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
“오늘도 일등이네.”
카풀로 늘 함께 등교하는 선희와 수빈이었다. 항상 붙어 다니는 그들은 늘 해맑았다. 머리 모양도, 여기저기 보이는 액세서리도 모두 똑같았다. 이란성 쌍둥이를 보는 것 같았다.
“응.”
태욱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소울메이트 같던 둘이 요즘 자신을 두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 매일 일등이지?”
“대단하다.”
“맞아. 거기서 뭐 타고 와?”
압박면접을 당하는 것 같았다. 태욱은 이들에게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일 교시가 뭐더라?”
그가 어색한 웃음과 함께 주제를 바꿨다.
“수학인가?”
“아니야. 국어일걸?”
태욱은 원래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집을 얻었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우연히 들어간 교사용 남자 화장실에서 통로를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어가 본 통로 끝이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집 베란다였다. 아직 분양이 시작되지 않은 신축빌라였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보다도 학교에서 더 멀었다. 총알택시를 타도 학교에서 두 시간은 가뿐하게 넘길 것 같은 거리에다 상습적인 정체구간까지 있는 최악의 교통조건이었다. 그래도 태욱은 상관없었다. 그것보다는 지금 살고 있는 집보다 훨씬 싼 보증금과 저렴한 월세가 그의 눈에 먼저 들어왔다. 바로 이사를 결정했다. 처음 집을 얻을 때도 태욱의 일에 더 이상 관여하기를 포기한 부모님이 관련서류 일체를 태욱에게 맡긴 터라 계약하고 이사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태욱은 이사한다는 사실을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전체조회 있는 거 알지? 다들 강당으로 모여!”
담임선생님이 복도에 서서 교실 안으로 얼굴만 들이밀고 말했다. 나름대로 권위적인 목소리를 꾸며서 냈지만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아이는 단 한명도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큰소리로 학생들을 다그쳤다. 그래도 반응이 없자 들고 있던 몽둥이로 시끄럽게 교실문을 두드렸다. 전체조회는 한 달에 한 번 하는데 오늘이 그날이었다.
“네, 지금 갑니다.”
시끄러운 소리에 아이들이 귀찮은 티를 팍팍 내며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욱도 일어섰다. 그는 스마트폰과 이어폰을 챙겼다.
교장선생님의 훈화말씀을 듣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태욱도 다른 학생들처럼 이어폰 속 노래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정도는 학생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정숙을 유지시키기 위해 애쓰는 학생부 선생님이나 담임선생님들도 봇 본 척 해주었다. 선생님들의 입장에서는 옆 친구와 떠들거나 돌아다니는 것보다 똑바로 서서 가만히 있는 편이 훨씬 고마웠을 것이다.
“오늘 약속, 알지?”
어느새 옆에 진아가 서 있었다.
‘아, 학원!’
잊고 있었다. 태욱은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진아는 태욱의 성적이 좋지 않다는 것을 빌미로 얼마 전부터 함께 학원에 다닐 것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더 이상 거절하기도 힘든 상황에까지 몰린 태욱은 지난주에 함께 가겠노라고 약속을 해버렸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진아는 학교에서 퀸카로 통하는 아이 중 하나였다. 짙은 쌍꺼풀이 자리한 큰 눈에 작고 오똑한 코, 붉은 입술과 하얀 피부, 길에서 만나면 뒤돌아보게 될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녀가 태욱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꽤 적극적이어서 솔직히 태욱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진아는 처음부터 인기가 많았다. 밀려드는 고백에 친구들을 방패삼아 도망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인기가 언제부턴가 갑자기 사그라졌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그녀에게 좋게 작용했다. 자신만 알던 그녀가 점점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관심을 처음 받게 된 사람이 바로 태욱이었다.
태욱은 늘 구석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 그를 진아가 발견한 것이다.
그만큼 태욱은 어느새 다 자란 수컷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키가 크면서 어깨도 함께 넓어졌다. 발달한 상체 근육 때문에 교복이 작아 보였다. 게다가 제법 남자답게 변한 얼굴은 준수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만 모르고 있을 뿐 진아처럼 그의 변화를 눈치 채기 시작한 여학생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었다.
“학교 끝나고 교문에서 만나.”
