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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경계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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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경계선 안쪽에서 살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밖을 넘게 될 상황에 처하면서 경계하고 그 경계하던 태도가 차차 변화하는 모습을 탐구해보려 노력했습니다. 경계선 바깥과 안을 넘나들다 결국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공감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책 재미나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경계 - 37
작성일 : 23-06-09 14:47     조회 : 206     추천 : 0     분량 : 16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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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프리지아 - 천진난만

 

  월요일.

  소금공기. 짭짜름한 소금기를 머금은 대기. 내가 그럴 거라 예상했기 때문일까. 아무리 제주도라도 공항은 해변에서 멀찍이 떨어졌을 텐데 출구를 나설 때부터 공기의 질이 다른 것처럼 느껴진다.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어 그런 기대를 하는 거겠지. 아님 이곳에 대해 너무 많은 얘기를 접해서 그런지도. 오기 전부터 도서관에 가서 제주도에 관한 책도 빌리고 인터넷으로 자료도 찾아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굳이 그렇게 하라고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니다. 처음 가보는 섬. 한국 내 가보지 않은 곳이 여러 군데지만 어째 바다를 가운데 두고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이번에 와보면 언제 또 와보겠냐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래서 마음은 조급해지고.

  비행시간은 예상보다 짧게 느껴졌다. 짐 맡기고 기내 자리에 얼마간 앉아있다 다시 짐 찾으니 이렇게 공항출구에 서 있다. 옆에서 정민 씨가 렌트카 회사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린다. 정장 차림이 아닌 모습이 생소하다. 언제나 같은 브랜드 정장을 입었었는데. 게다가 짙은 어두운 색을 고집하던 그가 밝은 계통의 푸른 색 상의를 걸치니 인상마저 달라 보인다. 역시 함께 시간을 보내봐야 보지 못했던 면이 드러난다. 그게 기대가 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감탄과 실망이 동시에 오겠지. 그 또한 나와 같을 거라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나에게서 얼마나 감탄을 하고 실망을 할까. 실망보단 더 많이 감탄하기를 바랄 뿐이다.

  “짐 다 실었습니다.”

  내가 답이 없자 운전석에 앉으려던 그가 움직임을 멈춘다. 뭔가 잘못되기라도 했는지 내 안색을 살피는 그를 향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떼면서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저, 이전에 부탁한 거 있잖아요.”

  “어떤 부탁이요?”

  이미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어색하다. 얼굴이 붉어지는 게 느껴져 그의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 그때, 제가 그랬죠. 여기 와선 부부, 처럼 지내고 싶다고.”

  그가 할 말을 고르듯 잠시 멈춰 있다. 굽혔던 허리를 펴 직립자세를 취한다.

  “네, 저보고 연기 잘하냐고 물으면서 그러셨죠.”

  “이제 제주도 땅 밟았으니까 저를 대하는 태도나 말투를 바꿔주시겠어요?”

  “그으럴까요? 아니지. 그럴까?”

  “호칭도요.”

  “호칭을요?”

  “네.”

  “어떻게 부를까요?”

  “부부사이니까. 여보, 라던가, 자기, 라고 해도 되고.”

  말이 없다.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드니 그의 입술이 요상하게 비틀렸다. 웃기도 뭣하고 울기도 뭣한 모양새랄까. 난감한 기색이 얼굴 전체로 쫙, 퍼졌는데 그걸 티를 내지 않으려니 근육이 여기저기, 뭉쳤다 흔들린다. 억지로 입술을 뗀다.

  “그으러지, 당신.”

  당신, 이라. 보수적인 성향인가.

  “자기, 는 안 피곤해요?”

  맙소사. 이 어색한 말투라니.

  “어, 괜찮아. 아, 거기는?”

  “거기요?”

  “아니, 그, 여은 씨는. 아니, 당신은.”

  “큭.”

  정민 씨가 당황하는 모습에 웃음이 흘러나온다. 그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빼더니 미소를 옅게 흘린다.

  “연기라는 거 생각보다 어렵네요. 연기자라는 직업이 쉽게 많은 돈을 번다고 불평했었는데 그것도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직업이었네요.”

  “첫날이잖아요. 차차, 나아지겠죠. 이런 부탁 드려서 죄송해요. 그래도 저한테는 중요해서요.”

