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수채화 2
“글쎄, 자기 필체면 알아보겠지만, 다른 사람 필체는 생각 안날 수 있겠지”
“핀란드에 동생이 산다는데, 부모님은 거기 계신대 이민가신건 아닌 것 같은데, 왜 거기 가셨지?” “동생네 다니러 가신거 아닐까?” “그런걸까?”
“뭐 생각나는거 없대?” “어, 답답하네 뭔가 있을 것 같기는 한데 기억 나는거 없다고 하니까” “걍 냅두면 뭔가 생각나겠지”
“내가 너무 사건이 일어날거야 뭔가 일어날거야 하면서 보고 있는걸까
걍 단순한 기억 상실일 수 있는데”
“태엽 시계의 반짝임이 사건을 알려주는 것 같기는 한데, 아직은 감이 안 잡히네” “근데 하람 언니 되게 착하더라 아까 내가 거의 질문만 하고 왔는데도 다 대답해주는거 있지? 나같으면 귀찮아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을텐데”
“그랬어? 누나 추리 소설 쓰느라 탐정역할에 너무 심취해있는거 아니야?”
“그런거였으면 좋겠는데 나..저 언니 맘에 든단말이야 안타까워 별다른 사건없이 기억만 찾아줄 수 있으면 좋겠다”
“누나..나 쪼금 섭섭한데..안지 얼마 안된 옆집 언니는 그렇게 신경쓰면서
나는 나는 신경 안 써주나 누나 너무 한거 아니야” 삐친척한다
“야아..너는 이미 내 가족인데 뭘 그래” 준결 좋아해야 하나 망설여진다.
“가..족? 나 좋아해야해 말아야해? 무슨 뜻이야?”
“좋아해도 돼 그 정도로 맨날 신경쓴다는 뜻이야”
“그런거면 좋아해도 되는데..왠지 좋아하면 안될것같기도 하고 그렇네”
“왜?” ‘왜라니? 누나가 나를 친동생같이 신경쓸까봐 그렇지’
서하, 대답없는 준결에게 재차 묻는다. “왜? 신경써주는거 안 좋아?”
“좋은데 그냥 좀더 신경을 다른 의미로 좀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는
뜻이야” “다..른..의미?”
“응 뭐랄까 조금더 말랑말랑하고 새콤달콤하고 달짝지근하고”
“너..원하는대로 신경써서” 잠시 뜸들이다가
“준비해줄게 요리하고 싶어? 오늘은 그 분위기야?”
서하는 가볍게 대꾸한다.
“뭐야?” 피식 웃고 만다.
“분위기는 무슨 개뿔~ 누나의 개그에 졌소 누나는 대체 비결이 뭐야?
다 잡아놓은 분위기를 한순간에 따악~개그화시키는거...
누나가 여태 남친이 안 생기는게 이래서구나”
준결의 장난스런 너스레에 서하는 설레였던 마음을 감추면서,
‘분위기 좀 잡지마 하준결 살짝 설레이잖아 제발 좀 동생처럼 있으라구’
"암튼 누나의 난제는 무한 개그 본능이야
그것만 없애면 어찌 좀 되겠는데 도통 분위기가 안 잡히니 이거 원..."
서하 준결의 말에 두근 두근 다시 설레여서 살짝 얼굴이 붉어진다.
갑자기 들려오는 여자의 비명소리 준결, 서하 거의 동시에 “사건이다”
달려나간다. 여자의 비명 소리 들려오는 옆집, 준결과 서하가 여러번 벨을 누르지만, 문이 열리는 기척이 없다.
서하 다급하게 문을 두드린다.
준결 핸드폰을 꺼내서 경비실에 전화하려는 찰나, 스르르 문이 열린다. 쇼크 상태에서 막 정신을 차린 모습으로 보이는, 하람 넋이 나간 얼굴로 문앞에 서있다.
서하, 왠지 겁이 나서 자신도 모르게 준결의 팔을 꽉 잡는다.
준결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간다.
서하 준결의 팔을 꽉 잡고 조심조심 들어간다.
두 사람이 들어간 등뒤로 문이 닫히고 하람을 일단 쇼파에 앉히는 서하,
재빨리 방안을 둘러보는 준결의 눈에 갈기 갈기 찢어져있는 수첩이 보인다.
준결 다가가서 찢어진 수첩을 붙여보려 한다.
“하지마 그냥 둬 그거 태워줘 제발 태워줘” “하람 언니 왜 그래요?”
하람을 안심시키려는 듯 손을 잡아준다.
하람 뿌리치면서 “너 나 언제 봤다고 언니래? 너도 우리 민재씨 아니?
그런거야?” “언..니? 뭔가 기억이 났어요?”
“저리가 저리 가라구” 무서워하면서 쇼파 구석으로 가서 몸을 웅크린채 떤다.
“누나 가서 물 한잔 가져와” “어? 어” 냉장고 문을 열어본다 “으아악 이게 다 뭐야” “왜 그래 누나” 준결 한달음에 달려간다.
냉장고 안에 가득한 장미꽃들 냉장고 문을 열자 후두둑 떨어진다.
