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숲에서 약재를 구해보자
늘푸름 마을의 이름이 늘푸름 마을인 이유는 도시 윗쪽(북쪽)에 방대한 규모로 유명한 늘푸름 숲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대도시로 분류되는 파랑 도시를 4개나 합쳐 놓은 것만큼이나 큰 서부 최대의 숲인 이곳은, 늘푸름 마을과 마찬가지로 식물들이 365일 내내 푸르름을 뽐냈다.
다양한 종류의 동, 식, 괴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엘프나 트롤, 인간 등의 고등 종족들도 군데군데 무리지어 살고 있었다.
숲 안쪽은 마치 미로처럼 꼬불꼬불하고 복잡해서 숲을 가로질러 건너려면 최소한 2~3일은 걸렸다.
이런 늘푸름 숲에 붉은머리 청년 춘회와 열 살짜리 금발소녀 크리스가 방금 발을 들여놓았다.
현재 시각은 오전 9시.
사람이 가장 마음 놓고 늦잠을 잘 수 있는 토요일의 아침이다.
두 사람은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싱그러운 아침햇살을 맞으며 늘푸름 숲의 산책로를 나란히 걷는다.
<짹짹 - 찌르르르르>
새들은 즐겁게 지져귀고, 나무들이 내뱉는 맑은 공기는 두 사람의 허파를 시원하게 환기시켜 준다.
조금 무성한 오솔길을 걷는 기분이랄까?
아직까진 초반이라 그런지 앞길을 막는 멍청한 몬스터도 없고 평화로운 분위기다.
"캬하~ 간만에 숲에 오니까 고향에 온 게 실감이 나는구만."
춘회가 두 팔을 머리 위로 주욱 펴며 기지개를 켠다.
그러나 꼬맹이 크리스는 언제나 오는 곳이라 별다른 감흥이 없는 모습이다.
보육원 건물이 늘푸름 숲과 인접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유리구슬처럼 생긴 푸른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자기 실력을 뽐낼 상대가 없는지 탐색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버섯이나 작은 새 정도만이 포착될 뿐이다.
20~30분 정도 걸었을까.
조금씩 숲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큰 나무들이 햇빛을 가리는 바람에 주위가 어두컴컴해졌으며, 갈래 길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한쪽은 정부에서 지정한 공식 산책로(라기엔 조금 크고 길지만...)고, 다른 한쪽은 넓은 초지로 이뤄진 사냥터 구역이다.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산책로에선 약사 할아버지가 적어준 재료들을 발견할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사냥터 초지로 들어간다.
"크리스,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이제부터 몬스터들이 본격적으로 들이닥칠 거야."
붉은머리 미소년이 금발꼬마를 향해 손을 내민다.
그러나 크리스는 자상한 그 손을 파리채 휘두르듯 '찰싹' 쳐낸다.
"흥. 어린애 취급하지 말라구. 숲이라면 나도 잘 아니까."
도도한 공주님 크리스 세이비어.
그녀는 오리처럼 입을 삐죽 내밀고는 혼자 앞장서서 사냥터의 풀숲을 헤치고 나아간다.
춘회는 맞은 손등을 문지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어이구, 저 성질머리하고는..."
그리고는 크리스의 뒤를 따라 초지를 뒤지기 시작한다.
촘촘히 깔린 풀들 사이에서 상록초와 산딸기를 찾는 두 사람.
상록초는 깻잎같이 생긴 넓은 잎사귀가 3장씩 모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짙은 녹색의 식물은 늘푸름 숲에선 흔하게 발견되는 풀이었지만, 이외의 다른 장소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금세 죽어 버리는 신기한 식물이었다.
산딸기는 현실에서의 산딸기와 똑같다.
빨갛고 조그맣고, 남자한테 참~ 좋다.(?)
몇 분 정도 식물채집을 했을까?
갑자기 크리스가 날카롭게 비명을 지른다.
"꺄악!"
"무슨 일이야?"
춘회가 얼른 뒤돌아본다.
그의 눈에 사람 키 만큼 거대한 말벌 3마리가 금발소녀를 향해 날아드는 광경이 보인다.
'부우우웅'하는 벌들의 날갯짓은 헬리콥터 소리 만큼이나 세찼으며, 노랗고 검은 줄무늬 배 끝에 달린 독침은 날카로운 단검을 연상시킨다.
말벌들은 벌써 크리스와 2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와 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손을 앞으로 뻗으며 마법을 시전한다.
"저, 저리 가!"
<위이이>
크리스의 손에서 아지랑이 같은 공기의 파장이 쏘아져 나간다.
같은 반 아이들을 모두 쓰러뜨렸던 '염동력' 공격이다.
<퍼억. 퍽>
염력 뭉치는 말벌 두 마리를 때린다.
한 마리는 머리에 맞고 잠시 움찔하며 동작을 멈추고, 다른 한 마리는 날개에 맞아 중심을 잃고 땅에 떨어져 뒹군다.
그러나 염력에 맞지 않은 마지막 한 녀석이 문제다.
그 말벌은 꽁무니의 독침을 앞세운 채 크리스의 가녀린 목을 겨냥해 날아온다.
