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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루나틱
작가 : 0kim
작품등록일 : 2017.7.4

주인공의 그림자로 동고동락하며 살아온 인생만 10년! 눈치 없는 주인공 옆에서 소꿉친구의 짝사랑을 바라본 기간 또한 10년! 수다스럽지만 불만 많고, 유쾌하지만 겁 많은 그림자와 세상 비관적인 주인공, 호기심 많은 여자 소꿉친구와 함께하는 판타지 세계 모험물.

 
면회
작성일 : 17-07-06 21:43     조회 : 377     추천 : 0     분량 : 7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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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화」

 

 신이 난 라그디헨 교수는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 그는 또다시 자신에게만 보이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이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아쉽게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이런 종족의 특성이나 문화에 대한 공부는 기초 이론 수업 시간에 배우게 될 거예요.”

 라그디헨 교수가 뼈 지팡이를 허공에 대고 휘두르자 주위 풍경은 다시 강의실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학생들은 갑작스레 장소가 바뀌어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렸다.

 “여태까지 제가 만들어낸 환영이었습니다. 어땠나요?”

 모두들 머뭇거리며 대답을 피하는 사이, 마토가 소리쳤다.

 “너무 멋있는 능력인 것 같아요. 인상 깊었습니다!”

 자꾸 마토가 나서서 말하는 것에 현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라그디헨 교수는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맞습니다. 환영이란 건 정말 멋있는 능력이죠. 술사가 만든 절대 공간 안에서는 오감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악이용한다면 굉장히 끔찍하겠죠? 변덕의 숲이 아닌 불바다가 끓어오르는 지옥으로도 상대방을 데려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쉐도어들의 무기는 오로지 이것입니다. 이 환영술로 하울릿들의 정신을 교란시키고, 그 틈을 타서 다른 이종족들이 공격하도록 돕는 것이에요.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더니 진지하게 덧붙여 말했다.

 “바로 하울릿들은 본능이라는 감각이 매우 뛰어나서 환영술을 금세 간파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만든 이런 환영술 쯤은 몇 초면 간파해 버릴 거예요”

 학생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환영술이 하울릿에게 통하지 않는다면 왜 이것을 배워야 하는 걸까? 라그디헨 교수가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울릿들에겐 일반 환영술이 아닌 조금 특별한 환영술이 필요합니다.”

 “특별한 환영술이요?”

 레이린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라그디헨 교수는 대답 대신 허공에 뼈 지팡이를 휘둘렀다.

 

 * * *

 

 현우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불과 방금 저까지 생생하게 꾸던 꿈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종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문 바깥에서 들리던 이종족들의 웃고 떠드는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현우는 문득 그 다음에 벌어질 일을 알 것 같아서 한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잠시 후, 그의 예상대로 라그디헨 교수가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설마…….”

 마토는 반신반의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라그디헨 교수는 학생들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이며 교탁으로 걸어와서 섰다.

 “설마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든 게……. 환영...?”

 라그디헨 교수는 대답 대신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마토는 바올리언스 대학교를 나와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환영을 이중으로 하다니! 처음 그 교수가 들어올 때부터 이미 우린 환영에 걸려있던 거야. 그 루나틱이란 것도 이미 해놓고, 우리한테 한 척 한 거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리고 환영인데 어떻게 그렇게 생생할 수 있는 거지? 난 이미 변덕의 숲에 다녀왔어. 그래, 이 정도면 이미 다녀온 듯한 느낌이야. 그 나무를 만질 때의 느낌하며 나뭇잎의 맛……. 어쩜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지? 환영이라는 거 진짜 놀랍지 않냐?”

 그는 주저리주저리 떠들다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난 네 주둥아리가 쉬지도 않고 놀리고 있는 게 제일 놀랍다.”

 현우는 마토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비탈길을 터덜터덜 내려가면서 말했다.

 “뭐라고? 놀려? 뭘 놀린다는 거야?”

 “난 널 놀린 적 없어. 단지 네 주둥아리가 쉬지도 않고 놀리는 그 체력이 놀랍다고”

 마토는 입을 둥그렇게 말고 시선을 아애로 내려 무슨 뜻일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현우는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아직 이해하지 못한 마토가 덜컥 화를 냈다.

 “날 지금 무시하는 거야? 이게 말이냐?”

