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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경계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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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경계선 안쪽에서 살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밖을 넘게 될 상황에 처하면서 경계하고 그 경계하던 태도가 차차 변화하는 모습을 탐구해보려 노력했습니다. 경계선 바깥과 안을 넘나들다 결국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공감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책 재미나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경계 - 40
작성일 : 23-06-15 15:20     조회 : 209     추천 : 0     분량 : 1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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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상사화 - 이룰 수 없는 사랑

 

  일요일.

  가슴이 쿵, 쿵, 쿵, 뛰다가 멈춘다. 잠시 후 또 뛰다가 잠잠해진다. 갑자기 찾아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러고 보면 내 몸 하나도 마음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다. 제주도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내일은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침착하자고 해도 뛰는 가슴이 진정되질 않고 어느샌가 손이 떨려와 들고 있던 물건을 놓친다. 이렇게 어설픈 내가 낯설다. 항상 계획을 짜고 그 틀에 맞춰 움직이고 주위 사람이 내 의도에 맞춰 움직여주지 않으면 짜증을 냈었는데. 짜증을 내니 효과가 있었다. 짜증을 내면 사람들은 그에 반응해 속도를 내거나 내게 맞추려 더 노력한다. 그러니 짜증을 더 내게 됐는지도. 내 몸은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아 짜증을 내도 달라지질 않는다. 그러니 짜증내는 자체를 포기하는 수밖에. 통제가 되지 않으니 달리 방도가 없다.

  옆방 손님 가족이 짐을 싸느라 분주하다. 아이들은 생각없이 뛰어다니다 엄마 잔소리를 들으면 잠시 멈춰 어설프게 짐을 꾸리려 노력한다. 그러고 있으면 엄마나 아빠가 다가와서 거들어준다. 그러다 다시 뛰기를 시작하고 잔소리가 이어진다. 그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 바깥으로 나서며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도록 벽에 붙어서 지나치려 했다. 어젯밤 기억이 아직 잔상으로 머릿속에 남아있고 눈을 마주치기가 불편하다. 그 부모도 표정이 편치 않고 시선을 피하려 한다고 의식하는 건 그저 내 자격지심일까. 부모와는 하는 둥 마는 둥 대충 인사를 나눴고, 아이들에겐 손을 흔들며 웃어보였다. 다시 볼 일이 있을까. 헤어지면 그만이다. 그랬으면 좋겠다. 부끄러운 기억이니까.

  숙소를 나서기 전 목적지를 고르기 위해 정민 씨와 대화를 나눴다.

  “커피부터 마실까?”

  “우리도 브런치 먹어보는 건 어때?”

  “브런치라. 고상한 표현이군.”

  “고상한가? 그저 아침과 점심을 붙여놓은 단어잖아?”

  “그 단어 자체보다 단어를 따라 떠오르는 이미지가 그렇다는 거지. 우아한 찻잔과 식기에 담긴 음식을 여유롭게 음미하는 모습, 이 떠오른달까.”

  “아무래도 브런치라는 게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으론 늦고 점심으론 이른 식사를 하는 거니 그렇겠지. 여유가 없으면 브런치가 가능하겠어?”

  “그 다음엔 어디로?”

  잠시 창밖을 살폈다.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는다. 아직 완전히 개진 않았다. 절반 넘도록 하늘에 구름이 깔렸다. 개는 중인가, 아님 다시 흐려지려나?

  “바다 실컷 봤으니까 이제 산에 가자.”

  “한라산은 등정 시간이 제한돼 있어. 늦으면 오르기 힘들어.”

  “한라산이 아니라도 괜찮아.”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도를 펴서 길을 따라 훑는다. 혹시 감기 기운은 없냐, 며 묻더니 산에선 오후가 되면 금세 기온이 떨어진다며 여분 옷을 챙기라고 당부한다. 흠, 나름대로 가장 역할을 하려고 노력하네. 그 노력이 가상해서 칭찬을 해주고 싶다. 그 말대로 긴 팔 옷을 여별로 준비해서 하나는 허리에 두르고 하나는 손에 들었다.