“장미,,꽃인데, 이게 왜 여기 있지?” 하람 계속 무서워하면서 떨고 있다.
준결 하람을 진정시키려고 핸드폰으로 재빨리 음악을 검색한다.
적당한 음악을 찾지 못하고 계속 검색중인 준결,
방안 한구석에서 야옹 하면서 걸어오는 고양이,
하람이 앉아있는 쇼파로 뛰어올라가 안긴다.
하람은 고양이를 품에 꼭 끌어안는다. 하람의 표정이 서서히 편안해진다.
서하와 준결 한시름 놓았다는듯 휴우~한숨을 내쉰다.
시간이 흐르고 하람은 스르르 눕는다.
서하 걱정스런 눈빛으로 이불을 덮어준다.
하람의 곁에 누운 고양이 갸르릉거리면서 곧 잠이 들고,
하람도 서서히 잠에 빠진다.
준결 바닥에 있는 종이조각을 모아서 붙여본다.
7일 여기 잘 왔다 다 없어서 다행이다 이제 4월 됐다
서하 준결이 붙여놓은 종이조각을 들여다본다.
서하 작은 목소리로 “이거 왜 이렇게 붙였어? 아까는 이 내용이 아니었는데”
준결 역시 작은 목소리로 “아까는 어떤 내용이었어?”
서하 “아까는” 다시 조합한다 “이런 내용이었어”
4월 7일 여기 왔다 없어서 다행이다 이제 다 잘 됐다
“그래? 이거 볼수록 재밌는 메모네 봐봐”
4월 7일 됐다 이제 다행이다 다 없어서 여기 잘 왔다
“이런 내용도 되잖아? 어때? 신기하지?” “그러네 혹시 수수께끼로 기록한 메모 수첩의 주인만 알아볼 수 있게, 암호처럼 남긴 메모라면 어떤 메모가 맞는거야?”
“냉장고 안에 있는 의문의 장미꽃, 수수께끼의 메모 뭐가 뭔지 모르겠네 하람씨가 깨어나야 물어볼텐데..” “갑자기 비명은 왜 지른거야? 메모는 왜 찢었고? 뭔가 생각이 난것같은데..” “조금만 기다려보자 곧 깨어나겠지” 서하는 아까 하람과 함께 마셨던 차를 끓이고, 준결은 메모를 들여다 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4월 됐다 이제 다행이다 다 7일 없어서 여기 잘 왔다
준결 눈이 반짝인다. “혹시 이거...”
서하 준결의 어깨 너머로 본다.
“혹시..” 준결 서하와 눈을 마주치면서 “어...”
서하와 준결 서로 마주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고양이 야옹 야옹 하면서 뒤척인다.
고양이의 뒤척이는 소리에 하람도 뒤척인다.
다음날 오후 일부러 당구장을 찾은 준결은 당구를 치면서 두리번거리면서 살펴본다. 알바생 혼자 카운터에 앉아서 무료한듯 티비를 본다.
무심하게 알바생을 보던 준결의 눈에, 당구장 한켠에 걸려있는 귤 농장에서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하람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두분과 하람, 여동생, 여동생 남친으로 보이는 외국인 남자, 외삼촌 식구들, 그리고 왠 젊은 남자가 같이 찍혀있다.
하람과 상당히 닮아보이는 젊은 남자 준결 가까이 가서 들여다본다.
그 시각 애완 동물샵, 서하와 하람 고양이 사료를 사러왔다.
하람은 사료를 다 고르고, 카운터로 가고, 서하는 고양이를 안고 있다.
서하와 많이 친해진듯 하람의 고양이는 갸르릉 거리면서 잘 안겨있다.
오피스텔 부근 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고 있는 서하와 하람
거의 다 먹어갈무렵 준결이 들어온다. “여기 있었어?” “어서와”
하람 갈비탕을 먹다가 가볍게 고개만 숙여보이고, 준결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가서 앉는다. 하람은 빨리 먹으려는듯 제대로 씹지도 않고 넘긴다.
준결은 자신을 보면서 어색해하는 하람을 배려하려고 평소와는 다르게 장난치듯
가볍게 한마디 건넨다. "하람씨 천천히 먹어요 안 뺏어먹을께요"
하람, 아까보다 더 어색한 표정으로 준결을 흘깃 보다가 다시 먹는다.
“준결아 밥 먹었어?” “아니 여기 갈비탕 하나 주세요”
말없이 갈비탕을 먹는 세사람, 하람 다 먹고 먼저 일어난다. “같이 가요 우리도
다 먹었어요” “천천히 먹고 와요 먼저 들어갈께요”
“우리 작업실 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가세요 어제 좋은 커피를 사왔거든요”
“오늘은....” “그러지말고 같이 가요 준결아 일어날까”
준결 한그릇 뚝딱 비우고 일어난다. “같이 가요 가서 커피 한잔 하세요”
하람 그제서야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서 가요”
하람은 의자에서 자고 있는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안는다.
서하는 고양이 사료를 챙겨서 뒤따른다.
준결은 앞서 걸어가고, 서하, 하람과 나란히 걸어간다.
