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돼!”
외마디 비명과 함께 서희는 잠에서 깨어났다. 누워있던 몸을 힘겹게 일으킨 그녀는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하얗게 질린 양 볼이 희미한 달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옆에서 자고 있는 할머니의 인기척에 겨우 제정신이 돌아온 그녀는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오늘도 똑같은 꿈이었다.
오 년 전, 초등학교 졸업식 날 서희는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
서희가 자신의 능력을 처음 알게 된 건 유치원 때였다. 발표회에서 연극을 준비하던 서희가 맡은 역할은 지나가는 행인이었다. 그것도 없던 배역을 급하게 만든 것이었다. 원래 서희는 주인공인 백설 공주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같은 반 친구 중 하나가 자기가 공주를 하겠다며 떼를 썼다. 서희는 그 친구에게 자신의 배역을 선뜻 양보했다.
그 친구는 발표회 날에 유치원을 나오지 못했다. 결국 서희가 다시 백설공주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완벽하게 그 역할을 해냈다. 서희가 대사를 모두 외우고 있다는 말도 믿지 못하던 선생님은 그녀가 연기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모습을 보고 무척 놀라워했다.
서희는 자신이 백설공주 역할을 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장면이 보였다. 그래서 친구에게 양보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무대 뒤에서 혼자 연습하는 게 힘들기는 했지만 나름 재미도 있었다. 그때부터 서희는 가끔 자신에게만 보이는 장면들이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는 걸 알게 됐다.
초등학교 졸업을 며칠 앞두고 서희는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고 말았다. 아빠엄마와 함께 차를 타고 있었다. 운전하는 아빠의 옆자리에 꽃다발을 안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엄마는 뒷자리에 앉아 계셨다.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말소리가 잘 들리지는 않았다. 간간이 들리는 단어와 꽃다발을 통해 졸업식 날이라고 짐작했다. 서희는 상체까지 돌려가며 뒤에 앉아있는 엄마와 한참을 얘기했다. 잠시 후 차가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차 앞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렸다. 간간이 대화에 끼어들던 아빠도 고개를 돌려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때였다.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차 안을 덮쳐왔다. 서희는 공포로 일그러진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점처럼 보였던 엄마의 눈동자에 비친 검은 물체가 어느새 엄마의 검은자위를 모두 덮고 있었다. 서희는 그 모든 일이 천천히 재생되는 영상처럼 느껴졌다.
서희는 이마에 솟은 식은땀을 닦아냈다. 이미 겪은 일처럼 생생했다.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닌데도 심장이 저려왔다. 서희는 가슴에 손을 댔다. 그녀의 의지와는 다르게 다음 장면이 눈 앞에 펼쳐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보이는 영상을 어쩌지 못했다.
서희는 팔에 깁스를 한 채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는 자신의 모습까지 모두 봐야만 했다.
서희는 졸업식에 부모님을 오지 못하게 하려고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다. 겁이 났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이 본 미래가 틀린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이번만은 틀리기를 간절히 빌었다. 부모님께 거짓말도 해보고 사실대로도 말해 봤다. 그녀의 부모는 미래를 본다는 그녀의 말도 거짓말로 여겼다.
결국 부모님은 졸업식에 오셨다. 불안했지만 기쁘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처럼 부모님과 함께 웃으며 어두운 생각을 지우려했다. 아무 걱정 없이 마냥 즐거워하고 있는 친구들을 보며 그 속에서 자신도 그들과 같은 모습인 것이 행복했다. 자신에게 안겨있는 익숙한 모양의 꽃다발이 불길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사진을 찍는 내내 서희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졸업식이 끝나고 차에 가까이 갈수록 다시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서희는 습관처럼 앞좌석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손이 떨렸다. 불안했다. 뭐라도 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그 이야기를 했을 때 화를 참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던 서희는 뒷좌석에 탔다. 그거라도 해야 했다. 자신이 본 미래를 바꾸고 싶은 서희의 간절한 몸부림이었다. 10살 때부터 늘 앞자리를 고집해오던 서희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그녀의 부모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차에 타서도 서희는 부모의 안전벨트를 챙기고 아빠가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게 이야기도 자제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서희가 우겨서 사고가 났던 사거리를 피해 멀리 돌아갔는데도 사고는 일어났다. 정신이 들었을 때 그녀는 아스팔트 위에 누워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온몸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새어나오는 신음을 참으며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엄마와 아빠가 보고 싶었다. 엄마는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아빠는 보이지 않았다.