  “좀 더 두꺼운 옷으로 하지.”

  “아직 늦여름인데 얼마나 쌀쌀하려고.”

  “그래도 몰라. 더우면 벗으면 되잖아.”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쏙, 들어간다. 잔소리쟁이. 충고와 잔소리도 한끗 차이다. 그게 얼마나 더하고 덜하냐에 따라. 두툼한 옷을 꺼내들고 나섰다. 어차피 차가 있어 뒷자리에 두고 움직이면 그만이다.

  “브런치 먹을 만한 곳은 지피에스가 고르지. 알려주는 대로 따를 테니.”

  “네, 고객님. 지피에스 작동 시작합니다.”

  지피에스가 안내하듯 기계적으로 말을 끊어가며 발음하니 그가 소리내어 웃는다. 좋은 리뷰 덕에 별 표식이 많이 붙여진 장소를 골랐다. 모를 땐 남들 따라 가는 게 안전하다.

  오호.

  사진으로 봤던 것보다 실내 장식이 훨씬 울긋불긋하다. 주인이 애들 취향인가. 화려한 색감을 띠도록 건물을 칠했고, 벽에 걸린 그림과 장식품도 동물과 인물이 도드라진다. 금방이라도 툭, 튀어나올 것처럼 부담스럽다. 난 그림은 풍경 취향인데. 여백의 미라고 하지. 모자라서 보기 편안한 아름다움.

  “배 많이 고파?”

  “아니. 적당히 시켜. 난 커피만 마셔도 괜찮겠어.”

  “그럼 두어 개 시켜서 나눠먹자.”

  음식엔 손이 가지 않는다. 커피향이 훌륭했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마신 기분이 든다. 챙그랑. 바닥에 떨어진 스푼. 당황해서 냉큼, 주워들었다.

  “하나 더 달라고 하지.”

  “괜찮아. 이미 다 저어서 스푼이 필요하지도 않고.”

  손이 자꾸 저 혼자서 놀아난다. 미숙하다, 너무 미숙해. 빤히 쳐다보는 눈길. 이 자리가 새삼 부담스럽다. 브런치는 이만 종료해도 되겠다.

  “얼굴색이 안 좋아. 창백한 것도 같고. 감기 기운 정말 없어?”

  “자꾸 감기 들먹일래? 그러다 없는 감기도 생기겠다.”

  “그렇게 흠뻑, 비에 젖었었는데 염려가 되지 않겠어.”

  커피 한 모금을 목 너머로 넘겼다. 떨리는 손이 표가 나지 않도록 노력하려니 힘이 든다. 편안하지가 않다. 애꿎은 카페를 비난할 마음은 없다. 지금은 어디에 있어도 불편할 거다. 가슴이 뛰는 진동이 전해진다. 아, 더는 못 참겠다.

  “다 먹었어?”

  “응?”

  차려진 음식 절반도 줄지 않은 걸 알지만 더 이상 안에 있고 싶지 않았다. 바깥 공기가 필요하다.

  “나 바람 쐬고 있을게. 괜찮으니까 천천히 나와도 돼. 저기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여은 씨.”

  그가 꺼낼 말을 기다려주지 않고 일어섰다. 가슴이 심하게 쿵, 쿵, 거리고 얼굴에서 벌겋게 열이 나고 있다. 이건 감기 때문에 아니다. 그도 알았으면 좋겠다. 아, 그나마 밖으로 나오니 좀 살겠다. 피부에 닿는 바람이 좋다. 오늘은 아무래도 하루 종일 바깥에서 지내야겠다.

  “자꾸 들먹이지 말라지만 들먹이지 않을 수가 없어. 열 나는 거 아니지?”

  뒤에서 들려오는 말. 제대로 설명을 해줘야겠다. 돌아서서 바로 앞으로 가 얼굴을 마주했다. 그가 조금, 물러난다.

