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란 무엇일까요? 사전적으로는 곡식과 채소, 과일을 심고 길러 수확하는 것이고, 그와 직접적으로 상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닭과 소, 돼지 같은 가축들을 키워 알과 젖, 고기 등을 얻는 것까지도 농사를 짓는 사람이 하는 일에 포함되곤 합니다. 아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식생활을 농사에 의존하고 있겠죠. 하지만 그런 농사가 로맨스 판타지 소설의 주요 소재가 된다는 발상을 해 본 사람은 아마 드물 것 같습니다.
이 소설, <황제궁 옆 마로니에 농장>의 주인공 헤이즐은 몰락한 귀족 가문의 소녀이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농부입니다. 헤이즐이 자신의 재능을 알게 된 것은 여덟 살, 도박꾼인 할아버지가 먼 도시의 도박장으로 떠나면서 그녀를 맡겼던 한 농장에서였죠. 자신의 의외의 재능을 깨닫고, 헤이즐은 농장과 그곳의 주인 마틴 가족을 깊이 사랑하게 되며 행복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 행복은 반 년 후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결국 농장을 떠나면서 끝나지만, 헤이즐은 언젠가 꼭 이런 농장을 소유하고 행복하게 농사를 짓는 농장주가 되겠다는 일생일대의 결심을 하죠.
본격적인 이야기는 그로부터 11년 후 시작됩니다. 헤이즐이 한 도시의 은행원으로 일하면서 단조롭고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또 어딘가로 떠났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나타나서 하는 말, “네 앞으로 농장이 생겼다!” 웬일인가요, 할아버지가 나라의 수도 한복판에 텃밭이 딸린 작은 집 하나를 갖고 있었고, 사흘 안에 찾아가지 않으면 주인 없는 땅이 되어 빼앗겨 버린다는 겁니다. 할아버지의 말이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일단 농장이라는 생각에 헤이즐은 곧바로 수도로 가는데… 그런데 또 웬일, 그 집은 다름아닌 신축중인 황궁 한복판에 있지 않겠습니까. 다시 말해, 할아버지는 황제를 상대로 알박기라는 말도 안 되는 도박을 한 것이죠. 그런데 더 웬걸, 헤이즐은 상대가 황제건 누구건 반드시 이 농장을 지킬 거라고 결심하고 황궁 한복판에서 농사짓기라는 사상 초유의 사건을 벌입니다.
소설의 남자 주인공, 갓 즉위한 젊은 황제 이스칸다는 물론 노발대발합니다. 어떻게든 헤이즐을 자신의 황궁 한복판에서 쫓아내려고 애를 쓰고 측근들 역시 그 뜻을 받들어 헤이즐에게 은근히 압박을 가하죠. 하지만 헤이즐은 그런 사람들에게 호의 어린 대접을 베풀고, 헤이즐의 진심을 알게 된 황제의 측근들은 그녀가 융통성 없는 젊은 황제에게 변화를 가져다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헤이즐을 쫓아내겠다고 간 사람들이 모조리 그녀의 편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본 이스칸다는 변장을 하고 직접 나서지만, 어쩌다 보니 헤이즐의 페이스에 휘말려 점점 그녀를 돕게 되죠. 황궁 한복판의 농부 아가씨와 변장한 황제가 황실과 귀족 사회의 여러 가지 사건을 함께 겪으며, 둘 사이에는 점점 로맨스도 싹트기 시작합니다.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개성은 확실히 소설을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입니다. 오로지 농사와 요리만으로도 어떤 문제든 척척 해결해나가는 헤이즐,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지만 어쩐지 그 때문에 여러 개그 씬을 만들어내는 이스칸다, 그리고 헤이즐의 영향을 받아 점차 변화를 겪는 대신과 성기사단장 같은 주변 인물들 모두 저마다 예상치 못했던 강렬한 매력을 뿜어냅니다. 그리고 유머러스하면서 유려한 문체가 그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죠. 이야기가 어찌나 자연스럽게 흘러가는지, 150화가 넘도록 헤이즐이 변장한 이스칸다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데도 답답하기는커녕 어떻게 정체를 알게 될까 오히려 두근거리며 읽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마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헤이즐의 요리를 닮았습니다. 저마다의 맛을 지닌 재료들이 헤이즐의 솜씨를 통해 맛있는 요리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는 것처럼, 이 소설은 제각기 개성있는 등장인물들이 훈훈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어 독자들이 자꾸만 페이지를 넘기고 싶게 만듭니다.
사실 아쉬운 점도 없잖아 있기는 합니다. 헤이즐의 농사짓는 재능, 일명 ‘태양의 손’이 프롤로그에서는 이야기를 풀어나갈 대단한 열쇠처럼 보이지만, 본편에서 그 역할은 크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요리 솜씨가 만능 해결책에 가깝죠. 태양의 손이 다시 언급되는 것은 꽤 후반부의 일이라, 태양의 손을 기대하고 소설을 읽는다면 조금 곤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하나 아쉬운 부분이라면 이스칸다의 아버지 선황과, 선황의 총희였던 악녀 카밀라의 음모가 이야기의 전면에 나설 때는 약간의 이질감이 든다는 것입니다. 물론 앞에서부터 복선이 차근차근 깔려 있어 아주 뜬금없는 것은 아니고, 작가의 필력 덕분에 그들의 음모를 풀어나가는 이야기 역시 추리소설 같은 스릴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앞까지의 이야기가 워낙 따뜻하고 귀여운 분위기로 흘러가다 보니, 뒷부분의 어두운 이야기로 넘어가면서 약간 어라, 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소설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거친 암투나 치밀한 음모, 자극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소설들을 읽다가 귀엽고 아기자기하며 마음을 잔잔하게 해 주는 소설이 읽고 싶어진다면, <황제궁 옆 마로니에 농장>은 분명 좋은 선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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