  “괜찮습니다. 나아지기를 바라야죠. 영, 어색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연기에 젬병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네요.”

  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이, 많은 대화가 오고 가진 않는다. 평소 익숙한 말투와 태도를 바꾸려니 머리와 몸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고, 그러니 불쑥, 나오려던 말이 멈칫, 하며 막히길 반복한다. 그래도 내가 제안한 거니 내가 더 노력하려 애썼다.

  “자, 기, 는 제주도 오면 무얼 해보고 싶었어요?”

  “여은, ……, 당신은 계속 존댓말 쓰게?”

  “아, 그런가? 아니, 편하게 할게, 요, 아니, 할까. 그리고, 나, 당신, 이라는 말 별로.”

  “그럼?”

  “여보나 자기로 불러줘요. 아니, 불러.”

  “으흠.”

  그가 목을 가다듬는다.

  “여보.”

  “네.”

  “자기.”

  “네, 자기.”

  처음부터 입에 착, 달라붙진 않겠지. 뭐든 연습이 필요할 테고.

  “아으으으.”

  그가 이상한 소리를 낸다.

  “뭐예요?”

  “어색해서 발음하기 힘드네요.”

  첫날부터 그를 몰아대려는 의도는 없다.

  “계속 연습하는 거죠. 이해해요. 어색하고 불편하겠죠.”

  “지금도 말 안 놓고 있어요.”

  내가 웃자 그도 웃는다. 그래, 그가 한 말처럼, 연기란 게 쉽지 않다. 이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차라리 와이프라고 할게요.”

  “와이프?”

  “외국어라서 오히려 편할 듯해요.”

  “정민 씨가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요.”

  “지금도 정민 씨라고 했어요.”

  “아니, 그건, 정민 씨가, 아니아니, 알았어요. 이제부터 다시, 시, 작.”

  그러곤 한참을 웃느라 대화가 이어지진 않았다. 속으로 계속 속삭였다. 정민 씨라고 부르지 말라고, 존댓말 쓰지 말라고. 이거, 은근히 어렵다.

  “와이프, 저기 바다 색깔 좀 보라고.”

  깔깔깔. 와이프, 라고 뱉어내는 그의 톤이 퉁명스러워 너무 웃겼다. 배를 잡고 웃는 날 황망히 바라본다.

  “뭐가 그리 웃겨?”

  “완전 화난 사람 같잖아, …….”

  겨우 뒤에 붙어 나오려는 요, 를 억지로 멈췄다. 그래, 첫날이고, 우리 둘 다 연습이 필요한 건 당연해.

  “휴우우.”

  실컷 웃고 나서 숨을 고르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그가 왜 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같은 바다인데 여기 색깔은 어쩜 이리 다를까. 파란 보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런 푸른빛이 바닷물 전체에 퍼져 일렁이고 있었다. 눈을 부시게 하는 환한 태양빛이 절반을 채우고 그 아래 절반을 이 푸른빛이 메우고 있다. 정말 현실적이지 않다. 나도 모르는 새 어딘가 다른 세상에 밀려들어온 듯, 이곳은 낯설고 이국적이다. 심지어 나무마저 평소에 보던 나무와 모양새가 완전 다르다. 가만 넋 놓고 있으면 내가 국내에 있는지 외국에 있는지 헷갈릴 정도로.

  “너무, 예쁘, 네.”

  겨우 나오려는 요, 를 멈췄다. 언제쯤 익숙해질런지.

  “한국이 아닌 것 같지. 와, 이, 프.”

  하하하하. 제주도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웃음이 터지면 멈출 수가 없다.

  “노력하고, 있다니까.”

  “알아. 미안.”

  “말이 짧네.”

  “길어지면 실수할까봐.”

  “괜히 한다고 했나. 이거 쉽지 않아.”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

  그렇다. 내가 원해서 하는 일도 이리 쉽지가 않다.

  “오늘 일정이?”

  “나보고 말이 짧다면서 자기도 말을 하다 마네.”

  “길어지면 실수할까봐.”

  어깨를 툭, 치니까 심하게 아픈 척, 엄살을 부린다.

  “벌써부터 가정폭력을.”