작업실 활짝 열린 창을 닫고 커피를 타오는 준결, 서하는 하람과 수다를 떤다.
“커피 어때요?” 하람 향을 음미하면서 “좋아요” “언니 어제 생각나요?”
“네...” “어제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계속 물어보고 싶었잖아요 물어보세요” “언니..어제 수첩..왜 찢은거에요?”
“그..그건..기..억이 났어요” “무슨 기억이요?”
“어렴풋하게 기억이 났어요 그 메모는 제 남자친구인 민재씨가 쓴거에요” “남자친구가 기억났어요? 지금은 어디 있어요?” “기억이 났는데, 그건 잘 모르겠어요 그것까지는 기억이 안 나요” “그럼 어디까지 기억이 났어요? 어제 왜 그런거에요?” 준결 노트를 가져와서 메모한다. “서하씨 가고, 귤 재배하는 책 잠깐 읽다가 잠이 들었는데...이상한 꿈을 꿨어요 꿈에서 어떤 남자랑 제가 굉장히 친근해보였어요
둘이서 귤을 따면서 웃고 있는데, 갑자기 장면이 바뀌면서, 나랑 내 여동생이랑 귤을 따고 있는거에요 남자가 리어카를 끌고 와서 우리가 딴 귤을 담았어요 내가 민재씨하고 부르면서, 귤을 어디로 가져갈거냐고 물었는데,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면서 나도 몰라 하는거에요 내가 계속 물었어요 민재씨 어디로 가져가는거야?
그랬더니 대답없이 계속 웃고 있었어요 그러다 꿈에서 깼는데, 우민재라는 이름이 떠올랐어요 이름을 떠올리니까, 조금씩 기억이 났어요” “수첩은 왜 그랬어요?”
“그건 민재씨가 나한테 남긴 메모에요 근데, 나는 그 메모를 못 봤어요 그 메모는 동생이 봤을거에요” “동생이 본거는 어떻게 알아요?” “앞에 있는 필체는 동생 글씨에요” “그..그래요? 나는 하람씨 필체라 생각했는데” “아니에요 나는 필체가 별로에요 그래서 늘 동생이 대신 써주고는 했거든요 새 수첩을 사면, 늘 동생이 먼저 이것 저것 적어줬어요 아마 그 수첩도 그랬을거에요” “그래도 많이 생각이 났네요” “네” “근데, 수첩은 왜 그런거에요?”
“그..그건..민재씨가 미워서에요” “민재씨가요? 왜요?”
“민재씨가 떠났어요 나한테서” “그건 생각이 난거에요?”
“네...민재씨가 떠나면서 했던 말이 기억났어요 이제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에요?”
하람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떠날 수 있어서요 그래서 다행이래요”
“그래서..헤어진 충격에 그때가 생각나서 메모를 찢은거에요?” 하람 고개를 젓는다.
“그건 아니에요 메모를 보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서 찢었는데”
“그 뒤에 우리가 갔을때는 무서워했어요 왜 그런거에요?”
“메모를 찢었는데...왠지...그게 다가 아닌 것 같아서...내가 기억 못하는 뭔가가 갑자기 나를 두렵게 했어요 분명히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뭔가가 있는데, 그게 뭔지모르겠지만, 그 충격으로 내가 기억상실이 된 것 같은데 기억해내야 하는데 그게 두려웠어요” “민재씨 어디로 떠났는지 기억나요?” “아니요”
“어떻게 만난 사이인지는 기억나요?” “아니요 생각 안 나요”
“민재씨 일이 다 기억난건 아니군요”
“네..부분 부분 기억은 나는데, 아직까지는 희미해요”
“하람 언니가 민재씨한테 갖고 있는 감정, 민재씨를 떠올릴 때 지금 느껴지는
감정은 어떤거에요? 분노에요?”
“분노는 순간적이었구, 그냥 맘이 아파요 기억해내야하는데...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헤어지게 됐는지, 기억해내야하는데 기억해내는게 두려워요”
준결 서하에게 눈짓한다 서하 망설이면서 준결을 본다.
“하람 언니 제가 제안을 하나 할께요” “뭐에요?” “만약 언니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서 잊어버린 민재씨를, 민재씨 만났던거, 헤어진거, 모두다 기억해낼 수 있다면, 만약에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거로 돌아가겠어요?” “과거..로 돌아가요? 어떻게?” “하람 언니가 원하면 한번 해보고 싶어요 돌아가서, 언니가 원하는 그 시간으로 돌아가서 언니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주고 싶어요”
“서하씨....” “잃어버린 기억이 하람씨를 도울 수 있을지 보자구요”
“언니 되돌아갈 수 있어요 언니가 되돌아가고 싶다고 하면요”
“되돌아가고 싶어요 되돌아갈 수 있다면 꼭 돌아가고 싶어요”
“하지만 언니...돌아가서도 풀리지 않는 문제라면, 그냥 잊어버려요
예전 시간은 잊고 새로운 시간을 살아가요 하람 언니 그럴 수 있겠어요?”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지 없을지 한번 되돌아가봅시다 가봐야 알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