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8-11-30 23:46
[응모]_천하제일_무협_장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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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우주가 진동했다. 2013년 초등학교 6학년 때 우연히 발견하게 된 ‘웹소설’이란 내 인생을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뭐든지 처음만큼 영원한 건 없을 것이다. 천하제일은 여러 가지로 나에게 처음이었다. 인터넷으로 연재하는 소설의 존재를 난생 처음 알았고, 강호와 정의가 있는 무협이라는 세계를 알게 되었고, 웹소설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해준 입구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사 모은 장편 장르 소설이었으며 모범적인 스토리 전개의 모델이었고, 동시에 나의 이상이었다.
계기는 아주 단순했다. 웹툰은 인지도가 있을 무렵, 네이버 사에서 웹소설이라는 사이트를 개설했던 것이다. 웹툰을 챙겨보던 난 자연스럽게 몇 주간 웹소설을 광고하는 링크를 접했고, 특히 ‘천하제일’이라는 소설이 나올 때가 가장 끌렸다. 정말 단순하게도 일러스트가 예뻐서.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해 일러스트만 구경해보자 했던 것이 홀랑 빠져 현재 몇 년째 웹소설 작가를 염원하는 추종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1학년, 2학년. 약 3년을 같이 살았다. 나는 천하제일이 연재되는 수요일, 토요일만을 목 빠지게 기다렸고 읽는 순간만큼은 주인공들과 같은 세상이었다. 집에서는 핸드폰 사용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그 추운 한겨울에 밖으로 나와 공공 와이파이를 찾아다니기 바빴다. 운좋게 한 칸이라도 연결되면 그 자리에서 몇 시간이고 천하제일을 읽는 것이다. 엄마한테서 심부름 갔다가 죽었냐는 재촉 전화를 받고서야 미적미적 집으로 돌아갔다. 올라오는 한 화 한 화가 너무나 소중해서, 스크롤이 내려가는 게 아쉬우면서도 궁금함에 결국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날 올라온 글을 다 읽으면 나는 미련이 남아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다시 위로 올려 맘에 드는 표현이나 대사를 두고두고 곱씹었다.
처음 본 무협 소설은 그렇게 아무 거리낌없이 내 삶에 들어와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무협이 남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웃기지 마시라. 장영훈이 쓴 천하제일의 맹점이 바로 이점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는 웹소설 시장의 독자 대부분을 차지하는 여성들을 고려해서 글을 썼다. 실력은 기본에 매력이 넘치고 능동적인 여자 주인공, 설수린과 실제로 부인에게 도움을 구한 만큼 공감이 가고 설레는 남녀 주인공의 연애 전선, 전음과 검강 같은 무협 용어를 처음 봐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는 등(더 놀라운 점은 대놓고 용어 설명을 함에도 글의 분위기가 전혀 깨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세한 부분에서 그는 주된 여성 독자층까지 사로잡으며 남성에 국한되지 않은 폭넓은 독자층을 보유할 수 있었다. 나 또한 그런 친절한 전개 덕에 천하제일을 읽을 수 있었다.
