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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루나틱
작가 : 0kim
작품등록일 : 2017.7.4

주인공의 그림자로 동고동락하며 살아온 인생만 10년! 눈치 없는 주인공 옆에서 소꿉친구의 짝사랑을 바라본 기간 또한 10년! 수다스럽지만 불만 많고, 유쾌하지만 겁 많은 그림자와 세상 비관적인 주인공, 호기심 많은 여자 소꿉친구와 함께하는 판타지 세계 모험물.

 
면회
작성일 : 17-07-06 21:44     조회 : 294     추천 : 0     분량 :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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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화」

 

 “언제까지 갇혀있는 거죠?”

 마토가 체념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지금 당장 주영이가 구치소에서 나오지 못한다는 현실을 정확히 직시했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기간이었다.

 “죄가 의심되는 이종족들은 최대 3일, 죄를 지으면 최대 일주일 동안 구치소에 가둘 수 있어. 그 다음 판결이 내려져서 확정이 되면 감옥으로 이송이 되는 거고. 그런데 그녀는 사람으로서 엄연히 실루엔노틀로 들어오면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요!”

 현우는 짜증이 치솟아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일종의 권위의 상징이었던 정적이 단숨에 사라졌다. 로비 안에 있던 이종족들이 일제히 대화나 걸음을 멈추고 책망하는 눈길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레이린과 벤트릭은 의아한 눈길을 보냈고, 경비원들은 자신들이 근무를 서고 있는데도 소란을 피운 것에 매우 언짢아했다.

 “최대 100일이야.”

 리온은 현우의 어깨 너머로 다가오는 경비원들을 쳐다보며 서둘러 말했다.

 “100일? 그럼 지금 감옥에 세 달 넘게 썩혀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여기 사는 이종족들은 기껏해야 일주일인데?”

 “정확히 말하면 구치소야. 그리고 목소리 좀 죽여. 이 사건은 지금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어서 장관급을 제외하곤 아무도 몰라. 난 그녀를 직접 실루엔노틀로 데리고 온 사절단의 증인 신분으로 참여한 거고.”

 “어쨌든 주영이 감옥이건 구치소건 간에 100일 동안을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한다는 거 아니에요?”

 “그 전에 판결이 나면 조기에 나올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시간을 전부 채우지 않을까 싶다. 사람이 실루엔노틀로 넘어온 사례가 이번이 처음이라 아마 장관급들도 성급히 판결을 내리지 못할 거야. 잘못된 선례를 남기면 안 되니까. 내가 증인 신분으로 그녀의 무죄를 계속 변호하겠지만, 일단은 판결이 날 때까지 기다려 보는 수밖에…….”

 “아니, 무슨 그 따위 법이 다 있어요?”

 현우가 계속해서 언성을 높이면서 말하자 리온은 이곳이 뭄하프라는 것을 다시 상기시키면서 제발 조용히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이미 경비원들이 둘에게 바싹 다가왔다.

 그들은 덩치가 워낙 커서 눈을 내리깔고 현우와 리온을 내려다보았다.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표정에서 좋은 말로 할 때 조용히 뭄하프를 나가라는 무언의 메시지가 전해졌다.

 “잠깐, 잠시 만요. 그럼 면회만 하고 갈게요. 얼굴만이라도 보게.”

 현우가 경비원들의 눈치를 보며 황급히 리온에게 말했다.

 “그것도 안 돼. 면회를 하려면 미리 전날에 신청을 해야 돼서, 내일부터 가능한 거지”

 “생사람 집어넣는 건 그렇게 간단하면서 단순히 얼굴 보는 건 왜 이렇게 절차를 따지는 거야? 빌어먹을, 상식이 안 통하네!”

 현우의 말은 점점 뇌를 거치지 않고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거친 말투가 거슬렸는지 경비원들의 표정은 점점 더 험상궂게 변했다. 마토는 괜히 봉변을 당할까봐 슬쩍 현우의 옷을 잡아당겨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하하, 미안합니다. 이 친구가 어제 실루엔노틀로 넘어와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봐요. 곧 나가겠습니다.”

 리온이 경비원들의 비위를 살살 맞추었다. 그러나 경비원들은 그들이 당장 나가는 것을 지켜보겠다는 듯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의중을 눈치 챈 리온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현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

 “말조심해! 뭄하프는 실루엔노틀 최고의 판결 기관이고, 여기서 난동을 부리면 이유를 막론하고 감옥행이야.”

 “지금 그게 중요해요? ...내 친구가 구치소에 갇혔는데?”

 현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경비원들의 눈치가 보여, 중간에 목소리를 한껏 죽였다.

