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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루나틱
작가 : 0kim
작품등록일 : 2017.7.4

주인공의 그림자로 동고동락하며 살아온 인생만 10년! 눈치 없는 주인공 옆에서 소꿉친구의 짝사랑을 바라본 기간 또한 10년! 수다스럽지만 불만 많고, 유쾌하지만 겁 많은 그림자와 세상 비관적인 주인공, 호기심 많은 여자 소꿉친구와 함께하는 판타지 세계 모험물.

 
바올리언스 대학교
작성일 : 17-07-06 21:42     조회 : 373     추천 : 0     분량 : 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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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화」

 

 “괜찮아요?”

 학생들이 현우를 바라보며 킥킥 웃고 있는 사이, 라그디헨 교수가 웃으며 물었다. 현우는 민망함에 허겁지겁 의자를 똑바로 두고 앉았다.

 “반응을 보니 하울릿에게 쫓겨본 경험이 있는 것 같군요?”

 현우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디헨 교수는 몸을 틀어 허공에 떠있는 하울릿을 가리켰다.

 “이론 시간에 들으셨을 것입니다. 이 녀석이 바로 저희의 천적, 하울릿입니다. 이건 비록 매직 아이템에 의해 만들어진 환영이긴 하지만 거의 비슷하게 생겼죠. 이미 진짜와 맞닥뜨린 경험이 있는 학생조차 놀랄 만큼 말입니다.”

 현우는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하울릿을 쳐다보았다. 붉은색으로 번뜩이는 안광이나 대단히 질겨 보이는 검은색 근육질의 몸,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까지 모든 게 똑같았다. 허공에 떠 있지 않고 바닥에 네 발을 딛고 서 있다면, 환영인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울릿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마토는 혀를 내둘렀다.

 “보기만 해도 밥맛이 떨어지는군. 다이어트 할 때 제격이겠어.”

 라그디헨 교수는 마토의 말이 퍽 마음에 들었는지 환하게 웃었다.

 “눈앞에 실존하지 않는 것을 실존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환영술입니다. 저희 쉐도어는 이런 환영을 이용해 하울릿들의 정신을 교란시키죠. 저희가 하울릿들과 싸울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입니다. 환영으로 저희가 하울릿들의 정신을 교란시키면, 같이 있는 동료가 공격을 가하는 것이지요.”

 “엉?”

 마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우리는 직접 싸울 수가 없죠?”

 “좋은 질문입니다!”

 라그디헨 교수는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왜 쉐도어들은 하울릿들과 직접 싸우지 못하느냐, 그건 아주 간단합니다.”

 그는 학생들을 주욱 둘러보며 단어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주어 말했다.

 “쉐도어는 전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의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마토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전투 능력이 없다고요?”

 “네, 없습니다. 마법을 다룰 수 있긴 하지만 이넬 종족의 신령술이나 듄 종족의 어둠의 마법에 비하면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죠. 물론 몇몇 쉐도어들이 마법사의 기질을 보이긴 합니다만…….”

 “그런 마법이 아니라 직접 싸우던데요?”

 몇몇 학생들이 마토를 흘깃 쳐다보았다. 현우는 타인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싫어서 마토의 입을 틀어막고 작게 속삭였다.

 “가만히 있어!”

 “읍, 읍! 아니, 이상……. 읍! 이상하잖아!”

 마토는 현우의 손을 뿌리치려고 버둥거렸다.

 “그때 쉐도어는 읍읍! 막 순간이동 하면서 싸웠던 것 같은데……. 읍! 숨 막혀, 이거 놔!”

 레이린은 마토의 말에 흥미가 생겨서 라그디헨 교수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라그디헨 교수는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직접 싸웠다고요? 흐음……. 쉐도어가 하울릿을 상대로 직접 싸우는 것은 싸우는 건 불가능…….”

 그는 말하다 말고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랐는지 말을 멈추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꽤 놀란 눈길로 현우와 마토를 바라보았다.

 “설마……. 사절단 쉐도어 이름이 리온인가요?”

 현우와 마토는 서로 할퀴고 때리던 동작을 멈추고 라그디헨 교수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대학교 교수가 리온을 알고 있다는 것에 굉장히 놀랐다.

 “오랜만에 리온이 사절단 임무를 나간다고 들었는데, 그 리온이 데리고 온 쉐도어가 당신이었군요? 맞아요, 그라면 하울릿과 충분히 싸우고도 남죠…….”

 라그디헨 교수는 마토가 궁금해 못 견디겠다는 표정을 보자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리온의 경우는 특수한 경우이니 제외하겠습니다. 아직 그 부분까지는 몰라도 될 것 같습니다.”

