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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아프다······.”
점심때부터 시작됐던 위통이 10층에 위치한 이사장실을 두어 번 다녀오고 난 후엔 허리를 접을 수 없을 만큼 심해졌다. 숨조차 쉴 수 없는 통증.
퇴근까지 아직 네 시간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지만 이미 몸은 한계치를 넘은 상태.
비명조차 안 나올 것 같다.
“이럴 때 좀 나타나 주면 어디 덧나나?”
사라져가던 그를 향한 섭섭함이 다시금 스멀스멀 올라오려고 한다.
눈물이 찔끔.
드르륵-!
혹시나 싶어 열어 본 서랍은 소화제를 포함한 위장약과 비상시에 먹을 어떤 약도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거기다 젠장 맞게도 오늘은 토요일.
주말이라 병원 약국은 물론이거니와 외부의 약국들까지 열린 곳이 없고, 근처의 편의점과 마트에서는 비상약을 취급하지 않는다.
지금 나는 밖에 잠깐도 나갈 수 없이 바쁜 처지라 엎친 데 덮치고 덮친 데 더 덮쳐버린 것만 같다.
아픔에 자꾸만 서러워지자 마음도 더 약해지고 힘없는 목소리엔 축축한 물기마저 느껴진다.
“하필이면 약도 없냐. 서럽게. 하······.그나저나 이 서류들은 어쩐다냐.”
눈앞이 캄캄해진다.
약은 없고 힘들어서 지치는데 내일까지 꼬박 야근을 해도 줄어들지 않을 것 같은 서류.
내일이면 줄어든 것보다 많은 서류가 다시 채워질 것이라는 사실에 평소보다 더욱 기가 질려서 숨이 턱턱 막힌다.
“집에 가고 싶어. 집에 보내 줘. 집에······!”
평소엔 지겨울 정도로 복지실 문을 두드리던 사람들도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조용하기만 하다.
이렇게 아플 땐 평소 귀찮던 사람들이라도 방문 해주면 좋으련만. 우연히 문을 열고 들어와 고통에 허덕이는 나를 발견하고, 약이라도 챙겨주면 좋으련만······.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했던가?
다른 날엔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무작정 밀고 들어오던 사람들이면서 정작 필요할 땐 발길을 뚝 끊어버린다.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자신들 필요할 때만 극성스럽게 매달리는 사람들.
사회복지사가 된 것을 진심으로 후회 한 적이 없었음에도 오늘 같은 날은 정말 사회복지사가 된 자신이 원망스럽고 후회가 된다.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약 챙겨 오는 사람 하나 없냐고~오! 아, 아야야야.”
일하다 엎어지고, 엎어졌다가 다시 일하는 것을 몇 번쯤 반복했을 무렵,
나는 불현 듯 참을 수 없이 무서워졌다.
[모 병원의 사회 복지사 H모 양.
과중한 업무 스트레스와 급체로 돌연사.]
이런 헤드라인이 느닷없이 머릿속을 스치자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온다.
“헤드라인 한번 더럽게 심란하네. 아이고, 아야야.”
우스운 뉴스의 주인공이 되긴 싫다.
나는 억지로 힘을 내어 기다시피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곧바로 보이는 이상한 광경.
“뭐해요? 다들?”
“응. 왔어?”
삼삼오오 병원 창문과 유리문 틈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몇 명은 신기한 표정. 또 몇 명은 황홀한 얼굴로. 또 대개는 광기가 느껴질 만큼 팬심이 가득한 모습이다.
“대체 밖에 뭐가 있기에······. 촬영?”
“드라마 촬영 한 대. 웹 드라마. 유명 배우가 오늘부터 일주일동안 여기서 병원 신을 찍는다잖아.”
좀처럼 볼 수 없는 유명 배우의 드라마 촬영에 신이 나신 치매 할머니가 전에 없이 멀쩡한 말투로 말하신다.
‘저 할머니는 항상 넋 놓고 계시던 분이신데······.원래 저렇게 말을 잘 하셨나? 어라? 오늘은 꽃단장까지 하셨네?’
할머니는 첫사랑 청년을 몰래 쳐다보는 봄 처녀마냥 수줍어하며 바깥을 응시하다가 곱게 칠해진 진분홍 손톱을 자랑하는 등, 매우 즐거운 모습이었다.
대부분의 병원 사람들이 평상시에 약간씩은 무기력하고 그늘진 얼굴을 하고 있던 걸 생각하면 선뜻 지금의 분위기를 방해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 같이 기쁨에 차 있다.
‘저런 사람들한테 비상약 있냐고 물어보면 내가 나쁜 년이 되겠지?’
결국 나는 힘겹게 비상약을 구걸하러 나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하는구나 싶었다.
아마 무심결에 창밖을 쳐다보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누군가와 마주보고 서서 촬영을 하는 익숙한 얼굴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 익숙한 얼굴이 몇 달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빌어먹을 누군가가 아니었다면,
난 아마 죽게 아프던 말든 간에 복지실로 다시 기어들어갔을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러지 않고 익숙한 얼굴이 촬영하는 곳을 쳐다보았고,
그 순간 또 다행스럽게도 촬영하던 익숙하고 야속한 인물 역시 나를 쳐다보았다.
“아······.아파. 어지러워.”
안심이 되어서였을까?
나는 바닥에 거의 고꾸라지는 것처럼 사정없이 비틀거렸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날다시피 창문을 뛰어넘으며 그가 들어오는 모습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망막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왔어요? 늦어도 너무 늦는다. 섭섭하게.”
“어디 아파?”
그가 사색이 된 얼굴로 식은땀 범벅인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체온이 빠르게 내려간 탓에 햇볕을 받은 그의 손이 몹시 뜨겁게 느껴졌다.
“아파요. 급체 했나봐. 급······.너무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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