 “그럼 이게 말이지, 행동이냐?”

 “어휴, 말 좀 예쁘게 해. 이 친구야. 하! 아니다, 네가 너한테 뭘 더 말하겠냐. 넌 인간관계를 대하는 태도부터가 글러먹었어. 그러니까 친구가 없지.”

 “맞아. 대신 난 그림자를 대하는 태도는 확실하지.”

 말 끝나기 무섭게 현우가 몸을 날렸다. 마토는 괴성을 지르며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종잇장 같은 손으로 현우의 몸을 밀치는 건 무리였다. 고심 끝에 마토가 한 선택은 현우의 손등을 물어버리는 것이었다.

 “아악!”

 “으악!”

 현우와 마토가 같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흥분을 하면 자신이 현우의 몸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곧잘 까먹곤 했다. 현우의 오른손에 전해진 따가운 통증은 마토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하지만 현우가 마토의 머리를 쥐어뜯는다고 해서 그 통증을 현우가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불합리하고 일방적인 통각의 관계. 결국 어떻게 해도 그림자는 루너를 이길 수가 없었다.

 보통 뒤늦게라도 이 사실을 상기한 그림자는 그대로 물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마토의 깡다구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는 현우의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외쳤다.

 “나도 다른 그림자들처럼 대우해줘! 왜 우리 관계만 이런 거야?”

 “원래 사람과 그림자는 갑을관계야! 여기 쉐도어들이 이상한 거지!”

 “원래 그런 게 어디 있어?”

 “하, 지난 10년 간 헛살았네. 한국 사회는 원래 그래. 두 명이 모이면 갑과 을을 나누지!”

 현우도 마토의 머리칼을 똑같이 쥐어뜯었다. 마토에겐 통증이 두 배로 느껴져 머리가 통째로 뽑혀 나가는 듯했다.

 “그러면 내가 갑이지!”

 “흥, 웃기시네. 빛이 없으면 존재하지도 못하는 녀석이!”

 “멍청아, 빛이 없으면 사람도 못 살아!”

 둘은 서로 한 마디도지지 않으려고 쉴 새 없이 입을 놀리고 바닥을 구르면서 싸웠다. 거리를 지나가던 쉐도어와 이종족들이 놀라운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둘의 몸부림이 점점 격해지면서 차츰차츰 계단의 끄트머리로 굴러갔다. 한 계단만 내려가면 주르르 미끄러져 비탈길을 굴러 떨어질 만큼 위태로웠다.

 현우와 마토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져 주먹질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성인과 아이가 서 있었는데 햇살에 비친 음영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너넨 정말 볼 때마다 싸우는 구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현우는 방금 전 수업을 같이 들었던 레이린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렇다면 그녀 옆에 있는 소년의 음영은 금발머리 소년 벤트릭일 것이다.

 “싸운 거 아냐. 일방적인 훈계라고나 할까.”

 현우는 옷에 묻은 먼지들을 탁탁 털고 일어나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팔을 벌렸다. 반면 마토는 과장된 행동으로 현우가 풍기는 먼지 냄새가 고약하다는 듯 허공에 손을 휘휘 저었다.

 훈계? 레이린은 어이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현우는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뭐해?”

 “나?”

 현우는 잘못 들은 줄 알고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되물었다. 레이린은 그럼 주변에 너 밖에 더 있겠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벤트릭은 눈을 반짝이며 대답을 기다렸다.

 현우와 마토는 서로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주영이 이외에 이렇게 친근하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물론 레이린이 자신을 좋아해서 물어본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현우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지금 사람인 친구가 실루엔노틀로 넘어오는 바람에 긴급 구속이 되었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뭄하프로 가야한다는 것을 말할 수가 없었다.

 리온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지 않았어도, 그쯤은 현우도 알았다. 어떤 결과가 나오기 전에 소문이 퍼져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어……. 그러니까 그게…….”

 현우는 레이린에게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고민하느라 잠시 망설였다. 그때 그녀의 그림자, 레이뮌즈가 레이린의 왼쪽 위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오해하지 마. 꼬시는 거 아니니까.”

 현우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쳤다. 당황한 레이린이 현우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고개를 돌려 레이뮌즈에게 이 남자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속삭였다.