 그가 딱 잘라서 말하자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지 않았다. 참을성이 그리 많지 않은 마토는 하는 수 없이 어깨만 으쓱거렸다.

 “자, 어쨌든 쉐도어에겐 이 환영술이 가장 중요한데, 이걸 아무 때나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루너와 그림자가 하나가 되는, 루나틱 상태가 되어야지만 사용할 수가 있는데요, 왜냐하면 마나를 근거로 하는 마법이나 환영술은 세실이라는 마나방이 있어야지만 사용할 수 있는데, 쉐도어는 이 세실이 본체와 그림자에 절반씩 나뉘어져 있는 종족이어서 평소에는 굉장히 불안정한 상태로…….”

 “이봐, 이봐. 친구들 전부 재울 셈이야? 그렇게 말한다고 알아듣겠어?”

 라그디헨 교수의 그림자가 바닥에서 떨어져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그림자의 어깨는 힘없이 축 처졌고, 주먹을 입에 갖다 대고 연방 기침을 했다.

 “열 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낫지. 쿨럭, 쿨럭. 친구들 표정을 보라고.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는 얼굴이잖아.”

 라그디헨 교수는 계면쩍은 표정을 지으며 학생들을 둘러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자네 말도 일리가 있어. 그럼 여러분, 직접 시범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라그디헨 교수는 학생들을 데리고 강의실의 텅 빈 뒤쪽 공간으로 갔다. 스무 개 가량의 조명 중 하나의 조명이 어느새 켜져서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라그디헨 교수는 조명을 등지고 서더니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한 발 앞으로 나오고, 옆으로 반걸음 이동한 다음, 다시 앞으로 반걸음 움직였다. 그 후로도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잔걸음을 하며 무엇인가를 맞추었다.

 마지막으로 눈앞의 그림자와 등 뒤의 조명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는 갑자기 몸에 힘을 빼고 앞으로 쓰러졌다.

 “루나틱.”

 학생들은 라그디헨 교수의 갑작스런 행동에 깜짝 놀랐다. 이상한 건 당연히 들려야 할,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바닥에 엎드려서 가만히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라그디헨 교수를 향하고 있을 때, 그의 그림자가 고개를 들었다. 학생들은 비명을 지르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라그디헨 교수의 그림자는 바닥을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듯 몸을 툭툭 털면서 여전히 바닥에 엎드려 있는 라그디헨 교수 옆에 섰다. 놀랍게도 붙어 있어야 할 다리 부분의 그림자는 완전히 떨어져 있었다.

 “이게 바로 루나틱입니다. 두 개로 나뉘어져 있던 세실이 하나로 합쳐진 상태……. 쉽게 설명하자면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상태죠. 쉐도어는 이 상태가 되어야만 마법을 사용하건 환영을 사용하건 할 수 있습니다. 참, 그리고 이 상태가 되면 이렇게 본체와 떨어져서 움직일 수도 있죠.”

 그림자의 입에서는 라그디헨 교수의 기운 찬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발 한쪽을 들어 올려 본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을 학생들에게 확인시켜주었다.

 “콜록……. 또한 그림자에 내 정신과 라그디헨의 정신이 공존하게 된 것이라서 이렇게 서로 말할 수가 있지. 콜록, 콜록! 큭, 죽겠군.”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로 그림자의 입에서 라그디헨 교수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 쉰 목소리는 처음 라그디헨 교수의 그림자가 내던 목소리였다.

 “맞습니다. 한마디로 그림자의 몸 하나에 두 개의 정신이 들어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떻게 이해가 가시나요?”

 그러나 학생들은 라그디헨 교수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진귀한 광경을 넋을 놓고 구경했다. 현우도 이미 리온이 하는 것을 봐서 알고는 있었지만 적응이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라그디헨 교수는 모든 학생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초조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설명 드리자면 쉐도어에게 있어 루나틱상태는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앞으로 실기 시간에 루나틱상태가 되는 법을 가장 먼저 배우는…….”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냈다. 고개를 끄덕이다가 갸웃거리기도 하고, 입술을 오므렸다가 폈다가를 반복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첫날부터 무리할 필요는 없지. 또 섣불리 루나틱 연습했다가 다치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고 말이야…….”

 라그디헨 교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마치 자기 눈에만 보이는 어떤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학생들은 라그디헨 교수가 말을 꺼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학생들 중 한 할머니가 오랜 기다림에 다리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레이린은 강의실 앞에 있던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아이구, 고마워요”

 할머니가 레이린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말했다. 레이린은 별일 아니라는 듯 싱긋 웃었다. 이후로도 한참이나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라그디헨 교수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첫날이고 하니 루나틱상태를 연습하지 않고, 대신 여러분들에게 환영술을 직접 보여주는 것으로 수업을 진행하겠습니다.”