  “가슴이 멈추지 않고 뛰어. 손이 떨리는 걸 가라앉힐 수가 없어. 이제는 막 얼굴로 피가 몰려 홍조가 되네. 피가 몰리니 열이 나는 건 당연하고. 감기가 아니야, 아니라고.”

  그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다가 도로 밀어넣는다. 말고리가 입끝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하나 보다. 말이 없다. 할 말이 없거나 말할 용기가 없거나.

  “미안해. 자기한테 퍼부으려던 건 아니었어. 나도 어쩔 줄 몰라서 그래.”

  천천히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려 안아준다. 살며시, 조심스럽게.

  “어떻게 할까? 오늘은 무조건 자기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후회가 남지 않게.”

  그럴 수 있나? 후회가 남지 않는 거. 어떤 방향으로 선택을 해도 후회는 남던데. 혹시 고르지 않은 방향을 선택했어야 했나 하고.

  “밖에서 지내고 싶어. 건물 안에선 숨을 못 쉬겠어. 산에 가자.”

  “그래, 가자. 원하는 만큼 오랫동안 있어도 돼.”

  차 안에선 드문하게 대화가 오간다. 정적이 짙어질 만하면 간간이 튀어나오는 말들. 그리 특별한 의미는 없다. 농담 같기도 하고 독백 같기도 한.

  “지도로 봤을 땐 여기가 너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고 오를 만해 보였어.”

  “산이라면 어디든 좋아.”

  차에서 내리자 그가 뒷문을 열어 챙겨왔던 두꺼운 옷을 꺼내 건네준다.

  “혹시 모르니까.”

  “아직도 감기 걱정하는 거야?”

  “감기보다 더한 걸 수도 있고. 일단 몸은 따뜻하게 유지하는 게 좋아.”

  그 말에 토를 달진 않았다. 선선히 건네주는 옷을 받아들고 산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이 냄새. 풀과 나무가 뿜어내는 향. 뛰던 가슴이 조금씩 진정되는 듯도 하다. 흙을 밟을수록 떨리던 손도 잦아든다. 산이 약이다. 특효약.

  “여기 오니 잘 걷네. 차에 오르기 전엔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보였는데.”

  “신기하지. 몸을 힘들게 하던 증상이 사라지고 있어.”

  “다행이다.”

  한참을 그렇게 올랐다. 힘이 들면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다시 발을 떼곤 한다. 그동안 정민 씨는 한 번도 내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뒤에서 걸음을 맞춰 따라온다. 고맙다. 이제 부부학교 졸업시켜도 되겠다. 우등생으로.

  이마 위와 목 주변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허벅지와 종아리에 통증이 심해져 당분간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내가 멈추자 바로 뒤에서 그가 따라 멈춘다.

  “잠시 쉴까?”

  “그럴래? 어디 앉을 만한 데가 있나 둘러볼게.”

  내가 숨을 고르는 사이 그가 앞서 나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진다. 하늘을 보니 다행히 비가 올 것 같진 않다. 구름은 여전히 끼어 있지만 한층 엷어졌다. 조금 있으면 구름은 모두 물러나고 해만 남겠다.

  “저기 앞에 완만한 구릉 같은 곳이 있네. 앉아서 쉬기 좋겠어.”

  그가 발견한 자리는 그 말처럼 완만한 경사가 졌다. 앉기보다 오히려 누워 쉬기 좋을 만한 곳이다.

  “멋지다. 어떻게 산 한가운데 이런 자리가 있지.”

  얼른 달려가 바로 그 위에 누워버렸다. 적당하게 자란 수풀이 딱딱한 바닥 때문에 등이 아프지 않도록 완충장치를 해준다. 적당하다. 춥지만 않으면 언제까지고 누워있어도 될 만하다.

  “잘 찾아냈지?”

  “훌륭해. 우등상 줄게.”

