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미로 6

　시계 태엽을 돌리는 준결 (홈이 있는 태엽 시계) 천둥치는 소리, 번개가 번쩍이고, 빗줄기가 점점더 거세어지는 밤...태엽 시계의 태엽이 스르르 돌아간다. 준결 시간을 5분전으로 돌린다.

　푸른 안개 깔리면서 시야가 서서히 흐려진다.

　푸른 안개 걷히면서 시야가 밝아진다.

　서하 고여있는 빗물에 미끄러진다. 범학 난간위로 기어올라간다.

　멈춰있지 않은 사람들, 멈춰있지 않을 때는 관망하고 있어야함을 알지만, 준결은 서하를 살리기 위해서 룰을 어긴다.

　‘멈춰있지 않아, 끼어들면 안돼, 하지만, 서하누나를 살려야해 서하 누나를 다치게 할 수 없어’ 준결, 미끄러진 서하를 돌아본다.

　서하 안돼..외치면서 달려가려는 찰나, 되돌아온 준결이 쏜살같이 달려가 범학을 잡는다. 범학, 준결의 힘에 난간 아래로 내려온다. 범학 소주병을 휘두르다 난간에 부딪혀서 뾰족하게 깨어진 소주병으로 자신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준결의 가슴을 찌른다. 깊숙이 박힌 깨어진 소주병, 다친 사람은 되돌아온 준결이다.

　서하가 다치기 직전으로 되돌아가, 태엽을 돌려서 서하를 구한 준결은 그 자리에 쓰러져있다. 범학, 사람을 찌른 자신에게 놀라서 난간에 머리를 일부러 부딪힌다

　과거의 준결도 달려와서 범학을 붙든다.

　달려와서 자신을 붙드는 과거의 준결을 밀치고 다시 난간에 머리를 부딪히고 쓰러지는 범학, 과거의 준결, 범학을 본다.

　서하는 범학을 내버려두고, 달려가서, 피를 흘리고 누워있는 사람을 본다 다름아닌, 준결이다.

　서하는 놀라면서 쓰러져있는 준결과 쓰러진 범학을 보는 과거의 준결을 번갈아가면서 바라본다.

　과거의 준결, 서하와 눈이 마주치고, 역시나 놀란 눈빛으로 보는데, 다시 푸른 안개 깔리면서 시야가 흐려진다.

　푸른 안개가 걷히면서 시야가 밝아진다 피를 흘리면서 누워있는 준결, 역시나 다쳐서 누워있는 범학, 준결을 끌어안고 흐느끼는 서하 둘다 많이 다친 상황이지만, 준결이 더 심각하다. 병원으로 이송된, 준결과 범학을 구급차에서 내린다. 들것에 실려가는 두 사람을 따라 내리는 서하, 울어서 부은 눈으로 옮겨지는 준결을 따라들어간다. 중환자실에 의식이 없는채로 누워있는 준결의 손을 잡는다. 반응이 없는 준결, 서하 준결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역시 반응이 없는 준결, 서하 가슴이 미어지는 슬픈 눈빛으로 준결의 손을 다시 꼭 잡고 있다.

　1인 입원실에서 링거를 맞으면서 잠들어있는 범학,범학모 범학의 얼굴을 만져본다. 범학모 눈물을 흘리면서 범학부를 원망하듯 본다. 범학부, 범학모의 시선을 외면한다. 범학의 입원실 앞 복도에 서있는 범학 부모님과 서하, 마주보며 서있다. “너무 염려마세요 범학씨 곧 괜찮아질거에요”

　“고마워요 우리 애한테 신경써줘서, 우리가..우리가 그래야하는데”

　“기회를 놓치신건 아니잖아요 범학씨 일어나면, 많이 도와주세요” “못난 놈..사내녀석이 약해빠져가지고는” 범학부 혀를 끌끌 찬다 “당신은” 범학모, 원망하면서 본다.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마세요 범학씨 아버님” 범학부 말없이 먼산을 본다. “저는 그만 가볼께요” 꾸벅 인사하면서 자리를 뜬다. 범학모, 범학부, 병실 안으로 들어간다.

　서하 누워있는 준결을 보면서 결심한 듯 태엽 시계(홈이 없는 태엽 시계)를 움켜쥔다. 벽에 걸린 시계 아홉시를 가리킨다. 태엽 시계의 시간을 하루 전으로 되돌린다.

　푸른 안개 깔리면서 서서히 시야가 흐려진다.

　푸른 안개 걷히면서 서서히 시야가 밝아진다.

　다시 한강 대교 위, 그날 밤으로 되돌아가있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밤, 빗줄기에 시야는 흐리고,

　퍼붓는 빗소리에 대교 위를 지나가는 차 소리 또한 묻혀서 들리지 않는다.