 “리생계에 그런 말이 있다며.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여긴 실루엔노틀이야. 어쩔 수 없어, 이곳에 왔으면 이곳의 법을 따라.”

 “쳇.”

 리온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현우를 살살 달랬다.

 “진짜 미안하다. 책임지고 구치소에서 빼온다고 했는데, 이런 결과라서. 하지만 사태가 생각보다 심각해. 일단 밖에 나가서 얘기하자. 여기서 더 있어봤자 손 쓸 방법이 없어.”

 “밖으로 나간다고 방법이 있어요?”

 “장담할 순 없어. 그래도 적어도 이곳보다는 손 쓸 방법을 찾을 확률이 높겠지. 하지만 이곳에 계속에 있으면 네가 구치소에 끌려갈 확률이 더 높거나……. 저 무서운 형님들이 손을 쓸 확률이 더 높다는 것만은 장담할 순 있어.”

 현우는 살며시 눈동자만 굴려서 경비원들의 손을 확인했다. 털이 듬성듬성 난 거친 주먹이 쥐었다 폈다 하는 것을 보자 리온의 말이 거짓말로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런 말도 있잖아.”

 리온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상황이 복잡할 때는 한 발 뒤로 물러나서 보라는 말, 못 들어봤어?”

 “못 들어봤는데요.”

 “들었을 걸?”

 “제가요? 언제요?”

 “지금.”

 현우가 싸늘한 표정으로 리온에게 면박을 주었다. 실실 웃던 리온의 웃음이 뚝 그쳤다. 그런데 반대로 마토가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때 한 경비원이 목을 긁듯이 헛기침을 했다.

 “아, 하하!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나가겠습니다.”

 리온이 허둥지둥 현우의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그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힘을 주고 딱 버텼다.

 “여기서 소란 피운다고 구치소에 있는 주영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쯤은 너도 알고 있잖아. 지식인은 머리를 쓰는 거지, 몸을 쓰는 게 아냐. 우리 나가서 머리를 굴려보자고.”

 현우는 떠밀리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레이린과 벤트릭이 종종걸음으로 현우와 리온의 뒤를 따라갔다.

 

 * * *

 

 안내소에서 근무하는 브루아나는 모처럼 짜증이 났다.

 그녀가 뭄하프에 지원한 이유는 순전히 조용하기 때문이었다. 뭄하프는 실루엔노틀의 모든 장관과 고위 공직자들이 출근하는 곳으로 절대 시끄러울 수가 없는 곳이었다. 종교만큼 성스러운 곳, 그곳이 바로 뭄하프였다. 실제로 뭄하프 내부에서는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는 법도 있었다. ‘뭄하프 실내 소음 금지법’이었다.

 그런데 지금 뭄하프 로비에는 쉐도어 남자 두 명이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그 중 젊은 남자는 리생계에서 넘어온 리 쉐도어로 보였다. 그가 실루엔노틀 언어가 아닌 전혀 이상한 언어로 말하고 말했고, 브루아나는 번이어를 끼고 있지 않아서 알아듣지 못하는 그의 말이 귀에 매우 거슬렸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는 유창한 실루엔노틀 언어로 말을 구사하는 것으로 보아 쉐도어로 보였다. 그렇다면 뭄하프가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알 법도 한데, 그 사내는 리 쉐도어의 눈치만 봤다.

 갑자기 고성이 튀어나왔다. 브루아나는 경멸어린 눈빛으로 아직까지 소란을 피우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시선을 느끼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들의 언성이 점점 커지자 보다 못한 경비원들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브루아나는 뭄하프에 곧 평화가 찾아올 거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비원들에게 둘러싸인 그들은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몸을 돌려 뭄하프를 나갔다. 그들 뒤로 구릿빛 피부의 여자와 금발머리 소년이 쭈뼛쭈뼛 따라갔다.

 브루아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퇴근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갓 내린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때우면 금방 흘러갈 것이다. 아직 오늘 당직 근무자이자 직장 상사가 오지 않았지만 그의 지각이야 늘 있는 일이었다.

 “op owkl?"

 커피를 마시던 브루아나는 눈앞에 갑자기 남자가 나타나서 깜짝 놀랐다. 순간, 뜨거운 커피에 입천장이 데여 불이라도 난 것처럼 따갑고 쓰린 통증이 느껴졌다.

 간신히 커피를 삼킨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에 로비에서 소란을 피우던 리 쉐도어였다.

 “ai qkzi kow?"

 브루아나는 조금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서랍을 벌컥 열어서 공용 번이어를 꺼내어 귀에 꼈다. 그리고 매뉴얼대로 미소를 지으면서 응대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면회를 신청하려고요.”