  “우등상?”

  “부부학교 우등 졸업생. 졸업할 때가 됐지. 학업성적도 우수하고.”

  “벌써 졸업할 때가 됐어? 아쉽네. 학교생활에 재미붙이고 있었는데. 할 만하니 졸업이네.”

  그가 내 옆에 눕는다.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파랗다. 아주 새파랗다. 바닷물과 달리 밝고 들뜨는 파란 색이다. 한참을 보고 있으면 눈이 시릴 듯하다. 어쩜 저런 색이 나는지. 인간은 자연에서 색을 배운 게 분명하다. 우리 머리만으로 도저히 발명해내질 못할 그런 색감이다.

  “하늘 너무 예쁘다.”

  “맑아지네. 더는 비가 오지 않겠어.”

  그러게. 하늘이 개었어. 기분 좋게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쓰다듬고 머리를 흩트리며 지나친다. 뛰던 가슴이 잔잔해져 더 이상 진동을 전하지 않는다. 손도 떨림을 멈췄다. 이렇게 가만히 누워있으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른다. 지금 몇 시인지 시계를 확인하지 않으면 도통 알 수 없게 현실감을 잃어간다.

  꾸르륵.

  나야? 그가 고개를 반쯤 돌리고 나를 향해 짓궂은 미소를 보인다. 나구나.

  “난 그 카페에서 이것저것, 먹었거든. 자기는 음식 입에 대지도 않았잖아. 점심시간도 지났고 배고프겠네.”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까 식욕도 없어. 배 안 고파.”

  “일부러 괜찮은 척, 할 필요 없는데.”

  “아니라니까.”

  “그럼 그 소리는?”

  “위가 제멋대로 반응하는지 몰라도 머릿속엔 정말 식욕이 없어.”

  일부러 하는 소리가 아니다. 속이 허기지다 해도 배고픔이 머리까지 전달되진 않는다. 입에 아무것도 넣고 싶지 않다. 그저 이 자세가 딱, 좋다. 더 이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지금 같아선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이 자리에서 그대로 버티겠다. 그러다 망부석이 되더라도 여한이 없겠다. 망부석. 그래, 제주도에 왔으니 망부석이 되어도 좋겠지. 그럼 돌하르방이랑 친구가 될 수도 있을 테니. 슬며시 손을 움직여 그의 손을 잡았다. 온기가 전해진다. 숨을 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게 고동도 전달된다. 날 보는 그의 시선이 애틋하게 전해온다.

  “여러 가지로 많이 미안해. 제대로 된 사과를 하고 싶어.”

  “와이프가 뭘 그리 많은 잘못을 했다고.”

  “속절없이 고함을 질러대며 화를 냈잖아. 오늘도 제멋대로 굴었고. 그런데 자기는 제대로 대꾸하기는커녕 목소리 한 번 높이지 않았지. 내게 화나지 않았어?”

  그가 숨을 삼킨다.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어차피 시간은 이제 내게 별 의미가 없다. 서두르던 마음은 내 안 어느 구석에서도 일절, 찾아내기 어렵다.

  “속죄하는 마음으로 와이프를 따라왔어.”

  속죄라. 뒤를 돌아보면 아직 속이 쓰리긴 하다. 이 모든 혼란과 엉망이 된 삶. 그를 완전히 용서했다고 하긴 일러도 지독히 미워하던 단계는 지났다.

  “지나고 보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후회가 막심한데, 어떻게 되돌려야 할지도 막막하고 되돌릴 수 있을지 가능해 보이지도 않고.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목 안쪽이 따끔, 거린다. 배고프진 않은데 목이 마르다. 물도 챙겨오지 않았다. 마음이 찔려 급하게 숙소를 나섰지.

  “가슴에 불이 나는 것처럼 자기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었어. 하지만, ……, 박수는 한쪽만 친다고 소리가 나지 않잖아. 나도 동조한 거니까.”

