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수채화 4

　푸른 안개 깔리면서 서서히 시야가 흐려진다.

　푸른 안개 걷히면서 서서히 시야가 밝아진다.

　작업실로 돌아왔다. 준결, 창밖을 보면서 할말을 잃은채 서있고, 하람은 서하에게 안긴채 계속 흐느낀다. “돌아왔어요 하람언니” 하람 흐느끼면서 “가지말걸 차라리 모를걸 되돌아가지말걸 그랬어” “하람 언니”

　“되돌아가지 말고 그냥 기억 상실인채로 있을걸 그랬으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텐데” 준결 작업실 오디오의 볼륨을 높인다.

　sodom, south georgia - iron & wine 작업실 안 가득 흐른다.

　하람 흐느낀다. 서하, 준결 안타까운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본다.

　한참을 흐느끼던 하람은 오피스텔로 돌아가고, 두 사람은 울적한 얼굴로

　앉아있다. 티비를 켰다가 꺼버리는 준결, 긴 의자에 길게 드러누워서 잠을 청한다. 서하, 역시, 준결처럼 울적하긴 마찬가지다. 모니터를 보며 자판을 두드리지만, 이내 꺼버린다. "나 잠깐 하람 언니 보고 올게" 준결은 누운채로 고개만 끄덕인다.

　캄캄한 오피스텔 복도, 하람의 집 앞에서 벨을 누르려다 머뭇거린다.

　다시 벨을 누르려다, 혹시나 하고 문을 열어본다. 열려있다. 가벼운 심호흡을 하는 서하, 오피스텔 문을 열고 살며시 들어온다. 하람 누워있다가 부스스 일어난다. 서하, 하람을 보면서 “하람 언니 더 누워있어요” “괜찮아요” “물 한잔 마셔요 그럼”

　서하, 물을 꺼내려 냉장고 문을 열어보면서 “하람 언니 여기 있던 장미꽃은?”

　“장미꽃? 아 그거 당구장에 배달된 꽃인데 삼촌이 꽃 알러지가 있어서 갖고 왔어 근데 왠지 꽂아두기가 싫더라구 왜 그랬는지 이제 기억이 났어

　민재씨 때문이었어 민재씨가 장미꽃을 좋아했거든 농장 한켠에 장미 울타리를 만들었었지 거기서 우리 냥냥이도 같이 뛰어놀았었는데” “하람 언니 이제 괜찮은거에요?” “괜찮은척 하는거에요 괜찮은척 하다보면, 정말 괜찮아질 것 같아서 돌아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되돌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람 언니 아직도 기억나요?” “기억나요” ‘이상하다 원래는 기억이 안 나

　야 되는데’ “왜?” “아니요 하람 언니”

　서하, 하람을 보면서 안타까운 표정으로 앉아있다.

　평일 오후의 당구장은 한산하다. 하람의 외삼촌, 냥냥이를 데리고 카운터에 앉아있다. “냥냥아 너 이제 나랑 살아야겠다 하람이 떠난다는데 이녀석 우리 집에 가서 잘 지내보자” 고양이 갸르릉 거리면서 안겨있다.

　당구장 부근 거리, 오후다.

　서하는 준결에게 “준결아 이상하지? 하람 언니 왜 기억이 그대로지? 원래는 기억이 안 나야되는데” “그러게 하람씨는 왜 기억을 하고 있지?”

　“그러니까 이상하네” 준결 “하람씨의 기억은 떠올려야할 기억이라서 그런거 아닐까? 하람씨의 상처는 기억하고 있어야 어떤 식으로든 아물게 되는 상처라서, 하람씨의 기억을 그대로 둔게 아닐까? 그냥 내 생각일뿐이야 누나” “민재씨가 살아있지 않아서 기억이 그대로 남아있는건 아니고? 하람씨가 기억하고 있더라도 살아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으니까, 하람씨의 기억이 사라질 필요가 없었던것 아닐까? 너처럼 나도 그냥 내 생각일뿐이야 준결아” “음, 그럴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또 하나, 되돌렸을 때 왜 정지되지 않았지?” “왜..왜 그랬을까? 왜

　정지되지 않았을까?” “혹시..? 되돌려서도 풀리지 않을 사건이라서?” “그..

　래서? 정지되지 않았다는 거야?” “풀리지 않을 사건이라서 우리가 개입할 수 없게 정지되지 않은거야 어때? 내 추리는?” “음...그럴 듯 해”

　“근데, 왜 되돌아가야했을까? 하람씨와 우리 말이야” “잃어버린 기억을 찾고 싶어하는 하람 언니의 간절함이 우리를 과거로 되돌리게 한거 아닐까?” “하람씨의 간절함이라 음...서하 누나의 간절함도 있었겠지 하람씨의 기억을 찾아주고 싶어하는” “준결아....” 잠시 뜸을 들인다.