진아가 한 쪽 눈을 찡긋했다. 그녀는 당황한 그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 그래.”
태욱은 어쩔 줄 몰랐다.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많은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떠들어?”
학생부장이었다. 진아는 교장선생님 말씀을 듣는 척 자세를 바로 잡았다. 태욱도 고개를 들었다.
오늘 진아와 함께 갈 학원이 어딘지는 몰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통로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학원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오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이 그가 늘 이용한다고 믿는 그 대중교통을 진짜로 이용해야 한다. 그건 그에게 3초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두 시간을 걸려 가야한다는 의미였다.
태욱은 남들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에서는 통로를 이용한 이동 뿐 아니라 공간에 숨는 능력도 사용하지 않았다. 철이 들면서부터 그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특히 다른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될까봐 항상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많은 책과 여러 편의 영화를 본 결과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게 그가 내린 결론이었다.
태욱은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간으로 들어가거나 나오는 장면을 남에게 들키지 않았다. 그가 특히 두려워하는 것은 동영상 촬영이었다. 남들 눈에 띄지 않으려 항상 조심했지만 그전에는 만약 들키더라도 헛것을 봤다거나 잘못 본거라고 우기면 그냥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사진을 찍히더라도 조작으로 몰면 그만이라는 단순한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동영상 촬영은 얘기가 달랐다.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다행히 지금까지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학원수업은 밤 10시가 지나서야 겨우 끝났다. 수업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다만, 집에 갈 생각에 마음이 바빴다.
“최태욱, 같이 가!”
진아의 목소리에 걸음을 늦췄다. 태욱도 그녀의 의도를 모르지는 않았다. 마음이 아예 없지도 않았다. 누가 봐도 예쁜 여자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티를 팍팍 내는데 싫어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도 남자인지라 마음이 흔들릴 때가 종종 있었다.
태욱의 학교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몇 명 없었다. 진아는 그 몇 명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늦은 시간까지 학원 수업을 들었다. 태욱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와의 관계가 특별해졌을 때 감당해야 하는 위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그녀가 더 다가오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태욱은 아직 자신의 비밀을 누군가와 공유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바래다 줄 거지?”
아까 수업시간에 선생님을 보던 멍한 눈빛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그래.”
태욱은 거절해야 한다는 말을 속으로 수십 번 했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갑자기 추위가 느껴져서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여자는 오해했고, 태욱에게 더 가깝게 붙었다.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고마워, 내일봐”
“그래, 잘 자.”
태욱은 아파트 현관너머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확인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함께 오는 내내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간간이 대화가 오가긴 했지만 선생님이나 친구들, 그것도 아니면 연예인 얘기 같은 의미 없는 내용들이었다. 분위기 때문인지 적극적이던 진아도 수줍어하는 것 같았다. 그녀를 집에 바래다주는 삼십 분 남짓의 시간이 태욱에게는 세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오늘도 일등으로 등교한 태욱은 책상에 엎드려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는 로마에 있는 트레비 분수 앞에 있었다. TV채널을 돌리다가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를 본 게 실수였다.
“니가 최태욱이냐?”
익숙한 이름이 들리면서 갑자기 주위가 깜깜해졌다. 태욱은 고개를 들었다. 불량한 기운이 느껴졌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어둠의 정체가 궁금했다. 고개를 든 태욱의 눈에 불만이 가득한 얼굴들이 가득 들어왔다.
“니가 최태욱이냐고?”
태욱은 눈을 찡그렸다.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런지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대답은 했다.
“그런데.”
“그런데?”
앞에 있던 녀석의 발이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태욱의 몸은 잠결에도 반응했다. 상대의 발이 책상에 닿기 전에 태욱이 먼저 책상을 앞으로 밀었다. 발을 올리던 녀석의 정강이가 책상 모서리에 찍혔다. 녀석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정강이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니들 뭐야?”
태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욱을 둘러쌓고 있던 무리들이 움찔하며 한 발자국씩 물러났다.
“니들? 우리가 니 친구로 보이냐? 이 새끼야?”
그들 중 한 명이 나서며 태욱을 위협했다.