  “나만 아니었다면 그런 일 평생 겪지 않고 살 수도 있었어.”

  “그럴까? 아님, 또 다른 누군가와 마주쳤을지도. 인생은 모르는 거잖아.”

  그 손을 꼭, 쥐었다. 다 괜찮다는 신호로. 나는 이제 괜찮으니 안심하라는 메시지로. 이제는 자신을 돌보라는 격려로.

  “바람이 참, 좋네. 그렇게 비가 퍼붓더니. 그저 꿈을 꾼 것 같아. 요란한 비가 내리는 꿈.”

  구름이 흘러간다. 하늘에 해만 남아서 쨍, 하게 볕을 내리더니 어느새 구름이 걸치고 잠시 볕내리기를 쉬어간다. 은근슬쩍, 선잠이 들었을까, 몽롱해진 기운이 몸속에 자리했다 벗어난다. 어둑해지는 주위. 해가 하강하고 있다. 미끈한 감촉.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게, 그는 내가 잡은 손을 놓지 못한다. 촉촉하게 두 손 사이 땀이 맺혔다. 손가락을 풀자, 그의 기척이 전해진다.

  “석양이 지네. 어떻게 할까?”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다. 식욕이 찾아온다. 아침에 마셨던 커피를 제외하곤 입에 댄 게 없었지.

  “자기는 어때? 많이 힘들어? 내려가고 싶어?”

  그가 나를 향해 몸을 돌린다.

  “나보다 와이프가 더 힘들잖아. 계속 여기 있기를 원해?”

  저 눈, 코, 입술. 한때는 그것만 떠올리던 적이 있었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만큼.

  “사람이 사랑을 하면 저절로 다이어트가 된다고 하더라고. 먹지 않아도 배가 불러서 먹는 양이 줄어들고 살이 빠지는 거지.”

  그가 한쪽 팔을 굽혀 팔베개를 만들어 그 위에 머리를 올려놓는다.

  “나, 자기를 알고 나서 미쳤다 싶게 몰두하기도 했었어. 분명 앞에 밥그릇을 놓아두었는데 그 위로 자기 얼굴이 보이는 거야. 밥보다 우선이었어, 그때는.”

  “그거 칭찬이지? 내가 먹는 일보다 더 중요했다는.”

  웃는 입술 너머로 보이는 이가 가지런하다. 내 이는 교정을 하고 싶을 정도로 들쭉날쭉한데.

  “이렇게 옆에 있잖아.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 내 마음이 얼마나 대단하지 시험해볼래.”

  웃던 입모양이 반쯤 닫혀 모로 누운 반달 모양 같다. 그게 귀여워서 지긋이 손가락으로 눌러준다. 가볍게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춘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밤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까지 여기서?”

  두 번째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괜찮겠어? 한밤중엔 많이 추울지도 몰라.”

  그 말에 허리 위로 둘렀던 옷을 풀어 몸 위로 걸친다. 그 위에 손에 들고 왔던 두꺼운 옷도 겹으로 두른다.

  “이 정도면 준비 만반이지. 누구 말 듣길 잘했어.”

  이번엔 내가 웃어도 그가 웃질 않는다.

  “부부학교 최종 졸업시험이네. 통과 못하면 탈락인건가.”

  “사실 이런 건 배우지 않는데. 출제자를 잘못 골랐지. 기출문제가 호락호락하질 않네.”

  그의 손이 내 머리 위로 올라왔다 얼굴을 쓰다듬더니 목을 잠시 주무르듯 지나친다. 등을 대고 바로 눕더니 놓았던 내 손을 부여잡는다.

  “그래, 가보자. 어디까지 가나 보자고.”