공포에 질려 사색이 되는 금발머리 소녀.
그러나 파랑 도시 최강의 고등학생 오빠가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리가 없다.
그는 붉은머리가 뒤로 흩날리도록 빠르게 말벌의 등 뒤로 이동한 뒤, 전매특허인 개량형 파이어볼을 날린다.
"열화 폭염탄!"
<퍼엉>
작렬하는 화염구와 함께 산산조각 터져 버리는 말벌.
춘회는 내친김에 기력을 회복해 다시 덤빌 준비를 하는 다른 두 마리의 말벌도 발로 '뻥! 뻥!' 걷어차 황천길로 보내 버린다.
말벌 퇴치를 마친 춘회가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하며 크리스에게 묻는다.
"괜찮니, 크리스?"
"응..."
크리스가 들릴락 말락 한 모기 목소리로 웅얼거린다.
그녀는 도움을 받은 것도 짜증났지만, 순간이나마 붉은머리 오빠에게 가슴 설렜다는 게 제일 짜증난다.
"도와주지 않았어도 내가 처리할 수 있었겠지만... 아, 암튼 고마워..."
"천만에! 앞으로는 내 옆에 꼭 붙어 다니라구."
춘회가 경쾌한 목소리로 말한다.
고맙게도 비약의 재료를 몸속에 지니고 있는 거대 말벌들이 몸소 찾아와 쓰러져 줬으니, 춘회는 즐거운 마음으로 불타지 않은 말벌 두 마리의 배를 갈라 독침과 독주머니를 꺼낸다.
"우와, 엄청나게 크다!"
춘회가 거대 말벌의 독침을 손에 들고 감탄한다.
배에서 직접 뽑은 독침은 거의 중형 도검(칼)만큼이나 길고 날카로웠다.
독주머니도 엄청 커서 웬만한 요강만 하다.
그는 즐겁게 휘파람을 불며 전리품들을 가방에 집어넣는다.
위기를 넘기고 다시 식물채집에 들어가는 두 사람.
상록초와 산딸기는 이제 넘치도록 많이 모았다.
그들은 자리를 옮기기로 한다.
춘회와 크리스는 두 시간 정도 숲속의 나무와 초지를 뒤지며 약재상 할아버지가 써준 재료들을 모았다.
중간중간 몬스터의 습격도 있었다.
머리는 개고 몸뚱이는 인간 같이 생긴 코볼트들이 억센 무기와 연장을 들고 덤벼들거나, 아까 같은 거대 말벌들이 날아들고, 나무 사이에 끈끈한 줄을 치고 도사리는 큰 거미와 조우했으며, 펼친 날개 길이가 2미터는 되는 거대 비둘기의 공습을 받는 등등 아찔한 상황들도 펼쳐졌다.
그러나 상급 던젼을 밥 먹듯 깨고 다니는 붉은머리 미소년에겐 애들 장난감 인형하고 싸우는 것만큼이나 쉬운 상황들이었다.
"열화 폭염탄!"
<펑>
원샷 원킬, 또는 원샷 올킬...
춘회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크리스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경이로운 전투능력이다.
'흥... 빨강 바보. 조금, 아주 조금은 대단할지도?'
그들은 잠시 후 나타난 평평한 공터에서 점심도 먹을 겸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춘회가 가방에서 미리 사둔 편의점 음식들을 꺼낸다.
네모난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불고기 도시락과 비닐에 싸인 직각 삼각형 햄애그 샌드위치가 메뉴다.
고기를 좋아하는 육식남 춘회가 불고기 도시락을 먹고, 우아한 귀족의 자제 같은 크리스는 샌드위치를 먹는다.
<와구와구>
몰아치는 폭풍의 기세로 도시락을 공략하는 춘회.
반면 크리스는 기품있게 귀퉁이부터 샌드위치를 조금씩 베어 먹는다.
식사를 하는 도중, 크리스가 줄곧 궁금해 왔던 걸 묻는다.
"춘회, 어째서 늘푸름 마을의 비약을 만들려는 거야?"
진지한 푸른색 눈동자로 춘회를 바라보는 크리스.
붉은머리 미소년은 '꼬맹이는 어쩌구' 하면서 또 무시하려다가 맘을 고쳐먹는다.
어쨌거나 그녀는 춘회의 여동생인 데다가, 여기까지 함께 온 노고를 생각하면 대답해 주는 게 도리였기 때문이다.
그는 도시락을 먹던 걸 내려놓고는 묵묵부답이었던 입을 뗀다.
"사실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픈 것 같아."
"아픈 것 같다고? 확실히 어디가 아픈지는 모르고?"
"응."
"허?"
크리스가 묘수에 걸린 복덕방 아저씨처럼 헛웃음을 짓는다.
"그럼 아픈지 안 아픈지도 확실하지 않은 거야?"
"응. 그치만 만약을 대비해 약을 지어다 주려고. 늘푸름 마을의 비약은 내가 아는 한 최고의 만병통치약이거든."
"야, 이 멍청아! 그럼 동네 병원에 데려가면 되잖아? 먼저 진찰부터 받으라고. 니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은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벼룩을 대비해서 초가삼간을 미리 태워버리는 짓이나 마찬가지라구!"