 학생들은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지만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는 쭈그리고 앉아 쓰러져 있는 라그디헨 교수의 소매에서 뼈 지팡이를 빼내 허공에 휘둘렀다.

 주위 공간이 스멀스멀 바뀌기 시작했다. 강의실 앞에 있던 책상과 의자들은 나무의 밑동으로 변했고 금세 하나로 연결되어 커다란 나무로 자라났다. 흰색의 벽은 녹색과 갈색으로, 천장은 파란색으로 물들더니 치즈처럼 길게 늘어져갔다. 공간이 팽창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주위는 하늘을 덮을 만큼 커다란 나무로 둘러싸이고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리는 숲으로 변했다. 풀내음이 은은히 풍겼고, 신선한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열 한 명의 학생들과 그들의 그림자들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경악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학생, 어이없어서 허탈한 웃음을 짓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의자에 앉아 있던 할머니는 깜짝 놀라 작은 눈을 크게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이곳은 어디죠? 아니, 어떻게 된…….”

 레이린이 당황해서 물었다.

 “이곳은 변덕의 숲, 일명 싸가지로 불리는 곳입니다. 실루엔노틀에서 오른쪽에 보이던 숲 있죠? 바로 그곳이에요”

 거무튀튀한 그림자의 모습은 어느새 라그디헨 교수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놀란 학생들이 여전히 바닥에서 뒤통수만 보인 채 엎드려 있는 라그디헨 교수에게 향했다.

 라그디헨 교수가 두 명이었다.

 “아, 이 바닥에 있는 게 제 루너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제 원래 몸이죠. 이 몸은 제 그림자인 크로라그의 몸인데, 제가 환영술을 이용해 겉모습만 바꾼 거예요“

 라그디헨 교수는 연설자처럼 학생들의 앞에 서서 설명했다.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 나무 밑동에는 이끼와 덩굴들이 난잡하게 자라 있었다. 다양한 새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녹색과 갈색뿐이었다.

 “굉장한데…….”

 현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도시에서 자란 그는 여태까지 이렇게 많은, 또 커다란 나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나무는 대로변 근처에 심어져 있던 관상용 나무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곳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그야말로 야생의 숲이었다.

 “공기가 너무 깨끗해!”

 마토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체조하듯이 팔을 펄럭거렸다. 벤트릭은 마토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똑같이 흉내 냈고, 어느새 레이린도 따라했다.

 빤질빤질하게 생긴 남자는 근처 나무에 다가가서 나무껍질을 손으로 만졌다.

 “이 꺼슬꺼슬한 감촉……. 이건 진짜인데, 전부 환영이라는 건가요?”

 그는 여전히 나무껍질을 만지면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라그디헨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싸가지……. 아니, 변덕의 숲을 모티브로 제가 만든 환영의 세계입니다. 눈에 보이는 녹색의 나무와 푸른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귀를 간질이는 새들의 지저귐과 시냇물 흐르는 소리, 코로 맡아지는 풀내음, 손끝에 전해지는 꺼슬꺼슬한 나무껍질까지. 모두요”

 마토는 호기심이 동해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 하나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라그디헨 교수를 포함한 학생들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현우는 자신의 그림자가 상상을 초월한 이상한 놈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곧이어 마토는 나뭇잎 퉤 뱉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으윽, 이건 진짜 나뭇잎 맛이야.”

 현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뭇잎 맛을 안다는 것은 전에도 한 번 먹어본 적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무, 물론 환영은 미각도 속입니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 본 학생은 처음 보네요……. 하하! 나머지는 조금 걸으면서 얘기할까요?”

 라그디헨 교수가 앞장서서 걸었고 학생들은 모두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아무리 걸어도 주위 풍경은 하나같이 나무들뿐이어서 방향감각이 서질 않았다. 라그디헨 교수는 익숙한 듯이 성큼성큼 걸어갔다.

 “실루엔노틀에는 크게 여섯 개의 땅이 있습니다. 각각의 땅에는 각기 다른 종족들이 주인으로 살고 있는데, 이 변덕의 숲 주인은 이넬이라는 종족입니다.”

 현우와 마토는 자신들이 아는 종족의 이름이 나와 미소를 지었다. 머릿속에서 연녹색 피부의 말 없는 소녀, 모라이엠이 떠올랐다.

 그들은 한참을 걷다가 커다란 나무 밑동을 맞닥뜨렸다. 크기가 어찌나 큰지 고개를 좌우로 돌려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라그디헨 교수는 설명을 멈추더니 나무에서 뻗어져 나온 덩굴을 밧줄처럼 잡고 나무 밑동 위로 올라가자고 말했다.