  한동안 그가 업무와 관련해서 겪었던 진상손님들에 대해 늘어놓는다. 나도 덩달아, 화원에서 일하며 겪었던 황당한 일화와, 더불어 마트에서 있었던 일들까지 나열한다. 누구나 다 억울한 일을 겪으며 가슴에 눌어붙은 자국이 생긴다. 그건 풀어놓는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 시작되니 봇물이 터지듯 빠르게 말을 이어간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어둑해지는 주변을 깨닫는다. 밝혀주는 불빛이 없으니 금세 컴컴해진다. 괜히 머무르자고 했나, 후회가 든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자고 할까, 망설이다 그건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아직 알지 못하는데 끝을 봐야지.

  “잠깐 볼일 좀 보고 올게.”

  일어나서 발걸음을 떼는데 바로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둠이 짙다. 근처에서 벌레 우는 소리가 귀를 울린다. 슬그머니 겁이 나서 멀리 가지 않고 바지와 속옷을 내리고 얼른 용변을 해결했다. 이런, 휴지가 든 가방을 차에 뒀다. 아주 원시적으로 변하네. 정민 씨도 어디까지 가나 보자고 했으니까. 되돌아와 그 옆에 누웠다. 추위를 염려했던 그가 옳았다. 땅에서 냉랭한 한기가 올라온다. 어둠속을 더듬어 그의 손을 찾아 쥐었다. 잃어버리지 않게 손가락으로 단단히 얽는다. 이어지는 대화가 갈수록 느려진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하늘에 별은 더욱 또렷해진다. 별이 저렇게 많구나. 제주도 하늘이라서 더 잘 보이나. 저릿, 위가 날카로운 도구로 긁힌 느낌이 전해진다. 배가 많이 고프면 배고픔이 아픔으로 변하는 건가. 배고픔보다 목마름이 더 견디기 힘들다. 어디서 물을 구하긴 어려울 테지. 정민 씨와 손 붙잡고 이렇게 가까이 누워있는 모습. 얼마나 원했었나. 그와 둘이서만 보내는 순간을.

  끄르르륵.

  이번엔 그다. 그의 배에서 나는 소리. 둘만 있으니 서로의 몸에서 나는 소리가 더욱 명료하게 들린다. 멋쩍은 얼굴. 카페에서 많이 먹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배가 고프지 않을 리 없다.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을까. 지금 몇 시쯤 됐을런지. 해가 뜨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 아니다. 그럼 내려가야 하잖아. 제주도에서 마지막으로 보내는 밤이 너무 아깝잖아. 정민 씨와 보냈던 행복한 순간을 떠올린다. 환한 미소, 그의 체취, 건드리기 아까울 정도로 황홀해 보였던 몸. 처음 함께 갔던 식당이 고깃집이었나. 삼겹살을 구웠던가. 갑자기 웬 삼겹살. 우아하게 나이프와 포크로 스테이크를 쓸었겠지 삼겹살을 구웠을 리가 없잖아. 삼겹살이 떠오르자 그걸 머릿속에서 밀어내기 벅차다. 삼겹살이 아니면 돼지갈비도 훌륭하지. 냉면은 고기 먹은 다음 필수고. 고기 생각 그만하자. 숨을 깊게 내쉬어 배를 오므리니 그나마 속쓰림이 줄어든다. 그래, 고기는 그만. 고기를 구웠을 리가 없어. 대신 정갈한 한정식집에는 갔었다. 말끔하게 차려진 음식들. 고운 자기 그릇에 담긴 반찬. 밥은 영양밥이었나 나물밥이었나. 흔히 먹는 된장국이 그렇게 고급스러울 있다는 걸 처음으로 경험했다. 아, 또 먹는 건가. 아니야. 그와 함께 방문한 곳을 떠올릴 뿐. 대수롭지 않은 걸로 그와 실랑이를 벌였던 장면이 떠오른다. 횟집이었지. 회는 초장에 찍어 먹어야 한다는 나와 와사비를 곁들인 간장이 제대로라는 그가 팽팽히 맞섰지. 그때 먹었던 게 우럭이었나 광어였나. 하얀 생선살이 입안에서 살살, 녹아들었다. 그만해. 먹는 건 그만 떠올리라고.