 리 쉐도어가 다짜고짜 말했다.

 “네. 면회를 하시려면 먼저 신청서를 작성하셔야 합니다.”

 “주세요.”

 그는 안내소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삐딱한 자세로 빨리 달라는 듯 검지를 까닥거렸다. 브루아나는 순간 그의 얼굴에 커피를 끼얹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내일도 뭄하프에 출근하고 싶었기에 얌전히 신청서와 볼펜을 건넸다.

 면회 신청서를 보자마자 리 쉐도어는 얼굴을 팍 구겼다. 그는 보는 사람마저 피곤하게 만드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잠시 만요.”

 리 쉐도어는 신청서를 그대로 내버려 둔 채 로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의 불만스러운 감정이 가득 담긴 발자국 소리가 정적 속에 울려 퍼졌다.

 브루아나는 하필이면 퇴근 직전에 이상한 녀석에게 걸렸다고 생각하며 통유리창 너머로 리 쉐도어를 쳐다보았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리 쉐도어는 곧장 일행에게 다가가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있었다.

 머리가 덥수룩한 남자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안주머니에서 어떤 케이스를 꺼내 건넸다. 그러자 리 쉐도어는 과장된 동작으로 케이스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케이스가 박살나면서 안에 들어 있던 안경과 안경닦이용 천 조각이 튀어나왔다.

 놀란 사내가 허둥지둥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거리가 멀어서 브루아나는 안경의 상태까지 보이지 않았지만 쉐도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한 것을 보니 깨진 것이 분명했다.

 둘은 다시 언성을 높이면서 말다툼을 했다. 곧이어 머리가 덥수룩한 쉐도어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자리를 벗어났다.

 리 쉐도어는 당부하는 것처럼 끝까지 무어라 소리치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구릿빛 피부의 여자와 금발머리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브루아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입천장이 쓰라렸다. 그래도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이젠 퇴근 시간까지 진짜 얼마 남지 않았다.

 브루아나는 번이어를 빼고 미지근해진 커피를 홀짝이며 책을 읽었다.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완전히 몰입해서 읽고 있는데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달리 회전문이 거칠게 돌아가는 소리였다.

 고요한 분위기에 반하는 발자국 소리에 이끌리듯이 브루아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는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 남자였다.

 리 쉐도어는 씩씩거리며 걸어왔다. 경비원들이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허리에 메어져 있는 몽둥이를 뽑아 들어 손바닥에 탁탁 때리면서 그의 앞길을 막았다.

 리 쉐도어는 두 눈을 크게 뜨고서 자신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양손을 들었다. 능글맞게 웃는 그를 향해 경비원이 어떤 말을 했다. 그는 억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원들을 등지고 걸어오는 리 쉐도어의 표정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브루아나는 그 남자가 안내소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조금 전과 다른 색깔의 안경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

 브루아나가 다시 서랍을 열어 번이어를 끼는 순간, 리 쉐도어가 안내소 앞에 섰다.

 “신청서 다시 주세요.”

 브루아나는 그가 또 검지를 까닥거릴까봐 재빨리 면회 신청서와 볼펜을 건넸다. 리 쉐도어는 케이스를 열고 번안경을 썼다. 그러곤 신청서를 스윽 훑어보더니 부지런히 펜을 놀렸다. 굳게 다물어져 있는 그의 입술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리 쉐도어가 면회신청서에 글씨를 휘갈겨 쓰는 동안 브루아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근무 시간은 끝나 있었다. 당일 당직 근무자이자 그녀의 직장상사인 스키네가 이미 안내소에 와서 교대를 했어야 했는데, 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브루아나는 슬슬 짜증이 치밀었다.

 리 쉐도어는 볼펜을 안내소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갔다. 브루아나는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신청서를 확인했다.

 이런, 제기랄!

 놀란 그녀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사람 없는 회전문이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 * *

 

 “작성했어?”

 리온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네, 확실하게 작성했어요. 이번 안경은 한글로 잘 보이더라고요. 이제 내일 면회 가능하겠죠. 근데……. 내일 주영의 얼굴보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영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네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냉정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으니까.”

 리온은 걸으면서 이야기했다. 현우와 레이린, 벤트릭이 그와 나란히 걸어갔다.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있다고요?”

 “그래.”

 “언제 만났어요?”

 현우가 눈을 끔벅거리며 물었다.

 “아까 증인 신분으로 긴급 판결에 참여했다고 했잖아. 당찬 아이야. 두려울 법도 한데…….”