“엄마….”
있는 힘을 다해 불렀지만 목소리는 생각보다 더 작았다. 그래도 그 간절함이 전해졌는지 서희의 눈에 엄마가 반응하는 것이 보였다. 엄마는 서희를 향해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그 작은 움직임도 무척 힘겨워보였다. 마침내 서희와 얼굴을 마주한 엄마는 서희를 향해 미소를 지어 주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 말을 끝으로 서희는 기억이 없었다. 엄마가 먼저 생명의 끈을 놓았는지 자신이 먼저 정신을 놓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에 보았던 엄마의 미소만 계속 떠오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비밀이 되었다.
서희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엄마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심지어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서희는 그렇게 느꼈다.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 봐도 엄마는 표정으로, 그리고 눈빛으로 서희에게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른 서희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재와 길상이가 서희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서희의 엄마에게는 단짝 친구가 둘 있었다. 셋은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하고 한 해에 아이들을 낳았다. 서희만 딸이었다. 이모들은 둘 다 아들을 낳았다. 그들이 우재와 길상이었다. 그 중 서희의 엄마와 길상의 엄마는 나름 문학소녀란 자부심에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인 박경리의 ‘토지’에서 아이들의 이름을 따왔다.
우재와 길상이에게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름을 설명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기우재입니다. 재는 ‘어’, ‘이’가 아니라, ‘아’, ‘이’를 씁니다. 넉넉할 ‘우’자에 맑을 ‘재’자로 부모님께서 성품이 넉넉하고 맑은 아이로 자라라고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안녕하세요. 주길상입니다. ‘길상’은 어머니께서 박경리의 ‘토지’를 좋아하셔서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기왕이면 성도 좀 고려해주셨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저는 제 이름이 좋습니다.”
지금까지 서희는 이 인사말을 수백 번을 들어서 거의 똑같이 외울 수 있을 정도였다. 나중에는 이들이 이런 인사를 할 때마다 입만 벙긋거리며 따라 하기도 했다. 서희는 둘의 인사말을 모두 싫어했지만 특히 길상의 인사말을 더 싫어했다. 서희가 함께 있을 때면 길상이는 꼭 서희까지 인사말에 끼워 넣었다.
“여기는 제 친구 박서희인데요. 이름 듣고 눈치 채셨겠지만 부모님들이 맺어주신 제 연인입니다.”
강단 있기로 빠지지 않는 서희였지만 처음 몇 번은 당황한 나머지 그냥 넘어가 주었다. 그러나 곧 ‘박서흰데요’에서 인사말을 끊었다. 그리고 곧 길상이는 ‘여기는’이라는 말만 꺼내도 신음소리를 내뱉게 되었다.