  “그만!”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본다. 무심코 흘러나온 외침. 멋쩍어진 내가 시선을 피한다.

  “그만이라니? 그만하고 싶어? 참기 힘들어서 그래?”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자기 지금 어때? 배고프지 않아? 목마르지 않아?”

  “나야 카페에서…….”

  “그걸로 괜찮을 리가 없잖아. 거기 들렀던 적이 언젠데.”

  천천히 흘러나오는 대답.

  “그러곤 시간이 한참 지났지.”

  “참기 힘들지?”

  “목이 마르긴 해. 마실 물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말을 꺼내려니 목 언저리가 조여온다. 이것도 손이 떨리던 것과 비슷한 증상인가. 긴장해서 아님 초조해서. 말소리가 나 자신도 알아챌 만치 떨린다.

  “정민 씨를 떠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음식이 떠올라. 그렇게 몰입했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모습 위로 삼겹살이 떠오르고 영양밥이 가물하고 횟감이 눈에 밟혀.”

  그가 얼핏, 미소를 짓는다. 나도 같이 웃어주려는데 반대로 눈물이 나려 한다. 왜 웃으려는데 슬픈 감정이 드는 걸까.

  “이게 진정한 사랑이 아닌가 날 궁금하도록 만든 사람인데, 그런 자기 모습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눈앞에서 가려.”

  말을 꺼내는 중간, 턱이 떨려서 발음이 흩어진다. 눈에 눈물이 맺힌다. 그 방울이 무게를 못 이기고 아래로 굴러내린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바로 옆에 누워있는데, 배가 허기져서 보이는 건 온통 음식뿐이야. 배가 너무 고파서…….”

  울음이 커지고 있다. 하던 말은 마저 끝마쳐야지. 그렇지 않았다간 영영, 끝맺지 못할 거다.

  “배가 고파서, ……, 으으응.”

  말을 하려는데 자꾸 울음이 차올라서 잇기가 너무 힘들다. 마저 하자. 남은 말을 다 토해버리자.

  “배가 고파, ……, 내려가고 싶어. 연애고 뭐고 내려가서, ……, 따뜻한 밥 먹고 싶어. 바아아압!”

  우흐흑.

  참았던 울음이 터져나온다. 할 말은 했다. 이제 속 시원하게 울자. 울어버리자. 울음이 그칠 때까지 그저 내버려뒀다. 언제나 울음이 올라올 땐 참으려고 노력했었는데, 누가 볼까 얼른 그치려고 했는데, 이번만은 마음껏 놓았다. 바닥까지 다 퍼올려서 더는 눈물이 남아있지 않을 만큼. 아주 후련하게, 제대로 울었다. 한참을.

  울음의 기세가 잦아들며 숨쉬기 편해지자 그가 궁금해졌다. 눈물을 닦아내며 고개를 드니 그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됐다. 어, 정민 씨가 울었어? 언제나 울음을 터트리는 건 나였지 그는 한 번도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나처럼 펑펑, 울어대진 않더라도 조용히 흘린 눈물자국이 얼굴 위에 어렸다.

  “정민, 씨.”

  그가 내뱉는 말에서 또각, 또각, 음절이 떨어져 내린다.

  “이제 정말 졸업인가 보네요. 자기가 아니라 정민 씨로 호칭이 바뀌었어요.”

  옅은 미소를 보인다.

  “결국 여은 씨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구요.”

  깊숙하게 속에서부터 흘러나오는 한숨. 뭔가 말을 꺼내려니 몸이 떨린다. 이러다 또 울음이 터질까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만큼 울었으면 됐지. 정민 씨는 이런 내가 감당하기 벅찰 거다. 그는 할 만큼 했다.

  “이런, 아직까지 위로 잘해주기, 그 과목은 어려워요. 아무래도 낙제한 채로 끝나겠네요.”