　“너도..되돌리고 싶은 기억이 있어?” “되..돌리고 싶은 기억?” “혹시 돌아

　가고 싶은 시간이 있어?” “글쎄” 망설이면서 “누나는?” “나? 글쎄” 잠시

　뜸을 들이며 “나는..그냥..지금이 더 좋아..” 준결 표정 밝아지면서 “지금이

　왜 좋아?” 서하 준결을 흘긋 보면서 “알면서~” “나..모르는데...?”

　“하준결 고만해라 이 누나 입으로 꼭 직접 들어야겠냐?”

　“확인하고 싶은거야 누나” "그래 확인해줄게 지금이 훨씬 좋은건 바로,”장난끼 가득한 눈빛이다. “요넘 때문이야” 태엽 시계를 꺼낸다 “뭐야? 누나? 에이 김샜다” 피식 웃는다. “헤헤 시간 늦겠다 어서 가자” 준결의 팔을 가볍게 잡고 뛰기 시작한다. 얼떨결에 같이 달리고 있는 준결의 웃음 가득한 얼굴이 편안해보인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비단 연인들에게만 해당되는건 아니다. 사람과의 만남에서 헤어짐이 아쉬워지는 만남은 어떤 관계이든 다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게 된다. 어느새 하람과 헤어져야할 시간이 되었다.

　사람들로 붐비는 공항, 아쉬운 작별을 나누는 하람과 서하 “고마웠어요 서하씨, 준결씨” “하람 언니 돌아올거에요?”서운함이 담뿍 담긴 목소리다.

　“봐서요 동생이랑 부모님 잘 지내는지, 거기가 맘에 들면 나도 눌러앉구, 아니면....” 서하는 예전과는 다르게 가벼운 웃음소리의 하람이라 한결 마음이 놓인다. “그래요 하람씨 가서 다 비워버리고 편하게 지내요” 준결도 섭섭한 목소리다. “네...비워낼 수는 없겠지만, 옅어질 수는 있겠죠 조금씩 조금씩 옅어지다가, 언젠가는 다 사라지겠죠” “신이 인간에게 베푸신 선물 중에 제일 좋은 선물이 뭔 줄 알아요?”

　서하의 진지한 물음에 하람도 덩달아 진지해진다.

　“글쎄요 행복?” “아니요 그건 바로 망각이에요” “망..각...”

　“잃어버려할 기억은, 그럴만해서, 잊어야할 기억은 또 잊을만하니까,

　그렇게 저렇게 잊어버리면서 살 수 있는거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이에요”

　“망각..선물..” “하람 언니 잘 가요 가서 잘 지내고 이제 더 기억하지 말아요” “네...두 사람도 잘 지내요” 인사하면서 뒤돌아걷는다.

　걷다가 다시 돌아보는 하람 “아참, 준결씨 전에 들려준 그 노래 뭐였어요?”

　“아...그 노래요 sodom, south georgia 에요”

　“그 노래...는...기억하고 싶어요” “기억해요 하람씨”

　“하람 언니 정말 잘 지내요 다시 돌아오면 꼭 연락하구요”

　“그래요 서하씨” 손을 잡는다 “고마웠어요”

　“아..이거요” 갑자기 생각난 듯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서 건넨다. 하람 받으면서 “뭐에요?” “냥냥이랑 하람 언니 찍은 사진이에요” 하람 본다.

　“이런걸 언제?” 하람이가 냥냥이를 품에 안고 다정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다.

　“헤헤 도촬을 가끔 해요 제가 크큭” “서하씨 냥냥이 사진 고마워”

　“냥냥이 잘 지내나 가끔 가볼께요” “그래줘요 들어갈께요 두 사람 건강해요

　고마웠어요 서하씨 준결씨” 하람 꾸벅 인사하면서 걸어간다. 서하와 준결, 하람에게 손을 흔든다. 하람도 돌아보면서 손을 흔든다. 두 사람을 향해서 활짝 웃어보이며, 다시 뒤돌아서 걷는다. 서하 눈물을 글썽인다. “누나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구나” "하람 언니, 잠깐 알았는데도 꽤, 정 들었어"

　"정주는 사람인가봐, 하람씨가"“응...하람 언니 잘 지내겠지?” “잘 지낼거야 부모님도 계시고, 동생도 있으니까, 하람씨는 여기 있는것보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는게 더 좋을거야" "그렇겠지" "자, 이제 우리도 가볼까, 배고프다 누나” “나도..우리 뭐 먹지?” “나가서 찾아보자”

　서하, 준결 경쾌한 발걸음으로 씩씩하게 걸어간다.

　하람이 떠난 오피스텔은 왠지 휑하다.

　오피스텔 앞 우편함에 꽂힌 우편물 한통, 발신인 희망원 수신인 백하람

　한국을 떠난 하람이 미처 챙겨가지 못한 우편물이다.

　착하고 마음이 여린 여자, 하람은 그렇게 떠났고 민재와의 추억이 남아있는 한국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람의 마음이 남아있는 오피스텔은 이제 다른 사람이 자신만의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겠지만, 서하와 준결의 추억 속에는 하람의 집으로 자리하게 되겠지. 정 주는 사람은 늘 그렇듯, 누군가의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 사람은 자신의 흔적을 알지 못하더라도, 정 주는 사람을 아는 사람들은

　가끔 그 흔적을 떠올리며, 그리워하게 된다.

