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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믿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는데 온전히 믿을 수는 없는 기분. 이것은 마치 예전의 어느 날, 석연치 않은 임종을 맞이한 아버지로 인해 의료인을 향한 뿌리 깊은 불신감을 갖게 되었던 때의 기분과 닮아 있었다.
믿을 수 없음에도 믿어야 하고, 믿고 싶지만 온전히 믿어지지 않는.
그저 한 발은 불구덩이 앞에, 또 한 발은 차가운 얼음물 앞에 놓여서 한 발이 닿을 때마다 마음의 향방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그는 뭐 때문에 나를 도와 온 것이고 뭘 하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온전히 믿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안 믿으면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같은.
자꾸만 거듭되는 갈등.
아, 모르겠다.
그런데……. 그가 아버지를 죽게 한 것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는 것은 대체 무얼까?
도의적 책임감?
아니면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원흉 같은 건가?
그로 인해 아버지가 죽었다고 한다면…….
아니, 아냐! 단순히 그런 느낌은 아니었어.
그럼…….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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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랫동안 병원 업무 서류와 일정을 승인 받아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볼 수 없었다.
‘오지 않는 걸까? 아니면 오는데도 만나지 못한 걸까.’
서류는 산더미처럼 쌓이는데도 그가 병원에 오는 날은 가뭄에 콩 날 정도로 적고, 그가 나타나더라도 그와 마주치는 일이 없어서 조금씩 다시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었다.
병원 정상화 때문에 바빠서 그러는 것인지 모기업으로 돌아간 것 때문인지 알 수 없었던 탓이었고, 어쩌면 아버지를 죽게 한 사람이라서 이대로 내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끼어든 탓이기도 했다.
믿고 싶으면서도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음에도 믿어야 하는 그것 때문에 갈등하는 나와 마찬가지로 도망가고 싶지만 도망가지 못하거나 도망치지 않으려 하지만 도망 칠 수밖에 없는 처지일지도 모른다는 의심.
그건 어쩌면 그동안 그를 이렇게까지 못 보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에 생겨난 의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어찌 된 일인지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그를 볼 수 없어서 솔직히 이젠 슬슬 서운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의심이 피어날 무렵,
병원 업무는 이전보다 더욱 더 무지막지하게 늘어나고 있었다.
분명 다른 직원들에게는 병원 정상화로 인해 편해지는 부분이 있었던 반면에 상대적으로 업무가 마비 될 정도로 힘든 직원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소수의 직원들은 바로 행정실 사무직 직원들과 사회복지사인 나였다.
업무의 8~90%가 승인을 거쳐야만 하는 서류들로 가득한 사무직원들.
그렇게 어느 시점부터 늘어만 가던 불만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된 것은 그가 병원에 나타나지 않은지, 꼬박 석 달이 지나갈 때쯤의 일이었다.
(병원 구내식당)
“이대로는 더 이상 못 참아! 이게 사람 사는 삶이냐고.”
“진짜 그러네. 요즘 병원이 왜 이러지? 정말 병원 망하는 거 아닌가?”
“얼마 전에는 진짜 울컥 했다니까? 아, 글쎄 화장실 휴지가 다 떨어졌는데……. 청소 아줌마가 화장지를 안 주더라고.”
“그런 일이 있었어?”
“어. 그래서 나 그 날, 뒤도 못 닦고 나와서 청소 아줌마랑 대판 싸웠잖아.”
“이겼냐?”
“당연히…….이길 줄 알았는데, 아줌마가 힘이 세더라고. 그리고 휴지가 떨어져서 더 못준다고 꽥꽥거리는 통에 내가 얼마나 민망했는지 아냐? 난 조용히 옆에 가서 휴지만 달라고 했다? 근데, 이 아줌마가 ‘휴지가 없는데 어떡해요!’ 이러면서 휴지가 없으면 손으로 닦던가. 물로 닦던가 하지, 그걸 꼭 휴지로 해야 해요?’ 그러는 거야.”
“어머, 어머, 무슨 그런 경우 없는 여자가 다 있다니?”
“내 말이.”
“그래서 그걸 그냥 내버려 뒀어?”
“그럼 어떻게 해. 그 아줌마가 복도가 떠나가라고 부끄럽게 떠들어대는데, 더 말 섞었다가는 괜히 애먼 나만 똥쟁이 되는 것 같아서 후다닥 도망 나왔지.”
“잘 했다. 그런 여자는 그냥 무시해야 해.”
‘병원은 진즉에 망하다가 지금 겨우 한 숨 돌리고 있는데 이게 무슨 뒷북에 헛소리들이지?
그리고 제발 화장실에서 더러운 얘긴 그만 하지. 이 사람들이…….사람 밥 먹는 데서 뭐 하는 짓거리들이야.’
“풋. 똥쟁이.”
‘자기가 스스로 똥쟁이 인증을 하는구먼.’
뒷자리에서 떠드는 여자들의 말이 너무 우스웠다.
남의 욕을 하면서 결국엔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슬쩍 이전의 불만을 현재로 끌어 와서 욕한다.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면서 씹기 위해 씹을 상대를 정하는 사람들.
살인적인 업무와 섭섭함에 그에게 약간의 원망이 생기고 있었음에도 병원 식당에서 누군가 내뱉는 불평에 동조할 순 없었다.
이미 망해가던 병원이었고 이제 겨우 정상화되고 있는 시점인데, 딱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불평을 털어놓는 사람들의 말이 너무 졸렬하고 야비해 보였던 탓이다.
그런데 왜 그를 욕하지?
그리고 왜 갑자기 이 시점에 욕을 하는 거지?
그는 지금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고. 그런데 당신들이 왜 그의 욕을 하는 거야?
왜 이제 와서 불평이냐고.
그 사람이 만만해?
그전까지도 가장 그에게 섭섭해 하며 불만이 폭발할 지경이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욕하는 타인의 말을 들은 그 때, 그를 향해 있던 불만이 어이없을 정도로 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욕해도 남이 내 사람을 욕하는 것은 용납 못하는 심보인 것인지, 아니면 정말 진심으로 그에게 불만이었던 게 아니라 잠시 잠깐 서운했던 것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나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남들이 내 남자를 얕보는 것 같은 뉘앙스가 불쾌했다는 것이다.
그동안 날 쫓아다니며 헤실헤실 사람 좋은 모습으로, 쉽고 하찮은 남자처럼 보여 왔던 그를 만만하게 보고 말 하는 것 같아서. 아마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 전의 임원진들이 있을 때는 뒤에서라도 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는데, 왜 이제 와서 그래.’
나는 도무지 뒷담화를 하고 있는 저들의 말을 이해 할 수 없었고, 용납이 되지도 않았다.
이대로 식당에서 꾸역꾸역 밥을 먹고 있다간 저 뒤에 있는 사람들과 대판 싸우거나 당장이라도 식당 바닥에 토사물을 쏟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라, 나는 반도 먹지 못한 밥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저, 갈게요.”
“왜? 더 먹지 않고.”
그러자 같이 밥을 먹던 행정팀 사무직 언니가 걱정스럽게 묻는다.
“밥이 돌 같아서요.”
“돌 씹었어?”
“아니요. 밥이 돌 같다고…….”
“아아, 그래.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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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게 오랜만에 올려요...(먼 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