 리온은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말없이 걸었다. 그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띠었다. 현우는 넓은 테이블, 권위 있는 자리에 앉은 장관들 앞에서 두 손이 묶였지만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당당히 앉아 있는 주영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의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레이린과 벤트릭은 차마 물어보지도 못하고 현우와 리온을 쫄래쫄래 따라갔다. 그들에게 별일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 한 마디 건네줄 수도 있었지만 현우는 주영에 대한 걱정으로 그들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마토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현우 옷 좀 사주려고.”

 “옷이요? 갑자기 무슨 옷을 사줘요?”

 “여긴 봄인데, 겨울옷 입고 있어서 더울 거 아냐?”

 마토는 할 말을 잃었다. 생긴 건 며칠 굶은 산적처럼 퀭하게 생겼는데 의외로 주변 사람을 챙기는 것에 놀랐다. 생각해보니 실수이긴 해도 대학교에서 실루엔노틀 언어를 읽지 못할까봐 번안경을 구해다 주기도 했다.

 “여기가 바로 내가 자주 오는 단골 가게야. 실루엔노틀 패션의 성지지.”

 마토가 리온의 성격에 감탄하고 있을 때, 때마침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엔 다 쓰러져 가는 낡은 건물이 있었다. 주변은 인적이 드물었고, 그 건물로 들어가는 이종족은 한 명도 없었다.

 “여기가 패션의 성지?”

 현우의 얼굴에 불신하는 빛이 떠올랐다.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돼.”

 현우와 마토는 멍하니 가게를 쳐다보며 혹시 실루엔노틀에서는 성지라는 단어의 뜻이 다른 건 아닐까 의심했다. 막상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옷들 대부분이 낡고 헤졌다는 게 흠이었지만 종류가 꽤 다양했다. 대신 시장 바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누군가 입었던 것으로 보이는 옷이 행거에 그대로 올려 있었고, 바닥에도 옷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마토는 레이뮌즈가 은연중에 어두침침한 이곳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리생계에서도 은둔하게 지냈을 모습이 상상되었다.

 “레이린 누나, 이거봐봐.

 벤트릭이 히죽거리며 바지 하나를 들어올렸다. 리생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바지였는데, 정강이에서부터 허벅지까지 쭈욱 찢어져 있었다. 빈티지라기보다는 그냥 찢어진 옷 같았다.

 “그래도 가게가 사람 냄새 나는 것 같아서 좋네.”

 레이린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벤트릭. 먼지 묻잖니? 그 더러운 옷 내려놓으렴.”

 그림자 벤트히미가 야단쳤다. 벤트릭은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바지를 원래 자리에다 내려놓았다. 벤트히미는 역시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아이라며 한결 상냥한 목소리로 벤트릭을 칭찬했다.

 현우는 그나마 깨끗하고 시원해 보이는 옷을 골랐다. 리온은 별다른 말없이 사주었다.

 “고마워요.”

 “더울 텐데 새로 산 옷 입고 가.”

 리온의 말대로 현우는 새로 산 옷으로 갈아입고서 가게를 나섰다. 두꺼운 겨울옷들과 달리 가볍고 통풍이 잘 되어서 쾌적한 기분이 들었다. 현우는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하늘에 뒤집어져 있는 바다를 보자 현우는 문득 바다에 빠져서 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바다에 발을 담군 적이 없었다. 한여름에 뜨거운 백사장을 걸으면 거품 섞인 차가운 바닷물이 다가와 발을 간질이는 기분, 그는 상상이 잘 안 되었다.

 “참, 뼈 지팡이 말인데.”

 리온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리 쉐도어의 경우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친 수료증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하더라.”

 “그래요?”

 현우는 짐짓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지만 사실 뼈 지팡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짐승의 뼈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옛날에는 가능했었는데 최근에 법이 바뀌어서 제제에 들어갔대. 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사절단 임무를 오랜만에 뛰어서 잘 몰랐어.”

 리온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현우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발걸음은 무겁지 않았고, 살갗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시원한 바람 덕분에 상쾌했다.

 그런데 그때 하늘에서 난데없이 비가 쏟아졌다.

 “꺄아아악!”

 레이린이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옆으로 달아났다. 리온과 벤트릭도 재빨리 몸을 피했다. 재수 없는 현우만 있는 그대로 비를 맞았다.

 현우는 얼음처럼 굳어 있다가 자조 섞인 미소를 띠며 옷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옷에 가득 머금어 있던 물기가 주르륵 하고 흘러내렸다.

 “후……. 이봐, 장님. 나한테 떨어지는 게 안 보여? 옆으로 돌려서 짜.”

 마토가 현우의 무딘 반사 신경에 화가 나 까칠하게 말했다. 현우는 그를 힐끔 보더니 아예 대놓고 그의 몸 위에다가 옷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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