  “폭력이라니. 제대로 힘을 싣지도 않았는데 엄살은.”

  “손이 맛을 들이면 자꾸 나간다고.”

  “그러다 한 대 더 맞는 수가 생겨.”

  “어, 어, 폭력적인 면이 아주 자연스러운데. 평소 자주 그러는 거 아니야?”

  “맞고 나니까 연기가 점점, 나아진다.”

  “그런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숙소 가서 짐 풀고 정리 해놓고 찬거리라도 사러 나갈까 하는데.”

  “우리가 직접 해먹을 수 있지?”

  “응. 침실이 세 개고 부엌은 공유. 욕실이 각 방마다 붙어있어서 좋더라고.”

  “괜찮네. 부엌은 함께 사용해도 그럭저럭 감당할 만한데 욕실은 나눠 쓰기 불편하니까.”

  “그러니 숙소 고르기는 전문가한테 맡기라고 했잖아.”

  “아, 네, 수고 많으셨네요.”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하자 그가 웃으며 핀잔을 준다.

  “또 존댓말인데.”

  “그건 빈정대는 말이니 포함시키면 안 되지.”

  잠시 함께 웃으며 바깥을 감상한다. 조금씩 녹아간다. 이 풍경에. 서로에게. 이전엔 그를 만나 긴장하곤 했다면, 이제는 편안해지고 있다. 단단해지던 가슴이 풀어진다고 할까. 항상 모든 일엔 양면이 있다고 그게 슬며시 걱정되기도 한다. 그렇게 너무 풀어져 갖고 있던 긴장이 모두 사라진다면 그 다음엔 어떨지.

  “오, 이거 아주 한적한 곳으로 가네.”

  “그러게. 관광객 받는 곳이라 부락시설 근처일 줄 예상했는데.”

  도착지에 차를 세웠다. 달랑 집 한 채. 주변엔 온통 나무만 보인다. 회색 승용차 한 대가 집 입구 바로 앞에 자리한다. 우리를 만나러 온 집주인이리라. 정민 씨가 공항에서 출발하기 전 미리 알렸다. 우리가 들어서는 소리에 낌새를 챘는지 문이 열리고 통통한 몸매의 중년 여성이 밖으로 나온다.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우리 둘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받는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지 않으셨어요?”

  “아니요. 길이 잘 뚫려 있어서 수월하게 찾아왔네요.”

  “그렇죠? 도로가 새로 닦이면서 찾아오기 많이 쉬워졌어요. 그 전엔 헤매던 분도 계셨는데 이제 길 때문에 불평하시는 분은 없더라구요. 안으로 들어가서 둘러보시죠.”

  집 안이 널찍하다. 공용으로 사용하는 부엌은 거실과 바로 연결되어 뒤쪽 바깥으로 향하는 출입문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제주도는 처음이세요?”

  “저는 처음이요.”

  “두 번째이긴 한데 처음엔 거의 업무상 왔던 차라 달리 둘러볼 여유가 없었죠.”

  “뭐든 첫인상이 중요하다잖아요. 좋은 인상 가지고 돌아가시면 좋겠네요. 여기는 자주 갑자기 비가 내리기도 하거든요. 계시는 동안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요.”

  왼쪽에 첫 번째 방, 반대쪽에 두 번째 방, 다시 왼쪽 깊숙한 곳에 세 번째 방이 자리한다.

  “다들 안쪽에 자리한 방을 좋아하셔서 보통 안쪽부터 순서대로 방을 내드리거든요. 운 좋게도 현재 지내시는 분이 없어요. 원하시는 방을 고르셔도 돼요.”

  방 세 곳을 다 둘러봤지만 역시 위치는 안쪽 방이 가장 좋다. 정민 씨도 그 방을 선택하는데 동의한다.

  “바쁜 휴가기간이 아니라면 주로 평일에는 한적하고 주말에 바쁘거든요. 마침 좋은 시기에 오셨네요. 금요일에 가족 손님이 오실 때까지 두 분이서만 쓰실 거예요.”

  그가 날 보며 미소짓는다.

  “좋은가보네?”

  “으응?”

  “기분 좋게 웃었어.”

