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램프의 아미나, 각자의 자리에서 활약하는 사막의 여자들>
저는 작품이나 작가님의 성향에 대한 별다른 배경지식이 없는 채로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막이고, 주인공 캐릭터가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요정을 모델로 한 마법사라는 사실 정도만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이 소설의 배경 세계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주의 깊게 만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형적인 중~근세 유럽풍이 아닌, 비교적 덜 흔한 배경을 무대로 한 로맨스 판타지(혹은 여주 판타지) 소설도 다양하게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습니다.
하지만 사막 배경의 소설은 그다지 많이 읽어보지 못했었는데, 물론 여기에는 제가 그러한 작품을 아주 적극적으로 찾아보지는 않았던 탓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하나 더 있었어요. 그건, 사막을 배경 삼은 판타지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극도로 성차별적인 사회구조였습니다. 머리카락이나, 그리고 자주 얼굴까지를 감추는 복식을 갖춘 채로만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여자들(그 사회의 남자들은 그러지 않는데도요), 일부다처제와 술탄의 하렘…….
그런 사회구조를 묘사하는 이유 자체는 작품마다 다양하겠지만, 저는 저런 문화를 조금도 매력적으로 느낄 수 없습니다. 차별에 대해 비판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면, 그리고 혹시라도 여권이 극도로 낮은 사회를 낭만화하겠다는 의도로 등장했다면 그 작품을 긍정적으로 읽을 수는 없을 것 같고요.
그래서 <램프의 아미나>가 무척 반가웠습니다. 이 소설에는 그 수가 무척 많고, 또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 캐릭터들이 등장해요. 주인공이며 옛 파즈의 마법사인 아미나뿐만 아니라, 조연으로도 수많은 여성들이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근위대장 비스마, 집사 야즈민 부인, 치료사 프리마베라, 연금술사 두니아, 술탄보다 더 큰 권력을 가졌다는 금태수 와루다와 그의 여동생인 감찰사 와시카, 태수 멜리크, 그리고 등장한 분량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는데도 존재감이 상당했던 열사공 가디야트까지.
워낙 수가 많다 보니 제가 몇몇을 빼먹었을지도 모르겠네요. 궁의 고용인들, 그러니까 흔히 ‘시녀’로 불리는 캐릭터들마저도 전형적이기만 한 모습이 아니라 자기만의 생각과 삶을 가진 사람들로 묘사되었던 것 같습니다.
저렇게, 여성들이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활약할 수 있는 사회라는 점에 대한 설명도 소설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고요. 파즈 수뇌부의 인원 중 절반 정도가 여성이라거나, 여성도 술탄이 될 수 있는 사회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소설의 현재 시점에서는 이미 고인이어서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남자 주인공의 어머니 역시 금태수 와루다와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했으나 그렇지 않았다면 술탄이 될 수도 있었던 공주였지요.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점이 굉장히 새롭고, 또 편안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저에게 사막이 배경인 판타지 소설을 읽고 싶다고 말하면 저는 이 소설을 제일 먼저 추천하게 될 것 같아요. 여성 독자에게 있어서 불편함 없이 즐길 수 있는 소설이라는 게 얼마나 큰 가치를 가지는지, 이러한 점에 대해 단 한 번이라도 고민해본 적 있는 독자라면 아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불필요하거나 과도한 성차별, 혹은 여성 멸시적 관점 때문에 생기는 불편함이 없다는 게 제가 이 소설에서 발견한 유일한 가치는 아닙니다. 여전히 그게 아주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요. 이야기 자체로도 아주 재미있었고, 주인공이 처한 상황 때문에 함께 긴장하게 되었고, 어떤 인물이 가진 포부를 진심으로 응원했고, 큰 비밀이 밝혀질 때마다 놀라며 읽었습니다.
주인공의 앞길이 아주 술술 풀리지만은 않는 소설이었고, 아미나가 결국 대단한 일을 이루기는 했지만 소위 말하는 ‘먼치킨 캐릭터’로 보이지는 않아서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저도 함께 긴장하게 되었는데 이런 점도 좋았습니다. 모든 일이 쉽게만 풀리는 소설보다는 이런 소설을 더 좋아하는 편이어서요.
그리고 여성 조연들이 모두 굉장히 매력적이어서 한 명만 고르기가 쉽지 않지만, 10대 여성이며 선천적 장애 때문에 휠체어를 사용하는 인물인 태수 멜리크를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캐릭터가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로도 의의가 있는 데다가, 인간적으로도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였거든요.
이 작품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지만, 여기서 미리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못 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 감상문을 먼저 읽은 뒤에 <램프의 아미나>를 읽어보실 독자분이 있다면, 꾸준히 등장하는 “타도와 변혁”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해보시길 권합니다.
저에게는 이 소설의 존재 자체도, 사막 배경의 창작물들에 관습적으로 존재해 온 어떤 구태에 대한 타도와 변혁으로 느껴졌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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