　하람이 마음 한켠을 쓰고 있던 희망원이라는 곳은 수녀님이 부모없는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고아원이다. 수녀님과 아이들과 함께 자원 봉사자들도 기거하고 있는 그곳은 어린 천사들의 따뜻한 보금자리다.

　희망원이라는 이름처럼 어린 천사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 많은 이들이 애쓰고 있다. 희망원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범학은 자원 봉사자다. 전화벨이 울린다.

　“네...아버지...지금 갈께요” 희망원 원장 수녀 범학을 본다“범학씨 그만 가봐 이제 오지말구” “또 올께요” 꾸벅 인사한다. 뒤돌아서 걸어가는 범학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원장수녀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대낮부터 삼겹살 집에서 둘이서 고기 5인분을 구워먹고 있는 서하와 준결

　"지글 지글 고기가 익어가는 소리, 준결아 얼른 좀 구워봐"

　"이 누님께서 아직 배고프시다" "고기 3인분을 드셔놓고 아직 배고프셔?"

　"야, 너 혼자 2인분은 먹었잖아 구워놓으면 쏙 갖다먹고 갖다먹고 한게 누군데"

　"히히 그러게 얼른 얼른 드셔야지" "야, 너는 장유유서도 모르냐?"

　"장유유서? 고기 앞에 두고 뭔 순서를 따져? 빨리 먹는 사람이 임자야"

　"어린 너한테 뭔 말을 하리? 고기나 구워라"

　"파릇 파릇 어린 나님이 누님께 고기 좀 구워드리리다"

　"야아, 잘 구워, 고기 타잖아" "어허, 거참 말이 많다 누님의 허기진 마음을 내 모르는바는 아니나, 누님께 노릇 노릇 잘 익힌 엄선된 고기만 먹이고 싶은 내 마음을 어찌 이리 몰라준단 말이오?" "시끄럽소 내 알바 아니오, 고기가 타니, 이내 마음도 타들어가오 냉큼 뒤집으시오" "예이~" "뭐야? 다 탔잖아" "어허 기다리시오 다른 고기가 있잖소"

　노릇 노릇하게 잘 구워진 고기를 한점 싸서 서하 입에 넣어주는 준결

　"어떠시오?" "준결아" "어허, 지금 반말할 분위기 아니오 다시 말해보오

　어떤 맛이었소?" "타서 재가 된 돼지 맛이었소" "뭐라?"

　불판에 고기를 뒤집어보는 준결, "이런 다 탔네 다 탔어"

　"엄선된 고기만 먹이고 싶은 니 마음, 얼씨구, 엄선된 고기 기다리는 내 마음이 이 고기 상태다" 타버린 삼겹살을 준결 코 앞에 내밀면서 "이리줘 내가 굽고 만다" 티격 태격 하며, 고기를 구워먹는 두 사람이 재밌는듯 옆테이블에서 힐끔 본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아웅 다웅 고기 굽기에 열중하는 서하와 준결, 후식으로 된장 찌개까지 말끔하게 드시고 고기집을 나온다.

　부른 배를 두드리면서 걷고 있는 준결, 그런 준결을 귀엽게 보는 서하,

　걷다가 멈춰서서 기지개를 쭈욱 켠다. “누나..길에서 뭐 하는 짓이야?”

　“그러는 너는?” “배불러...넘 잘 먹었어 배가 올챙이배 된거같다 볼래? 누나?” 보여주려한다. 서하 기겁을 하면서 “아서라 준결아 오늘 우리 두끼를 한꺼번에 먹은거 같아 저녁은 건너뛰어야겠어” “그럴까?” 하면서 기지개를 켠다 "어? 저거 뭐지?” 건물 한켠에 붙어있는 작은 벽보, 가까이 다가가서 본다.

　희망원 아이들의 작은 콘서트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일시 10월 17일 저녁 6시

　“뭐야?” 가까이 다가와서 보면서 “희망원 아이들? 저번에 방송에 나왔던?”

　“아 맞다 그때 봤었지, 어디서 들어본거 같다 했어”

　“그 아이들이 콘서트를 해?” “우리 보러 갈까?”

　“좋아 시간 기억해둬” “예스~~” “날씨 좋다 우리 사진 찍을까?”

　“좋아 어디서?” “거기서” “여기서?” “응 거기 서있어봐 찍어줄게”

　서하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서 준결을 찍는다.

　“야..이쪽으로 서봐” 서하 고풍스러워보이는 건물이 배경으로 보이게끔 준결을 돌려세운다. “찍는다 준결아 하나 둘 셋 찰칵~”

　촌스럽게 브이를 그리며 밝게 웃고 있는 준결의 뒤쪽에 벽보를 붙이고 있는

　남자(범학)의 뒷모습이 같이 찍힌다.

　바람이 살랑 살랑 불어오는 청명한 가을 날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