태욱은 천천히 그들을 둘러보았다. 바닥에서 구르는 녀석까지 전부 여섯 명이었다. 다들 덩치들이 좋아서 교복이 답답해 보였다. 그나마도 제대로 입은 녀석이 없었다. 험악한 인상과 거친 기운들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3학년 일진들이었다. 학교생활에 별 관심이 없는 그였어도 피해 다녀야 할 인물들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3학년?”
“그래 3학년이다. 이 개새끼야!”
태욱은 난감했다. 중학교 때 하도 문제를 많이 일으켜서 고등학교는 조용하게 다니고 싶었다. 그나마 이 학교에 자기를 받아준 것도 폭력사건에 휘말린 적이 없어서라는 중 3때 담임선생님의 말이 생각났다.
“너희들 뭐야?”
영어 선생님이었다. 영어가 1교시인 모양이었다.
“점심시간에 옥상으로 올라와라.”
태욱을 둘러싼 무리 중 하나가 태욱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너희 뭐냐니까?”
영어 선생님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목소리만 높였다.
“야, 가자.”
무리 중 하나가 명령하듯 말했다. 무리의 대장인 듯 했다. 그의 말에 나머지가 아직 정강이를 부여잡고 바닥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는 녀석을 부축하며 빠져나갔다. 마지막에 나가던 녀석이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자신의 눈과 태욱을 번갈아가며 가리켰다. 그는 끝까지 태욱을 노려보았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태욱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이런 일은 미뤄봐야 좋을 게 없었다. 다만 궁금한 건 그들이 자신에게 이러는 이유였다. 옥상엔 아무도 없었다. 태욱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난간에 기대어 섰다. 따뜻한 햇살이 얼굴에 와 닿았다. 기분이 좋아졌다. 그에게서 불안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라? 이 새끼 벌써 와 있네?”
태욱은 경박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똥파리였다. 짱만 믿고 설친다는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 뒤로 한 무리가 올라왔다. 대부분 아침에 봤던 얼굴들이었다. 그리고 그 무리의 중간에 태욱이 알고 있는 얼굴도 있었다. 짱이었다. 그의 이름 역시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처리할게.”
똥파리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점수 좀 따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짱이 허락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똥파리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태욱의 앞에 섰다. 껌 씹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일단 좀 맞자!”
짝다리를 짚고 선 똥파리가 소매를 걷었다.
“그 전에 이유나 좀 알 수 있을까요?”
태욱은 최대한 공손하게 물었다.
“아, 그게 궁금하셨어요?”
비아냥거리던 똥파리가 씹던 껌을 바닥에 뱉었다.
“후배님이 궁금해 하시니까 또 선배 된 입장에서는 알려드려야지.”
그는 여전히 비아냥거리는 말투였다.
“너, 요즘 진아랑 친하게 지내더라?
“진아?”
태욱은 자신이 여기에 불려 나온 이유를 직감했다.
“뭐야, 만석이가 진아 찍은 거 진짜 몰랐나보네.”
이제야 생각이 났다. 이만석, 짱의 이름이었다. 엄청나던 진아의 인기가 갑자기 쪼그라든 게 떠올랐다.
“그래도 맞아. 이 새끼야!”
태욱이 생각에 잠긴 틈에 똥파리가 주먹을 날렸다.
태욱은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다. 세계 곳곳을 여행 다니면서 의도치 않게 쫓길 일이 많았다. 대부분 경찰 아니면 경비원들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프랑스의 한 빈민가로 나온 태욱은 파쿠르를 하는 무리들을 보고 그들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곧 그는 모든 여행지에서 야마카시를 하며 놀았다. 그러나 도망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범죄현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바람에 범죄조직에게 쫓기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 시작했다. 태욱은 세계 곳곳에 숨어있는 고수들로부터 격투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배운 기술들을 실전으로 몸에 익혔다. 특히 태욱은 러시아에서 만난 퇴역군인 할아버지에게서 전수받은 시스테마를 가장 열심히 연습했다. 실전에서도 그 기술들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 최소한의 동작과 힘만으로 적을 제압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철저하게 실전만을 위한 무예였다. 그런 태욱에게 싸움 좀 하는 고등학생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날, 옥상에서 두 발로 걸어 내려온 사람은 최태욱 한 명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