 학생들이 하나 둘씩 덩굴을 잡고 올라갔고, 마지막 순서로 현우가 올라갔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마토는 현우의 등에 매달린 채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이미 밑동 위로 올라가 있던 라그디헨 교수와 몇몇 학생들이 고개를 빼끔 내밀어서 구경했다.

 “흐어억! 내려가! 내려가라고! 못 올라가, 너무 높아! 내려가라고, 이 자식아! 귀가 먹었냐!”

 현우는 자신이 특히나 싫어하는 비음 섞인 목소리가 귓전에 윙윙 맴돌자 마토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하지만 덩굴을 잡고 있어서 그럴 수가 없어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젠장, 다 올라가면 가만히 안 놔둬!”

 막상 밑동 위로 올라간 현우는 눈앞에 펼쳐진 경치에 넋을 잃었다.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면서 저 멀리 밑동의 한 가운데로 보이는 곳에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하지만 밑동이 너무 넓은 탓에 가운데에 있는 나무는 얇고 기다란 막대기 정도로 보였다. 주위에 커다란 나무들은 밑동을 둘러싸듯 빼곡히 심어져 있었다. 덕분에 분지 같은 넓은 공간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꽤 독특한 구조를 가졌죠? 이곳이 바로 이넬 종족들이 모여 사는 부락입니다.”

 라그디헨 교수는 걸어가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이넬 종족은 다른 종족과 마주치는 것을 별로 원치 않습니다. 자신들의 고향인 변덕의 숲에서조차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이 밑동 위에다가 부락을 만들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 저기 있군요. 저들이 바로 변덕의 숲 주인, 이넬 종족입니다.”

 라그디헨 교수가 걸음을 멈춘 곳에 이넬 종족이 있었다. 밝기에 차이는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의 피부색은 녹색 빛을 띠었고, 헤지고 낡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남자로 치면 긴 편이었고 여자로 치면 상당히 짧은 편이어서 이넬 종족을 처음 본 레이린은 소녀인지 소년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앉아 있는 이넬들은 빗으로 서로의 머리를 빗어주거나 얇은 실과 막대기를 이용해 무엇인가가 뜨개질을 했다. 한가롭게 바닥에 누워서 커다란 잎사귀로 얼굴을 덮은 채 낮잠을 자는 이넬이 있는가 하면 까마득히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의 나뭇가지에 걸터앉아서 자그마한 나뭇잎을 따서 먹고 있는 이넬도 있었다. 그들 중 몇몇이 이방인들의 방문을 눈치 챘지만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그저 힐끔힐끔 쳐다만 봤다.

 “누가 남자고 여자인지 모르겠어요.”

 이넬 종족을 유심히 바라보던 레이린이 말했다.

 “이넬 종족은 여자, 그것도 소녀밖에 없습니다.”

 “네?”

 레이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라그디헨 교수를 쳐다보았다.

 “저기에 있는 이넬들 모두 소녀입니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 알려드리면 이넬 종족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이넬의 수명은 천 년이나 되는데 나이를 먹어도 얼굴이 변하지 않거든요. 같은 종족이 아닌 이상 나이를 가늠하기 힘듭니다. 지금 저기에 있는 이넬들 중 몇 백 년이나 산 고령자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죠.”

 “천 년을 산다고요?”

 라그디헨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학생들 중 최고령자 할머니는 허허 하고 웃었다.

 “남자가 없어요?”

 레이린은 천 년 이라는 수명보다 이넬 종족이 소녀밖에 없다는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네,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그러니까 제 말은……. 어떻게 종족이 유지될 수 있는지…….”

 레이린이 말꼬리를 흐렸지만, 교수는 그녀의 뜻을 눈치 챘다.

 “저들은 나무를 통해서 자식을 번영합니다.”

 “나무요...?”

 “이곳 변덕의 숲에 있는 나무들 중 리생계에서 가져온 태초의 나무들이 있습니다. 굉장히 신성하고 성스러운 나무들이죠. 이넬들은 그 태초의 나물들을 남편으로 맞이하고 자식을 번영합니다.”

 “그러니까 거기 그림자. 조심해. 지금 자네가 만지고 있는 그 나무가 누군가의 남편일 수도 있어.”

 라그디헨 교수의 입에서 크로라그의 쉰 목소리가 나왔다. 나무를 짚고 서 있던 마토는 깜짝 놀라 황급히 손을 뗐다. 곳곳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빈 공터에 모여 있던 이넬들도 소리 죽여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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