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으윽, 머리야. 도대체 얼마나 마신거야?”
동원이 잠에서 깨어났다.
물을 찾던 동원의 눈앞에 화사한 분홍빛 커튼이 보였다.
고개를 내려다보니 이불도 분홍빛이었다.
놀라서 방을 둘러보니 온통 파스텔 빛 분홍색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 일까?
똑똑
밖에서 노크 소리가 나더니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흠흠. 일어났으면 아침 먹으로 나오세요.”
동원은 서둘러 옷을 찾아 입었다.
나름 체격이 큰데 누가 이렇게 속옷만 남기도 싹 벗겼는지 당황스러웠다.
문 밖에 나가니 거실 한 가운데 남자 여섯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시인의 아버지는 동원에게 한 번 웃어주며 계속 식사를 했고,
어제 본 요리사 3명도 살기 어린 눈빛이 사라지고 반가운 눈인사를 했다.
섬에서 한 번 본 시인의 큰 오빠 가수도 가볍게 목인사를 했다.
단지 누군지 알 수 없는 한 남자가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동원을 계속 훑어보고 있었다.
“죄..죄송합니다. 일단 화장실좀..”
“왼쪽에 현관 옆에 있어요. 편히 쓰세요.”
수철이 얼른 방향을 가리켰다.
도망치듯 화장실로 간 동원은 얼른 찬 물로 세수를 했다.
뭐가 뭔지 정신이 없었다.
시인과 계속 술을 주고받으며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시인이 갑자기 아빠가 안 보인다며 소리를 쳤고
동원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고 사라졌었다.
어느 새 자신은 4각 테이블에 남자 다섯 명과 함께 앉아 술을 마셨었다.
그 뒤로 기억이 없었다.
“형도 어제 같이 마셨다고? 왜 나만 빼고!”
“내 병원 마치고 왔더니 이미 판이 벌어졌는데 뭐. 니는 어제 어디 갔었노?”
“아, 진짜! 당장 전화 했어야지! 어제 야간 마라톤이 있어가지고! 아 진짜! 남자는 이 정선수가 봐야 하는데.. 다들 제대로 봤어?”
“내가 봤는데 인간은 돼 보이더라.”
치수가 말했다.
“돈도 잘 벌걸?”
기원이 말했고,
“난 저 형 마음에 들어.”
수철이 말했다.
“시인이한테 마음이 있나 없나 술 한 번 멕여 봤다. 선수 니는 아침밥이나 무라.”
“아! 아부지도 진짜! 그새 마음 준 거 아니죠? 진짜 그러면 안된다니까!”
동원이 어느 새 조금 깔끔해진 모습으로 거실로 나왔다.
“자네 여기 앉아서 아침 밥 먹게. 해장하기에는 시원한 무동태국 만한 게 없어. 한 그릇 하고 가게나.”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동원이 선수의 옆 자리에 앉으며 눈치를 봤다.
“정선수입니다. 시인이 작은 오빠. 예예, 우리 집안 이름이 예체능입니다.”
“이동원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형님은 지난 번에..”
“기억 안 나겠지만 어제 인사 다 했습니다. 식사 합시다.”
가수가 밥을 먹자 다시 다들 국물을 들이켰다.
그 때 갑자기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빠아~ 나 왜 아빠 방에서 자고 있어요? 아, 머리 아프다. 무울! 물이 어딨지?”
거실로 시인이 등장했다.
남자 7명의 시선이 시인을 향했다.
2리터짜리 물병을 입에 물고 머리를 산발한 채
거실을 둘러보던 시인은 동원을 발견했다.
시인은 배를 벅벅 긁고 있던 손을 슬며시 뺐다.
물 마시던 것도 조용히 멈추더니
물통을 안고 돌아서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시인 아버지가 기침을 했고, 나머지 남자들은 모두 킥킥대며 웃기 시작했다.
동원은 웃으면 안 될 것 같아 웃음을 참느라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녀는 술 취한 다음 날도.... 예뻤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폐를 많이 끼쳤습니다. 다음에.. 다음에 다시 제대로 오겠습니다.”
“그래, 가게. 시인이한테는 따로 연락해보게.”
시인의 아버지께 인사를 하고 많은 오빠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시인은 동원이 나갈 때 까지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문 앞에 서서 동원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어 전화를 하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네, 박감독님.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네네. 알고 보니 아는 가게더라구요. 네네. 오늘 서울 먼저 올라가십시오.”
택시를 잡아 탄 동원은 해운대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깔끔하게 몸단장을 했다.
1박 2일 일정으로 온 터라 갈아입을 옷도 마땅치 않았다.
일단 옷을 사야 했다.
동원은 서둘러 백화점을 향했다.
시인은 죽을 것 같았다.
어제 동원과 함께 하하 호호 떠들며 재밌었던 것 같은데
자기가 뭐라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울을 보며 아까 이 모습을 동원이 봤을 생각을 하니 정말 죽고 싶었다.
자기를 놀리는 선수와 몸싸움을 하고,
아빠한테 징징거렸지만 아무도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들 출근하고 시인만 집에 남아 애꿎은 쿠션만 때리고 있었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헉.. 동원이었다.
시인은 어쩌지, 어쩌지 하며 심호흡을 했다.
“여보세요. 네. 작가님. 아깐..”
“시인씨, 아침에 제가 너무 정신이 없어서 인사도 못했어요. 속은 괜찮습니까?”
“네.. 아까는.. 원래..”
“빨리 씻고 나와요. 다 준비되면 전화해요.”
동원은 자신의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시인은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다가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시인의 옷장에서 옷이란 옷은 다 꺼내졌다.
이 옷, 저 옷 대어보던 시인은 하늘 하늘한 하늘색 원피스를 골라 입었다.
섬에서는 동원과의 씨름 이후로 치마 한 번 입지 않았으니
오늘 시인의 모습은 동원이 처음 보는 모습일 터였다.
하필 어제 술을 먹어서 피부가 푸석거리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지만
전신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던 시인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흰색 하이힐을 신고 집을 나섰다.
대문을 나와서 동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이이잉
바로 옆에서 진동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동원이 차에 기대어 서서 시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어떻게?”
“아침에 렌트부터 했습니다.”
탄탄한 가슴근육이 드러난 남색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
가벼워 보이는 스니커즈까지.
마치 맞춤옷처럼, 동원에게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말그대로 멋있었다.
저 남자랑 같이 다닐 생각을 하니 시인은 괜스레 우쭐해지는 것 같았다.
“갑시다.”
동원이 차 문을 열고 시인을 기다렸다.
"고마워요."
시인의 수줍은 인사에 동원이 미소를 지었다.
운전석에 올라 출발하기 전 동원이 말했다.
"시인씨 뒤에 태울 걸 그랬습니다."
"왜 그러세요?"
"룸미러로 계속 보면서 운전하고 싶어서요."
"어머머, 작가님. 닭살이예요! 왜 이래요?"
시인이 비명을 지르며 웃었다.
동원도 웃었다.
둘 다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