 “그리고 솔직히 누나가 아깝지.”

 벤트릭이 천연덕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마토가 작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여 벤트릭과 생각과 비슷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벤트릭과 마토 순서대로 모습을 지켜본 현우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어서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레이뮌즈가 끝까지 의심의 끊을 놓고 있지 않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뭄하프로 가려고.”

 현우는 레이뮌즈에게 시선을 두며 말했다.

 “뭄하프? 그게 뭐야?”

 그는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도 뭄하프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다.

 “나도 잘은 몰라. 그런데 뭄하프로 가야해. 볼일이 있거든.”

 “같이 가, 형”

 벤트릭이 다짜고짜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뭄하프를?”

 “응. 나 심심해. 같이 놀자.”

 “난 놀러 가는 게 아닌데…….”

 현우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레이린의 눈치를 보았다. 그녀도 내심 기대하는 눈치였다. 반면 레이뮌즈는 눈앞에서 당장 사라지라는 듯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형 볼일 보고 놀면 되잖아, 응?”

 조금 전까지 어른스럽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벤트릭은 어린아이처럼 현우의 손을 잡으면서 떼를 썼다. 현우는 도와달라는 눈빛을 마토에게 보냈지만 그는 귓밥 파는 시늉을 했다.

 

 * * *

 

 뭄하프 로비의 의자에 리온이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리온!”

 현우는 도서실에 있는 것처럼 쉰 목소리로 작게 소리쳤다.

 뭄하프의 분위기는 변함없었다. 새하얀 공간, 아주 작은 소리도 허용하지 않는 적막. 그나마 스키네가 당직을 섰던 새벽 시간대가 아닌 오후 시간대여서 그런지 이종족들이 움직이고 대화하면서 생겨나는 소음이 간간히 들렸다. 회전문 근처에는 덩치 큰 경비원들이 각 잡힌 태도로 근무를 서고 있었다.

 “왔어?”

 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가운 표정으로 현우를 맞이하다가, 현우 뒤쪽에 줄줄이 따라오는 쉐도어들을 보고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친구들은 누구...?”

 리온이 레이린과 벤트릭을 위아래로 빠르게 훑어보면서 물었다.

 “이번에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이에요. 이쪽은 페루에서 온 레이린이구요, 이쪽은 독일에서 온 벤트릭이에요. 이 분은 리온이야. 이번에 나를 실루엔노틀로 데리고 와준 사절단의 쉐도어.”

 “만나서 반가워요. 뮌즈 레이린이에요.”

 레이린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반갑게 인사했다. 처음 보는 사람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대하듯이 말하는 게 그녀의 장점이었다.

 “안녕하세요? 미히덴 벤트릭이에요.”

 벤트릭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씩씩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리온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차분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 정도로 인사가 끝났겠지만, 쉐도어들은 그림자들도 인사를 나누어야했기에 더 복잡했다. 특히 레이뮌즈가 특유의 경멸어린 표정으로 리온을 노려보는 바람에 레이린은 한동안 상황을 설명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아아, 그런 성격이구나. 하하,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뭐 그림자 성격이야 천차만별이니까.”

 리온은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레이뮌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상대방이 무안할 만큼 딱 잘라 말했다.

 “웃지 마. 변태 같이 생긴 아저씨.”

 “…….”

 상황파악이 안 된 리온이 멍하니 있었다.

 “변...태...?”

 뒤늦게 그는 두 눈을 끔벅이면서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레이뮌즈가 한 말을 따라했다. 당혹감이 서려 있던 그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현우는 레이뮌즈와 멀리 떨어뜨리려고 리온의 가슴팍을 다독이며 살짝 밀었다.

 하지만 리온은 차갑게 얼어붙은 얼음처럼 제자리에 버티고 서서 레이뮌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관자놀이 주변에 혈관이 꿈틀거렸다.

 “내가, 변……. 변태? 변태라고?”

 “리온, 저 친구는 원래 입이 험해요. 참아요.”

 “아니, 잠깐만. 변태? 아니, 잠깐만. 이것 좀 놔봐……. 아니, 하하! 처음 들어봐서 그래. 진짜 처음 들었다니까? 내가 산적같이 생겼다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변태 같은 아저씨라는 말을 처음 들었…….”

