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는 숨겨진 공간들이 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곳곳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공간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이들이 있다. 어떤 공간은 다른 공간으로 연결되기도 해서 그들이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것이 과거에 그들이 귀신이나 도깨비, 그리고 신으로 기록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들을 ‘공간지배자’라고 부른다.
프롤로그
건장한 남성들이 매서운 칼바람에도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산동네를 어지럽게 뛰어다녔다.
그녀는 쫓기고 있었다. 앳되어 보이는 양 볼은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고, 하나로 묶은 머리가 출렁일 때마다 드러나는 하얀 목덜미는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뛰어다니느라 매무새가 조금 흐트러졌을 뿐, 마른 몸을 감싸고 있는 교복은 깨끗하고 단정했다.
반면에 그녀의 주변을 맴도는 검은 양복의 사내들은 하나같이 험악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상당한 훈련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이어폰으로 누군가의 명령을 받으며 한 몸처럼 움직였다. 전문가들이었다.
그녀와 그들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조여 오는 포위망이 그녀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겁에 잔뜩 질려있어야 할 그녀의 얼굴에 초조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단지 입술에 힘을 준 채 큰 눈을 한 곳에 고정시키고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거짓말처럼 위기의 순간마다 그들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그녀는 미로같이 생긴 산동네 골목길을 자기 집 안마당처럼 누비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불안하거나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까지 있어 보였다. 그녀는 그들을 담 하나를 두고 피하기도 하고 고개를 살짝 숙인 것만으로도 따돌리기도 했다. 심지어 찰나의 차이로 그들과 길을 엇갈려 가기도 했다.
누군가가 멀리서 그들의 움직임을 모두 지켜보면서 그녀에게 도망갈 곳을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 말고는 그녀의 움직임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검은 양복들을 피해 부지런히 움직이던 그녀가 갑자기 멈춰 섰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그 잠깐의 멈춤으로 그녀는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에게 거의 잡힐 뻔 했다.
겨우 위험을 피하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패턴으로 이동했다. 인적이 드문 미로 같은 산동네를 빠져나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길로 내려왔다.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그녀도 알고 있었다. 오히려 탁 트인 시야로 인해 눈에 잘 띄어서 더 위험했다. 게다가 그녀를 쫓고 있는 무리는 차를 이용하는데 더 익숙했다. 큰길은 여러 가지로 그녀에게 불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사람들이 붐비는 번화가로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지하철 역 앞에 도착한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무언가를 찾는 눈치였다.
“여기가 맞는데.”
혼잣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이마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하얗고 조그마한 주먹을 꼭 쥐었다. 어렵지 않게 그녀를 발견한 사내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반대편에서도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아마 지하철 안에서도 누군가가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때였다. 한 사내가 지하철역 계단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교복을 입은 모습이 그녀의 또래로 보였다. 이어폰을 끼고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킨 채 다른 사람의 일에는 관심 없는 것 같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가늘게 찢어진 눈과 날렵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턱, 그리고 다부진 어깨가 강한 인상을 남겼다. 등 뒤로 보이는 묵직한 가방이 학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학생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그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다행이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입술 사이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녀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그 남자를 향해 몸을 던졌다. 묶여 있던 머리가 풀리면서 그녀의 검고 긴 생머리가 벚꽃과 함께 허공에 흩날렸다.
‘띠링!’
그녀가 서 있던 곳에는 그녀의 스마트폰에서 울린 알람소리만 남았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은 그 알람소리라도 잡으려는 듯이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믿지 못할 장면에 사내들뿐만 아니라 그곳을 지나던 시민들도 모두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녀가 몸을 날린 곳에는 그 남학생도 그녀도 없었다.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닥에 떨어진 벚꽃 잎들만 쓸쓸하게 구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