  금요일까지는 내 집처럼 우리 둘이서만 쓴다니 속으로 웬 횡재냐고, 좋아했더니 그게 바로 얼굴 위로 드러났던가 보다. 좋긴 하다. 이런 근사한 곳이 우리 둘만의 공간이 된다니. 비록 정해진 기간만이라도.

  “어떠세요? 마음에 드세요?”

  “아주 좋아요. 게다가 금요일까지 전용공간이라니 더욱 좋은데요.”

  “다행이네요. 좋아하셔서. 짐 많으세요? 도와드릴까요?”

  “아니요. 많지 않습니다. 안 도와주셔도 돼요.”

  정민 씨가 집 열쇠를 건네받고 주인 여자가 준비해온 서류에 서명을 한다.

  “집 구조가 평범한 주택 용도는 아닌데요.”

  “네, 여기 재건축을 할 때 숙박시설로 쓸 용도로 지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방마다 욕실을 갖추도록 설계했죠.”

  직업병인지 그가 건물에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묻는다. 그런 그를 내버려두고 부엌을 지나 뒷문을 열고 나선다.

  “우와.”

  정민 씨 질문에 답하던 주인 여자가 내 뒤에 대고 말한다.

  “넓진 않지만 잘 가꿔놓은 뒷마당이에요.”

  그녀 말처럼 넓다고 하긴 그렇지만 정갈하게 꾸며진 정원이 집 뒤에 자리한다. 파릇한 잔디가 담 바로 안쪽에 심어진 나무들에 닿도록 주우욱, 펼쳐졌다. 전문가의 손길이 닿았는지 나무마다 독특한 모양으로 가지치기를 했다. 사각형, 삼각형, 심지어 호리병 모양도 있다. 당장이라도 그 잔디 위를 걸어보고 싶었다.

  “마당 있는 집을 가져보고 싶었어요.”

  “잘 됐네요. 계시는 동안이라도 마음껏 누리세요.”

  되돌아와 떠나는 주인 여자를 정민 씨와 함께 배웅하고 짐을 날랐다. 방 안에 자리한 붙박이장을 열어보는 그의 등에 대고 잠깐만 둘러볼게, 라며 얼른 뒷마당으로 향했다. 양말을 벗어 구석에 놓아둔다. 발바닥에 닿는 잔디의 촉감이 기분 좋다. 스칠 때마다 간지럽히듯 바닥을 쓸어준다. 코에 닿는 풀냄새와 나무냄새가 향긋하다. 피톤치드라던가? 식물이 주는 좋은 효과가 있다던데. 이 나무에서도 그게 나오나? 아닌가? 상관없다. 그저 난 이 향긋한 냄새가 뼈에 사무치도록 좋다. 식물이 주는 위안. 내겐 중독 같은 거다. 화원에서 일을 구한 것도 그런 이유가 포함됐다. 아, 정말 이런 정원이 있는 집이라면 오십 년 대출을 받아서라도 갖고 싶은데. 잔디 위를 돌고 또 돌았다. 정민 씨가 나를 찾을 때까지.

 

  화요일.

  엊저녁에는 언제 어떻게 눈을 감았는지 모르게 잠들었다. 눈을 뜨니 다음날 이른 새벽. 잠을 깬 후에도 정민 씨가 나 때문에 깨지 않게 조용히 누워있었다. 옆에 그가 잠들어 있는데도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다시 눈을 감았다 뜨면 그가 사라져 버리고 없을 것처럼. 그와 함께 보낸 첫날밤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이거 너무 적응 잘하는 거 아닌가. 제주도 일정을 계획할 때, 첫날은 너무 무리하지 말자고 그와 말은 맞췄었다. 공항에 내리면 이미 반나절이 지나간 후였고, 렌트카 찾으랴 숙박지로 이동하랴, 부산하게 움직이다 보면 그렇게 하루가 다 지나갈 듯했다. 예상처럼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숙소에 짐을 풀고 근처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나니 곧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왔다. 근처 어딘가를 방문하기에도 애매한 시간대였다. 장을 보기 위해 들른 마트는 농협과 연계된 곳으로 단층으로 지어진 건물 입구가 농협 특유의 초록색과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장을 보는 사이에도 정민 씨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논쟁을 이어갔다.

  “첫날 너무 무리하지 않기로 했잖아.”