이러니 장영훈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웹소설 작가이다. 단지 처음 접한 작가라서가 아니라 여러 닮고 싶은 면이 가득해서. 그 중 하나를 꼽자면, 나는 그가 작품 전체에 풀어내는 순수한 ‘정의’와 ‘선함’이 좋다. 각박한 현실에 살면서 잊고 있었던 당연한 이치. 주인공의 말에 나까지 깨달음을 얻고 멍해지는 올바름. 천하제일 2권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훔친 물건은 당연히 돌려주어야 하고, 늙은 노모에게 줄 돈은 흥정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아주 기본적인 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잊고 사는 일.-
작중에선 주인공들이 도둑 무영신투와 협상을 해서 중요한 정보를 얻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무영신투는 이화운의 물건을 훔쳐갔고, 이화운은 무영신투가 그의 어머니께 드리려 했던 집문서를 갖고 있다. 무영신투는 막다른 길에 갇히자 훔친 물건을 돌려줄테니 살려달라고 빈다. 하지만 이화운은 미동도 않는다. “협상의 여지가 될 수 없다.”라고 딱 잘라 거절할 뿐. 그러면서도 무영신투의 집문서는 순순히 돌려준다. 그 집문서로 협박해서 무영신투의 입을 열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아닌 건 아닌 거니까.” 이화운의 말에 나는 잠시 멈칫 했다. 훔쳐간 물건과 모친을 위한 물건. 둘 다 당연히 주인에게 돌아가야 할 것들이었다. 다른 목적이나 조건이 붙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배운 도덕책에 따르면 그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이치를 삶에 직접 녹여 사는 사람은 드물다. 바른 사람들. 모두가 타락해도 설수린과 이화운 이 둘만은 언제나 깨끗할 것 같았다. 그만큼 천하제일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선하고 정의롭다. 주위 사람들까지 동화시키는 그 선함에 나도 중독됐다. 머리로 알고만 있을 뿐인 도덕을 몸소 실천하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낀 것이다. 현실에선 저렇게 살기가 힘드니까.
이 외에도 점점 깊어가는 두 주인공의 유대를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게 확장시키는 고도의 심리묘사라던가 한 명 한 명 눈에 들어오는 확실한 캐릭터성, 좀처럼 긴장을 놓을 수 없는 탄탄한 스토리 전개 구성 등도 배우고 싶은 점 중 하나이다. 특히 나는 소설의 구성 5단계-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을 이 책으로 실감한 사람이다. 이 글만큼 위기와 절정이 잘 드러나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스포일러가 될까봐 자세히 언급은 하지 않겠다.) 장영훈은 무림의 한낱 점소이(숙소 주인)라도 좋으니 그 세계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 작가 자신이 살고 싶은 세상을 쓰니까 그 애정과 열정에 독자 또한 무의식적으로 끌리는 것이다. 나 또한 천하제일을 읽으면서 이 우주 어딘가에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그 부분 또한 천하제일의 무서운 점이 아닐까 싶다.
이제 나는 이번 겨울방학을 지내면 고등학교 3학년이 된다. 고삼. 어느새 사회가 성큼 내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걸어오던 작가 외길 인생. 작가들이 모두 겪는다는 슬럼프와 나는 재능이 없는 것 같다는 자괴감과 포기를 나도 꼴에 창작을 한다고 여러 번 겪었다. 그럴 때마다 책장 한 칸을 전부 차지한 천하제일 9권이 굉장히 큰 존재감을 보여줬다. 나의 시작이자, 미래.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기억에 남는 작가가 되기를. 누군가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흔적을 남겨놓기를. 아아, 그들은 나의 길잡이별이었다.
내가 그랬듯이, 누군가 내 소설이 올라오는 날을 기다려줬으면. 글을 읽을 때만이라도 재밌다, 라고 생각해줬으면. 아무리 시간 때우기 용이라도 누군가의 시간 한 켠을 장식한다는 건 멋있는 일이니까. 문득 ‘아, 어떤 책이 좀 재밌었는데 이름이 기억 안 나네. 다시 읽고 싶다.’ 하고 잠깐이나마 추억해준다면 참 행복할 것 같다. 거기다 내 글을 읽고 웹소설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면 더욱 영광이겠지.
현재 천하제일은 글자로 종이에 묶여 책장에 꽂혀있다. 그곳엔 내 어린 시절과 꿈을 향해가는 여정과 정의가 넘쳐나는 무림이 뒤섞여 있다. 활자는 마지막이 있어도 그들의 시간은 계속 흘러갈 것이다. 내 소망까지 함께 품고서. 내게 있어 이 책이야말로 天下第一이다. 설수린과 이화운의 앞날을 축복하며,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도 축복하며, 이만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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