 마토까지 가세하여 있는 힘껏 밀자 리온의 몸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리온의 시선은 레이뮌즈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현우는 레이린과 벤트릭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리온을 밀었다. 그리고 과장된 동작으로 품속에서 안경케이스를 꺼내 그의 가슴팍에 내밀었다.

 “응? 뭐야?”

 완전히 흥분해서 어쩔 줄 모르던 리온은 고개를 내려 현우가 내민 안경케이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금세 옅은 미소가 번졌다.

 “아아~ 이거? 대학교 수업에서 많이 도움 됐지? 내가 이래보여도 센스 하나는 기가 막히단 말이야. 근데 이거 안 돌려줘도 돼. 너 가지라고 준 거…….”

 “네, 센스가 정말 기가 막히더라고요. 일부러 그런 거예요?”

 “뭐가?”

 “한국인한테 영어로 번역을 해주는 안경을 주셨잖아요.”

 “뭐?”

 “한국인이라면 전부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요. 물론 영어가 한국에서 제 2의 언어로 불리는 외국어이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공부하는 것도 맞긴 하지만, 못하는 사람도 은근히 많거든요? 쳇.”

 현우는 평소에도 영어에 목숨 건 한국 사회에 대한 비난을 생뚱맞게도 리온에게 했다. 당연히 리온은 무슨 말인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언어가 다르단 말이지?”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그동안 내가 한국에서 데리고 온 쉐도어들은 이걸 건네줘도 아무 말 없었는데…….”

 “그 친구들은 전부 영어를 잘 쓰나 보죠. 하지만 전 아니에요. 어쨌든 이거 안경, 한국어로 번역되는 안경으로 바꿔주세요”

 “왜냐하면 이 친구는 영어에 쥐약이거든요. 영어만 보면 현기증이 나는 친구죠.”

 마토는 한쪽 손으로는 현우의 어깨를 걸치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자신의 배를 붙잡은 채 낄낄거리며 웃었다.

 “알겠어. 이거……. 환불해야겠군.”

 리온은 풀 죽은 목소리로 말하며 안경케이스를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현우는 등 뒤에 멀찍이 떨어져 있는 레이린과 벤트릭을 의식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주영이는 어떻게 되었어요?”

 순간, 리온의 얼굴에 긴장감이 띠었다. 그의 목젖이 크게 울렁이면서 꿀꺽하고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리온이 현우의 눈치를 보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풀려나지 않았어.”

 현우는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는데도 이미 불길함이 느껴졌다.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라 현우가 입을 벙긋거리자 리온이 재빨리 덧붙였다.

 “지금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어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야.”

 “주영이가 왜 구치소에 수감되어요?”

 현우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사납게 노려보았다. 마토도 나서지는 않았지만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이 실루엔노틀에 넘어오는 것은 예전부터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어. 이종족들과 이 세계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였지. 반대로 우리가 리생계에 나가서 이종족들의 비밀을 들킬만한 실수를 하면 벌을 받는 것도 이와 비슷해.”

 리온이 허둥거리며 횡설수설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요?”

 리온은 안절부절 못한 채 주위의 이종족들이 없는 것을 다시 확인하고 작게 속삭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변호했지. 하울릿들에게 쫓기는 바람에 중간에 다른 곳으로 빠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온 것이다, 짧은 시간동안 본 것으로 전부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절대 실루엔노틀에 해를 가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비밀을 누설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라고. 넬레 장관은 어느 정도 수긍하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보수 세력의 장관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여서…….”

 그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그냥 내가 실루엔노틀에서 그녀를 내쫓는 걸로 조용히 무마하는 건 어떻겠냐고 말했어. 그게 최선인 것 같아서. 그런데…….”

 “그런데요?”

 현우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자세히 듣기 위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리온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것조차 안 된다는 거야.”

 답답함에 현우는 온몸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두통이 찾아와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주영이는 실루엔노틀에 넘어온 순간부터 죄가 성립되었어. 그래서 그들은 그 상황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판결을 내려야 하고, 그녀는 판결을 받아야 한다는 거야. 그러려면 일단은 구치소에 가둘 수밖에 없고…….”

 현우는 할 말을 잃고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이마를 짚었다. 무엇인가 굉장히 잘못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도 오래 가지 못했다. 깊은 분노, 오로지 분노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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