  “그렇긴 한데 시간이 아깝지 않아? 아직 밖은 환한데.”

  “처음부터 에너지 다 몰아 써버리면 방전되기 쉬울 수 있어. 숨 고르기 하자고.”

  “그럴까?”

  불룩한 꾸러미를 들고 숙소로 들어서면서도 아쉬운 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저녁식사 마치고 뒷마당에서라도 시간 보낼래. 여기까지 와서 집 안에 머무르긴 싫으니까.”

  “원하는 대로 해. 난 그럼 내일 일정을 어떻게 할까 생각해볼 테니까.”

  “잠깐만. 그건 같이 의논할 일 아닌가?”

  “밖에 나가 있으라고 강요한 적 없어. 알아서 하라고.”

  어, 이거 짜증이 싸움으로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순서인데. 익숙한 시나리오라면 이쯤에서, 시간이 아까워서 그러는 건데 사람 마음 몰라준다고 하자 선택을 강요한 적 없다고 대꾸하며 말싸움이 이어지고, 목소리가 커지면서 누구 한 사람이 밖으로 나갈 때까지 실랑이를 벌일 태세가 되는 차례였다.

  “저기, 이렇게 부부싸움이 시작되곤 해요. 아니, 해.”

  그가 탁자 위에서 메모를 하다 내 말소리에 고개를 든다.

  “아직 잘 모를 테니까 알려주는 거야. 부부싸움도 결혼생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거든. 모르긴 몰라도 일주일에 한 번도 싸우지 않는 부부는 없을걸.”

  “부부싸움이라. 방금 난 그저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을 뿐인데.”

  “알아서 하라고 했잖아. 그거 은근히 무심하게 들리는 소리라고.”

  “그런가?”

  뒷머리를 긁적인다.

  “배울 게 참 많군. 결혼생활이라는 거.”

  그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아무래도 우리 둘 다 피곤해서 예민해진 상태일 거야. 얼른 저녁 먹고 쉬는 게 좋겠어.”

  그렇게 곯아떨어졌다 일어나 보니 다음날 아침이다. 그가 화장실에 들르기 위해 일어날 즈음 방금 깼다는 듯 인사를 건넸다.

  “잘 잤어?”

  “어, 나 때문에 깼나?”

  “마침 일어나려고 했어.”

  “굿모닝.”

  “굿모닝.”

  씨익, 자연스럽게 웃어보이려는 그의 미소가 어찌나 어색한지. 부스스한 얼굴이 낯설다. 그래, 그도 사람이지. 내 몰골도 말이 아닐 거고. 팅팅, 부어서 너부죽한 얼굴에, 머리가 사방으로 뻗쳤다. 이미 다듬긴 너무 늦었고 어차피 제대로 된 결혼생활이라면 이런 모습도 마주해야 하니까. 그가 화장실에 머무르는 사이 부엌으로 향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평소 현무 아빠는 항상 나보다 먼저 일어나서 마트로 향한다. 종종, 아침은 본인이 알아서 해결했다. 그걸로 시어머님에게 잔소리를 듣기도 했고. 정민 씨가 아침으로 무얼 먹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안 먹는 음식도 있을 텐데. 화장실 문을 똑똑, 두 번 두드리자, 대답 대신, 뿌지직, 소리가 들려온다. 이어지는 침묵. 대략 난감하다. 곤란하게 할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아침으로 뭘 먹을지 물어보려 한 건데. 타이밍이 나빴을 뿐. 발소리를 죽여 부엌으로 돌아왔다. 그가 문을 열고 나온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야채를 물에 씻어 다듬기 시작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어도 말이 없어 그를 보니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입술만 깨물고 있다. 많이 당황하긴 했나 보다.

  “가, 갑자기 문을 두드려서 그만 놀란 김에…….”

  “아니, 내가 미안해. 용변 보는 걸 방해하는 게 아닌데.”

  “내가 화장실에 너무 오래 있었나?”

  “그런 게 아니라. 아침 준비하려고 했는데 뭘 먹을지 물어보려고.”

  “아, 대충. 사실 아침을 챙겨먹는 편이 아니라서. 건너뛰어도 상관없고.”

  당근과 파를 도마 위에 얹고 썰어댄다. 칼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규칙적이다. 상기된 그의 얼굴이 아직 그대로다.