　힘없이 터덜 터덜 걸어오는 범학의 손에 소주병이 들려있다. 범학 정해진 곳에서 멈춰서다가 깜짝 놀란다. 서하가 범학을 기다리고 있다. “단서하 작가님?” “범학씨....” “어떻게 여길?” “범학씨” 범학의 손에 들려있는 소주병을 낚아채서 한모금 쭈욱 들이킨다. “시원하다” 대교 위를 지나가는 차량을 가리킨다.

　“저기 봐요 범학씨, 빗길을 뚫고 달리고 있는 저 차..차 안의 사람들, 그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면서, 어디로들 달려갈까요?” “그걸..내가 어떻게 알아요? 알아야할 필요도 없구요 궁금하지도 않아요” “그래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아요 달리는 차 안의 사람이, 지금 울고 있는지, 웃고 있는지, 기분 좋은 일에 들떠서 달려가는지, 슬픈 일을 가슴에 묻고, 달려가는 사람인지, 아무도, 관심없어요 사람들은요 누구도 관심을 안가져요 왜 그럴까요?”

　“관심없는게 당연해요 내 일이 아닌데요 내 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남 일에 신경쓸 겨를이 어딨어요?” “당연하다...어쩌면 그건 범학씨 부모님한테도 해당되는 말이에요 범학씨 부모님도 당연하다 생각할지도 몰라요 범학씨처럼요 자신의 일이 아니니까요 부모님은 범학씨가 아니니까요”

　“그..그건 달라요 부모님은 부모니까 당연히 달라야해요 자식이니까, 자식 일이니까...달라야하는게 당연해요” “그래요 우리 자식들은 그게 당연하다 생각해요 부모님이니까, 당연히, 자식을, 자식 일에, 내 자식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 자식이 원하는게 뭔지, 내 자식이 되고 싶은게 뭔지, 당연하게 알아야한다고 생각해요 부모니까” 서하 다독이듯 차분하게 말을 이어간다 범학 가만히 듣고 있다.

　“우리는 부모님이 원하는걸 알까요? 부모님이 자식에게 관심을 갖는게 당연하다면, 부모니까, 자식 역시 부모님이 원하는걸 알아야하는거 아닐까요?” “그..그건..”

　“부모도....자식도...서로를 오해하면서, 착각해요 나는 부모니까, 내 자식을 잘 안다 내 자식에게는 이게 더 필요하다, 내 자식이니까 내 소유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착각하면서 강요하고, 자식은 부모니까, 해주는 모든 것이, 부모한테 받는 많은 것들이 당연하다 여겨요 당연히 부모님이 원해서 하는거라고, 그게 부모가 자식에게 당연하게 해줘야하는거라 착각하면서,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바는 부모의 과한 욕심이라 오해해요 부모도 자식도, 모두 착각하면서 서로를 오해해요” 범학, 말이 없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는 것들이 정말 당연한 걸까요?" 서하는 한마디 던진후 깊숙한 눈빛으로 범학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어간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들이 과연 당연히 그래야하니까, 당연한거니까, 그래야 마땅하니까, 그렇게 당연하다 여기면서, 고마움을 잊어가요 소중함을 잃어가구요 부모는 자식이 태어나서 기뻤던 그 순간을, 나를 꼭 닮은 자식이 태어난 것만으로도 가슴 떨리게 기뻤던 그 순간의 소중함을 잃어가고, 자식은 또, 노심초사 하면서 소중하게 자신을 키워준 부모에 대한 고마움을 잊어가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면서 외면하며 살았던 그 순간들에, 고마움도 잊고, 소중한 것도 잃어가요”

　“잊지는 않았어요 잃어버리지는 않았다구요 부모님 인형처럼 부모님의 뜻에 거스르지 않는 인형이 되길 바라셨지만, 그 역시 사랑이라면 사랑인걸 잊지는 않았어요 잊지는 않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올바르지않아요 일방적으로 따라주길 바라는건 사랑을 강요하는거에요 상대가 그걸 받아줄 수 없다면, 사랑이 아닌, 욕심이고, 욕망일뿐이에요” “욕망이라구요?” 서하, 되묻는다

　“그래요 욕망이에요 우리 부모님 나를 인형처럼, 인형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을 가진 분들이에요, 내가 원하는거, 내가 괴로워하는거, 단 한번도 귀기울여주신적 없었어요 그저 이 길이 너한테 딱이다, 내가 너를 위해서 준비해놓은거다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말이다 그래요 부모님은 언제나 늘 다 나를 위해서, 나 잘 되라고 하는 말씀이셨죠 하지만, 정작 내가 좋아하는거, 내가 행복해하는거, 내가 기뻐하는거에는 관심이 없으셨어요 알려고 하지도 않으셨다구요 낳아줬으니까, 너는 당연히 내꺼, 내 말을 따라야해, 나는 네 부모니까, 나는 부모님이 감아놓으신 태엽으로 움직이는 인형, 부모님이 입력해놓으신대로 움직여야하는 로봇일뿐이었다구요”

