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발전하고 이야기의 주제도, 폭도 한 없이 넓어졌다. 이야기의 넓이만큼 독자층도 넓어졌으니 새내기 작가의 입장에서는 참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때로는 의문이 들었다. 매운 청양고추를 쫑쫑 썰어 넣고, 삼삼한 국물에 짭짤한 소금 한 스푼을 휘휘 저어 넣은 듯 자극적인 글들이 나날이 날아오르면 간결하고 담백한 글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으란 말인가?
내 물음에 답을 해준 것은 김정화 작가의 ‘승은궁녀스캔들’이다. 본 소설이 가진 재료는 참으로 풀어낼 이야기가 많은 조선시대 삼종 혈맥 속 왕과 궁녀의 사랑이야기로, 소설은 물론 드라마와 영화로도 많이 다루어지는 평범한 덩어리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정화 작가는 달랐다.
사실을 기반으로 풀어나간 이야기는 요즘 유행하는 여느 웹소설과는 달리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루하거나 무미건조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생각만으로도 간질거리는 생과방 궁녀와 세자의 밀고 당김의 기술로, 때로는 삼종의 혈맥을 두고 일어나는 치열한 왕궁의 암투로 담백한 내용에 재미를 더하니 어느새 잔잔하면서도 깊은 여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경종 즉위년 조선 왕조 실록에 실린 김씨 성의 궁인에서 여자 주인공 ‘김순심’을 떠올렸다. 짧은 재위 기간, 후사도 없이 개운치 못한 죽음을 맞이한 경종에게 한 줌 봄바람과 같은 설정이었다. 그녀는 익숙한 듯 새로운 캐릭터였다. 볕 한줌 들지 않는 팍팍한 궁녀에서 한순간 승은궁녀가 되는, 그러나 탄탄대로일 것 같은 그녀의 인생은 좀처럼 쉬이 풀리지 않는. 어찌 보면 후궁의 첩지도 받지 못한 인생이지만 그녀의 존재는 내명부면 내명부, 조정이면 조정 세자에게 제법 큰 조력자였다.
이야기속 주인공 순심과 윤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큰 존재였을까, 이야기하자면 실소를 터뜨리며 아니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봐야 배꼽 언저리에나 올 연못에 빠진 순심이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도 무심히 지나친 윤. 그것이 그들의 시작이었다. 게다가 순심은 친구 구월의 말에 세자 윤이 고자라는 망측한 오해까지 하게 되니. 사랑에 빠지기에는 참 민망스러운 첫인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만날 인연은 만나게 된다고 하던가. 순심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윤을 제 방으로 급히 들였고, 그렇게 순심은 세자를 모신 궁녀라 승은을 입게 된다. 하룻밤 몸을 섞지도 않은 채. 조용히 출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순심에게 승은궁녀가 되는 길은 탄탄대로의 길이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 사람 구실을 하며 살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생각해보라, 고자라고 소문난 세자의 후궁이 되고 싶은 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순심이 윤에게는 마냥 좋지 않았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많고 많은 장애물 사이를 비집고 나온 또 다른 장애물로 보였을지도. 윤은 여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남색이라는 둥, 고자라는 둥 해괴한 소문들이 세자의 뒤를 졸졸 따랐다. 그런데 이게 웬걸. 정신을 차리고 보니 행동 하나에도 예의주시를 하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노론대신들을 피해 숨는 곳이 순심의 처소가 되어버렸다. 몸이 가면 마음이 가고, 마음이 가면 몸이 간다고. 세자 윤이 승은 궁녀 순심에게 푹 빠져버린 것이었다.
이들은 참 묘한 사람들이었다. 한낱 고아 처지의 궁인인 순심은 노론 4대신들의 이목을 끌어 종종 조정에 오르내리는 것은 물론, 임금 숙종이 순심의 마음을 어여삐 여겨 친히 낙선당에 행차해 종종 담소를 나누고 그의 애묘 금손이를 부탁하기도 했다. 윤은 어떤가. 요부 장희빈의 아들이라 손가락질 받고, 하물며 자손을 잉태할 수 없는 몸이라며 대신들에게 압박을 받으면서도 삼종의 혈맥을 이어받아 왕이 되니. 혹자는 궁녀와 왕인 그들을 흔한 캐릭터라고 할지 몰라도 나는 그들의 생각에 도리질을 칠 것이다. 그들은 흔한 것이 아니라 순하고 담백한 순두부찌개와 같다고. 자극적이지 않은 소재와 역사의 흐름이 밋밋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너도 나처럼 어느 순간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에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시대극은 시대극만이 가질 수 있는 무게감과 성숙함이 있다. 그것을 잘 활용한다면 멋들어진 이야기를 펼칠 수 있지만,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극중 인물들의 갈등을 풀어나가야 하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는 작업이며, 서적들을 찾고 또 그 역사에 맞춰 실존인물과 허구의 인물을 적절히 조합하고……. 나는 그 고된 작업의 끝, 완결편을 모두 읽었을 때 김정화 작가가 펼치고자 했던 세상이 머릿속에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새로운 세상을 살아갈 그들의 이야기가 아쉬워 입맛을 다셨지만, 그 후의 이야기는 나 혼자 그럴듯한 상상으로 갈무리를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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