  “그게.”

  “그럼.”

  동시에 튀어나오고 동시에 멈춘다. 서로 기다려주려고 해 잠시 침묵이 흐른다. 칼을 도마 위에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함께 살다보면 볼 꼴, 못 볼 꼴, 이것저것, 다 보게 되거든. 왜, 연인 사이에서도 방구 틀 때를 기준으로 이전과 이후가 크게 나뉜다고 하잖아. 서로의 소화기관 활동에도 익숙해져야 하는 게 결혼생활이지.”

  “그래도 마음의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기습을 당해서 힘들었어.”

  소리 내 웃으며 답했다.

  “진짜 많이 당황했나 봐. 얼굴이 붉게 물들었어.”

  “그쪽도 만만치 않은데. 아침부터 그거 다 먹으려고 준비하는 거야?”

  손을 멈췄다. 앞에 널브러진 온갖 채소들. 사실 필요한 것들이 아니다.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어색해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한 건데.”

  “나보고 연기 잘하냐고 묻더니 본인도 연기 실력이 그리 좋진 않은 듯.”

  “자꾸 그러면 그 소리 갖고 놀려댄다.”

  “아아, 그래?”

  옆으로 다가온 그가 쑤욱,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더니 위아래로 훑어댄다. 꺄륵.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소리.

  “그만해, 그만.”

  사람 심보가 하지 말라면 더 한다지. 짓궂은 간지럽힘에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어댔다. 한참을 웃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싱크대에 담긴 물에 손을 집어넣었다 빼서 그의 얼굴 위로 뿌렸다. 내 팔꿈치에 닿은 파와 당근이 어지러이 흩어진다. 그가 본격적으로 손가락에 힘을 주고 덤비려 해 얼른 휴전을 요청했다.

  “휴전, 휴전. 내가 아침 차려줄 테니까 여기서 잠시 멈춤.”

  “끝까지 항복이라곤 안 하네.”

  “항복은 질 때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질 것 같진 않은데.”

  “어, 그러셔? 어디 끝까지 해볼까?”

  그가 손가락을 동물 발톱처럼 곧추 세운다. 내가 방어책을 내세웠다.

  “아침 먹을 거예요, 아니에요?”

  “흠, 먹는 걸로 흥정이라. 배가 고프긴 하네. 지금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너무 호전적인데. 아무리 결혼생활이 전쟁 같다지만 진짜 전쟁은 아니거든.”

  “이런, 배울 거 너무 많아. 그것도 배워가는 중.”

  아침을 먹으며 오늘 일정을 조율했다. 흘러가는 일 분, 일 초가 아까워 최대한 많은 곳을 둘러보길 원하는 나와 달리 그는 느긋하게 일정을 짜길 원했다.

  “여행이라는 게 원래 준비된 만큼, 아는 만큼 보이거든. 그렇게 서두르면 보고도 남는 게 없다고.”

  “기왕 제주도까지 왔는데 하나라도 더 보려는 거지.”

  “와, 이, 프. 남편 말 들어.”

  남편, 이라는 단어가 또륵, 귓가를 간지럽힌다.

  “세 시간에 열 군데보다 하루에 세 군데가 더 남는 장사라고.”

  “그런가?”

  “걷는 거 좋아해?”

  “걷기? 풍취 멋진 숲속 걷는 건 너무 좋아하지.”

  그가 휴대폰에서 제주도 올레코스를 검색해서 보여준다. 제주도의 걷기 좋은 길을 선정해서 연결한 코스다. 걷는 여행이라는 취지를 담아 마을길, 해안도로, 숲속 오솔길 등 다양한 길로 이루어져 있다.

  “좋아 보이는데. 오늘 시작은 제주도 올레코스로 할까?”

  “그러자고. 계획을 짜지 않은 여행의 좋은 점이 언제든지 마음 내키는 대로 일정을 바꿀 수 있는 거니까. 걸어보고 싫증나면 다른 곳을 찾아보던가.”