"크리스, 네 말대로 내가 오버하는 걸지도 몰라."
춘회가 돌연 진홍빛 눈동자에 힘을 넣으며 크리스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한다.
그 순수하고도 올곧은 눈빛에 흠칫하며 얼굴을 붉히는 크리스.
"뭐, 뭘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야? 빨강머리 바, 바보가..."
"너는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내 여자에게 최고의 것을 주고 싶은 게 남자의 마음이야. 이건 어쩔 수 없어. 날 바보라고 불러도 좋아. 그래도 난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화끈)"
낯간지러운 대사다.
기교도 세련됨도 없는 투박한 사랑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크리스는 '대체 어떤 여자길래 장난꾸러기만 같았던 오빠를 사랑의 노예로 만든 걸까?'하고 그 정체를 궁금해한다.
간단히 점심식사를 마친 춘회와 크리스는 계속해서 약재를 모아 나간다.
초지 사이사이에서 발견되는 상록초와 산딸기는 이제 충분히 많이 모았기 때문에, 그들은 잎과 가지가 무성한 나무 사이를 뒤져 본다.
동충하초와 오색나비의 고치를 찾기 위해서인데, 둘 다 희귀한 것들이라서 오래된 고목 주위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탐색을 시작한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 붉은머리 미소년이 환호성을 지른다.
"찾았다!"
"어디어디?"
반대편을 뒤지던 금발소녀가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온다.
그리고는 춘회의 손에 고히 들려 있는 매미 모양 동충하초를 보고 기겁을 한다.
"으엑, 징그러!"
'징그럽다'는 표현은 아주 적절했다.
괴상한 기생충 같은 것이 매미의 등을 뚫고 나와 마치 산호처럼 퍼져 있는 그 생김새는 분명 징그러웠던 것이다.
춘회는 여동생의 그런 반응이 재밌어서 동충하초를 그녀의 얼굴 근처에 갖다 대며 위협 놀이를 한다.
"워~워~ 난 동충하초. 너의 볼따구(뺨)를 파고 들겠다!"
"꺼져. 아, 저리 치우라구!"
<위이잉>
짓궂은 장난에 화가 난 크리스가 염동력 뭉치를 쏘아 춘회의 복부를 공격한다.
"우왁!"
예상외의 바디블로를 맞은 붉은머리 미소년이 맹장염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배를 움켜쥐고 뒤로 비틀거린다.
쪼꼬만게 제법 매서운 데가 있는 꼬마 공주님 크리스다.
춘회는 매미 모양 희뿌연 동충하초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다시는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아우우... 배야... 동충하초까지 모았으니 이제 남은 건 오색나비의 고치 하나로군."
고치는 꼭 누에고치와 닮은 크고 하얀 실뭉치다.
하지만 다른 고치들과는 달리 오색나비의 고치에서는 색색의 형광 빛이 마치 스며 나오듯이 비친다.
오색나비는 이름 그대로 다섯 색깔을 가진 예쁜 나비이기에 애벌레 시절부터 화려한 색을 내뿜는다.
그래서 고치에 들어갔을 때도 빛이 나는 거다.
그런데 오색나비의 고치만은 아무리 숲속을 뒤져도 보이지가 않는다.
계절을 타지 않는 숲의 늘 푸른 생태 때문에, 고치에 들어가 번데기인 채로 부화를 기다리는 오색나비나, 이미 탈피해 껍질만 남은 고치가 있을 만도 한데 말이다.
1시간쯤 지나자 크리스가 짜증스레 투덜거린다.
"이놈의 고치는 대체 어딨는 거야? 어유 정말... 내가 황금 같은 토요일에 저런 빨강머리 바보랑 보물찾기나 하고 있어야 되다니..."
"난 따라오라고 말한 적 없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음 돌아가."
"흥. 누, 누가 돌아가고 싶대? 너보다 빨리 고치를 찾아내서 나의 우월함을 증명해 보이겠어."
"네~ 네~ 초딩님하."
춘회가 도도한 척 팔짱을 끼고 입을 셀쭉 내밀고 있는 귀여운 금발소녀를 조롱한다.
그러자 크리스가 또 못된 성깔을 드러내며 오빠를 향해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을 해댄다.
<투닥. 투닥. 퍽. 퍽>
"이잉~ 초딩이라고 하지 말란 말야!"
"아, 알았어. (초딩 아님 뭔데...) 근데 우리 좀 더 깊은 곳에 들어가 봐야겠어. 이미 사람들이 고치를 다 털어갔나 봐."
"하, 하지만 숲속 깊은 곳에는 괴물이..."
크리스가 모기처럼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불안해한다.
그런 여동생의 머리를 오빠인 붉은머리 소년이 쓰다듬어 준다.
"걱정마 크리스, 내가 옆에 있으면 아무 일 없을 거니까."
"그래... 별로 못 미덥긴 하지만... 알았어."
"그럼 곧장 출발!"
춘회가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들며 외친다.
그들은 다음 갈림길에서 숲속 깊은 곳으로 통하는 길을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