  “어떻게 위로해줄지 막막하면 차라리 노래를 불러줘요. 우리 현무가 자꾸 칭얼거릴 땐 자장가가 효과 만 점이였죠.”

  그가 좀 더 밝게 웃는다.

  “노래요? 노래 실력은 완전 잼병인데. 어떤 노래가 좋으려나?”

  설마, 그가 나에게 노래를 불러주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위로가 필요할 때 여러 마디 말보다 한 곡의 노래가 효과가 더 좋기도 하다고 알려주려던 것뿐이었다.

  “그대 나를 위해.”

  낮게 깔려서 퍼지는 저음. 듣기 나쁘지 않다. 음정, 박자, 자기 말처럼 잼병인데 듣기 나쁘진 않다. 나한테는.

  “웃음을 보여도 허탈한 표정 감출 순 없어.”

  잠시 무슨 노래인지 머릿속을 뒤적였다.

  “힘없이 뒤돌아선 그대의 모습을 흐린 눈으로 바라만 보네.”

  아, 그 노래.

  “나는 알고 있어요. 우리의 사랑은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많이 슬픈 곡조인데.

  “서로가 원한다 해도 영원할 순 없어요.”

  손 위로 얼굴을 묻었다. 내가 얼굴을 떨군 채 어깨를 들썩이자 그가 노래를 멈춘다.

  “위로해주려던 거지 울리려던 건 아닌데.”

  “계속 불러요. 위로 받고 있으니까. ”

  잔기침 몇 번.

  “저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그렇게 클라이맥스로 올라간다. 억지로 올라가지 않는 옥타브를 무리하게 시도하다 쇳소리가 난다. 울다가 그만 웃어버렸다. 울다가 웃는, 그 놀림의 대상이 되는 저주스런 행동을 하다니. 음이탈이 난 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이절을 계속 이어 부른다. 날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만은 한결같다. 그의 노랫소리가 컴컴한 숲속에서 잔잔히 울려퍼진다. 반주 하나 없이 사람 목소리 하나만으로 들리는 노랫소리가 이렇게 감미롭다니. 노래 실력이 잼병이라도 부르는 사람이 진솔하게 부르니 그 진심이 닿는다. 그 노랫말처럼 세월이 흐른 후 다 잊게 될까. 이렇게 세차게 몰아쳤던 감정이라도 세월이 흐른다면. 세월이 흘러봐야 알게 되겠지. 그때까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거다. 떠오를 때마다 고개 한 번 젓고 웃음 한 번 흘리고선 살던 대로 살아야겠지. 그렇지만, 그렇지만 말이다. 귓가에 울리는 이 노랫소리만큼은 쉽게 사라지진 않겠는데. 설사 누가, 언제, 어디서 불렀는지를 모두 잊는다 해도 귀에 익숙한 노래가 들리면 지금 들으며 가슴에 닿았던 진심은 반복해서 떠올리지 싶다. 마치 떨쳐내려 해도 억지로 따라오는 저주처럼. 그렇구나. 저주받을 행동을 했더니 저주를 받아버렸다. 울다가 웃어버리다니. 정민 씨가, 일부러 그랬나. 그걸 내 가슴 깊숙하게 심어버리려고. 그래, 심겼다. 심겼으니 자기 멋대로 자라겠지. 크게 자라면 잘라주고 또 자라나면 자르고. 평생 솎아내며 살아야겠지. 그걸 너무 잘 안다. 밥 벌어먹기 위해 했던 일이 그거였으니까. 벗어날 수 없겠지. 아니,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눈 감을 날 올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겠지. 밖에선 흙을 뚫고 올라오는 나무를 관리하고, 안에선 가슴을 뚫고 올라오는 나무를 관리하고. 불평할 처지가 아니다. 그런 천직을 허락받아 살아가게 됐으니. 운명이었다. 전공을 그렇게 선택한 것부터가.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소용없던 거였다. 모든 게, 정해졌던 거다. 모두, 전부, 다.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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