐?”
서희보다 우재가 먼저 반응했다. 서희는 빈 접시를 차곡차곡 쌓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커플링이야.”
길상은 우재의 관심이 고마웠다. 목소리 톤이 한층 높아졌다.
“커플링?”
이번에도 우재였다. 싱크대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서희가 사용한 접시들을 싱크대에 내려놓고 있었다.
“응, 우리, 정식으로 사귀자!”
길상은 서희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목소리를 깔았다.
“됐어.”
서희의 대답에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었다.
“생각하는 척이라도 하지.”
우재가 안쓰러운 눈으로 길상을 쳐다봤다.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투였다.
“일단, 한 번 껴보기라도 해 봐!”
길상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떼를 쓰기 시작했다.
“한 번 만!”
“싫어.”
“어울리는지 보자. 아니, 맞는지만 보자!”
길상이 한 발 물러섰지만 서희는 그 틈을 바로 메꾸어 버렸다.
“싫어.”
둘의 실랑이는 한참이나 계속됐다. 둘의 끝날 것 같지 않은 대화를 마무리해준 건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둘이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재밌었지만 저러다 학교에 늦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 반지, 이 할미가 맡아두마. 우리 길상이 위해서 내가 한 번 서희 설득해 볼란다.”
“할머니!”
서희는 소리를 빽 질렀고, 길상은 다정한 목소리로 할머니를 부르며 할머니 팔에 매달렸다.
“나 먼저 간다.”
할머니에게 인사를 마친 우재가 화장실 문에 대고 말했다.
“벌써 가게?”
양치를 하던 서희가 욕실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지금 가야 버스 안 놓쳐.”
“야, 역시 다르네. 괜히 전국 일등이 아니야.”
길상이 우재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래. 잘 가.”
서희가 손을 흔들었다.
“내일 또 올게.”
먼저 일어선 우재를 길상이 서희를 대신해 현관까지 배웅했다.
“굳이 안 와도 돼. 내가 올 테니까. 넌 그냥 하던 공부나 계속해. 이 형님이 다 알아서 챙길 테니까 걱정 뚝! 하라고.”
현관문을 나서려던 우재가 길상의 말이 끝나자 뒤돌아섰다. 그리고 잠시 길상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다시 서희를 향해 말했다.
“내일 올게.”
“응.”
서희가 아까보다 더 크게 손을 흔들었다.
“지금 니들 뭐야? 나 봤어. 다 봤다고!”
흥분하는 길상을 뒤로하고 우재는 현관문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서희는 학교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길상이가 있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수업시간에 졸기도 하고 수업내용을 따라가지 못할 때도 많았지만 이만하면 괜찮았다. 선생님도, 같은 반 친구들도 나쁘지 않았다. 늘 그렇듯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종례시간이 되었다.
오늘도 길상이 교문에서 서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할머니 저녁은 이 오빠가 챙겨주마.”
편의점 앞까지 같이 와준 길상이 엄지를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너 밖에 없어’라는 말을 듣고 싶은 얼굴이었다.
“고마워.”
서희는 일부러 다른 말을 했다. 듣고 싶은 말을 해줄까 했다가 마음을 바꿨다. 반지 얘기를 다시 꺼낼 것 같았다. 그래도 평소와 다르게 최선을 다해서 상냥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같이 있으면 시끄럽고 귀찮을 때도 많지만, 그래도 있어서 의지가 되고 도움이 되는 소중한 친구였다.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래, 결혼할 사인데.”
‘퍽!’
장난스러운 길상의 말에 서희도 방긋 웃으며 어퍼컷으로 대답했다. 배를 부여잡고 켁켁 거리는 길상을 외면한 채 서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내리는 봄비에 서희는 창문을 통해 편의점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람을 견디며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벚꽃 잎들도 비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서희는 점점 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거리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안하고 어떤 생각도 하지 않는 이런 잠깐의 시간이 유일한 휴식이었다.
텅 빈 것 같던 서희의 눈에서 갑자기 빛이 났다. 그녀가 향한 창 밖에는 우산을 쓴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섞여서 걸어가거나 뛰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서희가 보고 있는 것은 전혀 다른 장면이었다. 한동안 멍하니 있던 그녀가 갑자기 몸서리를 치며 손으로 자신의 양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서 오세요.”
문에 달린 종소리에 서희는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중간키에 약간 구부정한 어깨, 뿔테 안경에 평범한 인상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서희는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아주 잠깐 멈칫했다. 뒷목이 서늘해졌다. 방금 전, 서희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미래의 모습은 지금도 가끔 보였다. 대부분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장면들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 일이 이제는 일상처럼 느껴져서 일종의 ‘데자뷰’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어쨌든 서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곧 있을 그 일이 너무나 싫었다. 상상만으로도 세포 하나하나가 다 거꾸로 서는 기분이었다.
“여기요.”
남자가 계산대에 바나나맛 우유 하나를 올려놓았다. 지금이었다. 서희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흐으으으흠.”
서희가 본 그대로였다. 남자는 서희의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실제로는 더 소름이 끼쳤다. 비명이 나올 뻔한 걸 간신히 참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코감기가 걸려서요.”
남자도 서희의 반응에 당황했는지 초등학생도 안속을 것 같은 변명을 어색하게 늘어놓았다. 계산을 마친 남자는 서둘러 편의점을 나가려다 문 앞에 세워둔 우산꽂이를 건드렸다. 쓰러진 우산꽂이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이 뒤통수에도 나타났다. 쓰러진 우산꽂이를 세우고 바닥에 널부러진 우산들을 정리하는 내내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괜찮아요. 나머지는 제가 할게요.”
남자의 옆에 가까이 가는 게 싫었지만 계속 모른 척 할 수는 없었다. 서희의 말에 남자는 동작을 멈추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몸을 반만 돌린 채 옆으로 인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편의점으로 들어오던 사람과 어깨를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들어오던 사람이 먼저 사과했다. 학생이었다. 남자는 사과를 하는 둥 받는 둥 하며 급하게 자리를 떠나려다가 갑자기 그 학생에게 코를 들이댔다. 학생은 반사적으로 남자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비 냄샌가?”
남자는 알지 못할 혼잣말만 남기며 빗속으로 사라졌다.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 태욱은 방금 남자와 부딪힌 어깨를 털어냈다. 의식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어서 오세요.”
서희의 목소리에 유난히 반가움이 묻어났다. 태욱은 서희가 아르바이트하는 시간에 항상 들르는 단골손님이었다. 태욱은 이 시간만 되면 꼭 편의점에 와서 같은 도시락을 사갔다. 서희는 어느새 그런 태욱이 친구 같이 편하게 느껴졌다. 서희는 그가 항상 사가는 도시락이 하나만 남아 있을 때면 일부러 숨겨두기도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단골을 위한 일종의 서비스일 뿐이라는 변명을 스스로에게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