허술한 면이 많기는 해도 길상은 어딜 가나 인기가 많았다. 재미있는 성격과 귀엽게 웃는 모습에 반한 여학생들도 몇 명 있었다. 하지만 옆에 우재가 있는 한 길상은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우재는 정말 잘생겼다. 길거리 캐스팅 받는 걸 함께 다닐 때마다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날카로워 보이지만 볼수록 매력적인 눈매에 칼날같이 날렵하게 솟은 코, V라인의 정석을 보여주는 턱 선까지. 남자답게 생겼지만 여장도 잘 어울릴 것 같은 예쁜 얼굴이었다. 게다가 공부도 잘했다.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전국순위 10위 밖으로 밀려나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완벽한 녀석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우재는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런 것에 신경을 안 쓴다지만 옆에서 보면 신경 쓰는 게 다 보였다. 그리고 불리할 때마다 눈웃음 짓는 걸 보면 자기가 가진 무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탕을 좋아하는 우재를 위해 그녀들이 갖다 바친 사탕만 모아도 웬만한 사탕 공장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우재의 인기 탓에 고생한건 서희였다. 길상이도 늘 함께이긴 하지만 그는 남자였다. 우재와 항상 붙어 다니는 서희는 우재의 공식, 비공식 팬클럽 아이들에게 공공의 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서희는 길상이도 함께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의 눈에 길상이가 보일 리 없었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 그들도 서희의 진심을 알아줬다. 서희는 그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우재의 모든 것을 공유했다. 그래도 서희는 한 가지 원칙은 꼭 지켰다. 다른 건 다 알려줘도 서희만 알고 있는 우재의 비밀을 말해주지는 않았다. 길상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여자들이 우재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단 한 가지 이유, 바로 우재의 표정에 관한 비밀이었다. 겨우 용기를 내어 고백을 결심한 상대의 영혼까지 얼려버릴 것 같은 차가운 표정의 비밀은 오직 서희만 알고 있었다.
어쨌든 우재와 길상은 서희에게는 정말 친남매 같은 존재였다.
“야, 우리는 어떻게 고등학교도 같은 데 다니냐?”
서희에게 매일 같이 프러포즈를 하는 길상이 오늘도 그 시작을 알렸다. 그는 아침 일찍부터 서희의 집에 들이닥쳐서 분주하게 등교 준비하는 그녀에게 이것저것 참견하는 중이었다. 같은 학교 타령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헛소리 할 거면 그 입, 닫아라.”
서희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리 없었다.
“역시 우린 운명인가 봐.”
그렇다고 기가 죽을 길상이가 아니었다. 지난 15년 동안 서희가 아무리 구박해도 뚝심 있게 한 길만 걷고 있는 그였다.
“나 왔어.”
우재가 자연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입엔 사탕이 물려있었다.
“오, 전국 일등!”
신발을 벗고 있는 우재를 길상이 먼저 반겼다. 우재는 이번 모의고사에서 전국 일등을 했다.
“캬! 전국 일등이라니. 이제 익숙할 때도 됐는데 아직도 들을 때마다 내가 깜짝깜짝 놀란다.”
“서희는?”
“씻고 있어. 너, 전국 일등 한 거 어쨌든 다 이 형님 덕분인 줄 알아라. 응? 이 형님이 말이야 서희랑 수준 맞춰주려고 일부러 시험만 안 망쳤어도…….”
“주길상!”
화장실에서 울려오는 사자후에 길상은 입을 다물었다.
“할머니는?”
“방에 계셔. 야, 근데 그럼 너 전부 백점 맞은 거냐? 응? 하나도 안 틀린 거야? 진짜 그런 거야?”
“할머니, 저 왔어요.”
“야, 근데 너 그 사탕 좀 이제 끊어라. 응? 이 썩는다. 이 썩어.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사탕이냐? 사탕이. 차라리 담배를…, 아니다. 담배는 아니다. 그래도 담배보다는 사탕이 낫지.”
우재는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길상을 피해 방에 누워 계신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서희의 할머니는 작년부터 급격하게 건강이 나빠지셔서 요즘은 거의 누워만 계신다. 게다가 치매 증상도 나타나서 서희가 혼자 할머니를 돌보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나마 이 둘의 도움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중이었다.
우재만큼은 아니었어도 서희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그녀의 성적은 여전히 상위권에 머물러 있었다. 서희의 성적이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한 것은 할머니의 거동이 불편해지면서부터였다. 그리고 할머니의 치매가 진행되면서 그나마 중간을 유지하던 성적도 거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결국 우재는 국내 최고의 명문 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서희는 경쟁률이 낮은 비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가기 위해 일부러 시험을 망쳤다고 주장하는 길상도 그 주장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와 같은 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다. 그렇게 중학교 때까지 항상 붙어 다니던 삼총사는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두 학교로 찢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