　“부모님은 그게 사랑인줄 아세요 자식한테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하시구요 범학씨 부모님에게는 그게 최선으로 사랑해주는거라구요 과한 욕망이 아니라,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에요 부모님 역시 잘 모르시는거에요 지금 범학씨처럼, 부모님의 그 마음이 과한 욕망일뿐이라며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범학씨처럼 잘 모르고 계시는거라구요”

　“모르면 알아야지요 자식이 뭘 원하는지 관심을 가져야죠 강요만 하는게 아니라, 관심을 가져야죠” “강요 역시 관심이에요”

　“아니요 절대로 아니에요 그건 잘못된 거에요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니라구요 자식에 대한 과한 욕망일뿐이라구요”

　“범학씨 부모님은 잘 모르시는거에요 알 기회가 없으셨어요부모님 역시 그렇게 살아오셨으니까, 지금의 범학씨처럼, 그렇게 살아오셨으니까, 그게 당연하신거에요 범학씨 부모님께 기회를 드리세요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욕망이시라고, 자식을 사랑하는게 아니라, 과한 욕망이라고, 알려드리세요”

　“알..려드려요? 어떻게요? 들으려고 하지 않으시는데, 어떻게 알려드려요?”

　“천천히...천천히요...하나씩..하나씩 알려드려요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단단하게 굳어진 그 분들의 생각을 한꺼번에 바꿀 수는 없어요 바꿔지지도 않구요 하나씩, 천천히, 계속해서, 말씀드리는거에요 나는 이러이러하다 내가 원하는건 이거다 계속 얘기하는거에요 부모님이 들어주실때까지, 귀 기울여 주실때까지, 계속 말씀드리는거에요” “계속이요? 천천히 하나씩요?” “그래요 계속이요 천천히 하나씩요”

　“될까요? 과연? 우리 부모님이 달라지실까요?” “달라지실거에요 오래 걸려도 결국에는 달라지실거에요” “오래 걸려서 제가 지치면요?” “뭐든 자신에게 소중한걸 얻어내려면, 그만한 수고로움쯤은 각오해야해요 각오하고 시작하면 그렇게 지치지는 않을거에요” “각오하면 정말 지치지는 않을까요?” “사람은요 생각하는대로 살아가게 된다고 해요 범학씨가 각오한만큼, 범학씨 생각대로 살 수 있게 될거에요 믿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범학씨 자신을 믿어봐요 사람의 의지는 생각보다 많은 걸 해내거든요” “제가..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어요” “정말 할 수 있을까요?”

　“정말 할 수 있어요 우리도 도와줄께요” 범학 서하가 들고 있는 소주병을 낚아채서 한모금 들이킨다 “시원하다”

　멀리서 준결이 달려온다 ‘준결아 아..제발..제발..다치지 말아줘’

　준결 달려와서 서하를 본다 “누나..언제 여기와 있었어?” “준결아” 서하 눈에 눈물이 맺혀서 그렁그렁하다 “누구?” 준결 다짜고짜 범학을 팔을 붙든다. “주..준결아 괜찮아 놔둬도 돼” “놔두다니, 안돼..범학씨 이러면 안돼요” “왜 이러십니까?” 준결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친다 “놔주세요” “안된다니까요 범학씨 못 놔요” 서로 오해하고 몸싸움 중인 범학과 준결 멀리서 또다른 서하가 달려온다.

　서하 달려와서 먼저 와있는 서하를 보면서, 놀라서 고여있는 빗물을 보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범학 미끄러지는 소리에 돌아보려한다. 서하 재빨리 범학의 눈을 가린다. 준결 놀라면서 미끄러져있는 서하를 본다.

　“누..누나...괜찮아?” 범학 준결의 팔을 빠져나오면서 소주병을 아무렇게나 휘두른다 준결 서하를 보느라 미처 피하지 못한다. 으아악 준결의 외마디 외침을 뒤로하고 푸른 안개 깔리면서 시야가 서서히 흐려진다.

　푸른 안개 걷히면서 시야가 밝아진다.

　작업실에 혼자 앉아서 슬피 울고 있는 서하, 손에 꼭 쥐고 있던 태엽 시계를 다시 돌려보려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시계 태,엽 서하 서랍 안의 공구를 꺼내서 태엽을 억지로 돌려보려하지만, 여전히 꼼짝하지 않는다.

　억지로 돌려보려다 시계의 태엽에 작은 홈이 생긴다.

　태엽 시계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엉엉 소리내어 울고 있는 서하, 다시 푸른 안개가 깔리면서 시야가 서서히 흐려진다.

　푸른 안개가 걷히면서 시야가 밝아진다.

　다시 돌아온 서하, 새벽 무렵, 텅빈 병원 복도에 덩그라니 혼자 남겨져서, 눈물을 삼키고 있다.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중환자실 문을 연다. 병실 안에는 누워있어야할 준결도, 아무도 없이 침대만 있는채로 비어있다. 텅비어 있는 중환자실에서 어리둥절한체로 서있는 서하의 발밑에 푸른 안개 깔리면서 시야가 서서히 흐려진다.

　푸른 안개 걷히면서 시야가 밝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