  그렇게 밖으로 나섰다. 먼저 차를 타고 올레코스에 속하는 가장 가까운 장소로 가서 차를 주차시켜놓고 걷기 시작했다. 걷는 여행이라고 해서 차양이 달린 모자와 선글라스를 준비하고 두껍게 선크림을 바른 뒤 팔목과 발목까지 뒤덮는 상의와 하의로 중무장을 했다. 반팔 셔츠와 반바지에 달랑 선글라스만 낀 그가 그런 나를 보며 자조 섞인 신음을 흘린다.

  “저기 밭에 일 나가시나 봐요?”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그리곤 바로 그의 어깨죽지를 때렸다.

  “아직 한여름이잖아. 이렇게 햇살이 센데 조금만 걸어도 금방 살이 타들어 갈 거라고. 피부암 못 들어봤어? 미리 대비해야 한다니까.”

  “그래도 그건 좀.”

  걷는 것만으로 좋았다. 눈이 부시도록 새파란 하늘 가운데 쨍쨍한 해가 떠 있고, 드물게 자리한 구름이 한가로이 흐른다. 바다 내음이 섞인 공기가 코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한다. 머리가 어질하다. 그 이국적인 풍경과 감촉에. 간간이 보이는 현대식 건축물은 오히려 배경이 되고 숲과 나무가 주인공 같다. 이 내음을 오롯이 간직할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저 그 기억만 담아가는 거지.

  한 무리의 관광객이 지나간다. 그리고 또 관광객. 이어서 다른 관광객. 평일 낮인데도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이 이리 많다. 이제껏 지나쳐온 건물 중 가장 크고 화려하게 꾸며진 곳이 눈에 들어온다. 카페와 식당을 겸한 기념품 가게다. 안을 들여다보려는 나를 그가 만류한다. 앞으로도 기념품 가게는 수도 없이 지나칠 텐데 굳이 벌써부터 들러서 짐을 늘릴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아니, 꼭 뭘 사겠다는 건 아니고. 그저 둘러보기만 하면서 나중에 살 물건을 점찍어 놓을 수 있는 거지. 게다가 가격을 대충 알아놔야 나중에 가격비교도 가능한 거잖아.”

  난감해하는 얼굴.

  “쇼핑 안 좋아해?”

  “꼭 필요한 것만 사는 편이지.”

  알만 하다. 딱 살 것만 사고 쇼핑센터에서 시간을 허비하기 꺼리는 성격.

  “대충 훑어만 볼게. 여기가 가장 잘 꾸며놓은 듯해서 그래.”

  살짝, 그의 고개가 돌아가더니 알았다, 며 나보다 먼저 안으로 들어선다.

  “이것도 다 결혼생활의 일부분이겠지?”

  “그래. 서로 맞춰가도록 배우는 거지. 결혼생활이라는 게 쉬울 줄 알았어?”

  이제까지 지나쳤던 기념품점들은 다 고만고만한 크기에 갖춰놓은 물건도 비슷비슷해서 그리 눈길이 가지 않았는데, 여기는 매장 자체가 크고 지은 지 오래 돼 보이지 않는 새 건물에 신상품을 잔뜩, 갖춰놓았다. 정민 씨 말처럼 미리 물건을 사놓을 예정이 아니었는데도 그만 마음이 후욱, 빨려들어간다. 한참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구경하다 아차, 하는 심정으로 그를 찾았다. 대충 훑어본다고 해놓고 꽤 시간을 보냈다. 이건 뭐 나한테 짜증을 내도 다 내 잘못이다. 저기 반대쪽 끝자락에 그가 서서 제주도 풍경이 입혀진 달력을 보고 있다.

  “여, 보.”

  고개가 그대로 아래를 향한 채로 있다. 다시 불렀다. 여보. 여전히 움직임이 없다. 어련하겠어. 아직 익숙하지 않겠지. 익숙해지기는 할까? 가까이 다가가서 여보를, 반복하자 그제야 고개를 든다.

  “나 불렀어?”

  “응. 여보라고.”

  옅게 올라와 입술 근처에 걸리는 미소.

  “전혀 몰랐음.”

  “미안. 너무 오래 머물렀지?”

  “미안. 여보, 그 호칭이 아직 익숙해지지 않네.”

  “그럴 거야. 시간이 걸리겠지.”

  그가 손에 들었던 달력을 내려놓는다.

  “이제 나갈까?”

  “점심 먹을 시간이네. 점심 뭐 먹지?”

  내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자 그가 머쓱, 한 표정으로 궁금해하며 묻는다.

  “내 말이 웃겼어?”

  “그거 결혼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대사거든. 점심 뭐 먹지, 저녁 뭐 먹지.”

  그가 함께 웃어준다.

  “그런가?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네. 이제 나도 훌륭한 학생이 된 건가.”

  “언감생심. 한참 멀었거든.”

  “너무 구박하지 말라고.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점심으로 뭘 먹을지 고르다 점심은 대충 때우고 저녁을 제대로 먹기로 제안했다.

  “어제 너무 정신이 없어서 그냥 아무렇게나 넘겼잖아. 오늘 저녁엔 내가 솜씨를 발휘해볼게.”

  “굳이 그걸 마음에 둘 필요는 없는데. 주부 특유의 가족 챙기기인가 보군.”

  “그렇지. 남자들은 모르는 가정주부의 애환. 남자들이야 그저 밖에서 시간 보낼 궁리만 하지만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 마음은 다르다고. 혹여 한 끼라도 못 챙기면 그게 어찌나 마음에 걸리는데.”

  그렇게 결정을 하고 오늘 하루는 그대로 올레코스를 답습하기로 정한다. 한참을 걷다 점심 먹을 장소로 적당할 간이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식사를 마치고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쉬고 그러다 걷고, 그걸 반복한다. 해가 조금씩 내려오는 시각이 되자 차로 돌아가 식재료를 사러 갈 장소를 물색하기로 했다. 차를 주차해놓은 장소 근처에 다다르자 이전엔 보지 못했던 전망 좋은 자리가 눈에 들어온다.

  “이런 곳이 있었나? 차에서 내려서 나설 땐 미처 몰랐는데.”

  “아무래도 처음 와보는 곳이라 두리번거리다 놓쳤나봐.”

  “잠깐 저기서 사진이라도 찍을까?”

  내가 앞서 나가 철조망 바로 앞까지 도달한다. 그 아래 깎아지른 바위가 바닷물 속까지 이어져있다.

  “자세 잡아봐.”

  “함께 찍을까?”

  “독사진부터 찍어줄게.”

  그가 말한 대로 자세를 취하는 사이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그거 줘봐요. 내가 찍어줄 테니까.”

  머리가 새하얀 노부부가 어느새 옆에 자리했다. 아내 쪽이 찍어주겠다고 다가선다.

  “예에, 감사합니다.”

  그가 휴대폰을 넘기고 내 옆으로 온다.

  “아니 이 사람들 사진 처음 찍어보나. 뭐가 그렇게 어색해. 조금 더 붙어봐요. 바싹.”

  멈칫멈칫, 그가 조금씩 움직인다. 어찌나 부자연스러운지. 서로 살이 맞닿은 적도 있었는데 어째 이런 상황이 더 어색하다. 아예 그 노부인이 포즈까지 맞춰준다.

  “어깨에 손 올려봐요. 얼굴도 서로 더 가깝게 맞대고. 신혼이에요?”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내가 얼른 대답했다.

  “네, 네, 제주도 신혼여행 왔어요.”

  “구식시대 중매결혼 한 것도 아닐 텐데 어찌 그리 경직됐누. 둘 다 엄청 수줍은 성격이구만.”

  그렇게 쩔쩔매며 사진을 찍었다. 각자 독사진까지 찍고 다음엔 우리가 그분들 사진을 찍어주었다. 행복한 시간 보내라며 인사를 건네고 멀어져간다. 돌아보니 그의 목덜미에 땀이 맺혔다.

  “더워?”

  “사진 찍기, 쉬운 일이 아니네.”

  “더구나 누가 찍어준다고 하면 그때부터 예술작업 할 때가 자주 생기곤 하지.”

  입을 타고 터지는 소탈한 웃음.

  “우리가 보기에 그리 어색했을까?”

  “어어, 몰랐어? 함께 사진 찍기도 결혼생활 공부해야 할 과목 중 하나야.”

  하하하하. 그가 더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쉬운 게 하나도 없네.”

  그렇지. 세상살이 쉬운 건 흔치 않다.

  딱히 근처에 장 보러 갈 만한 곳이 없었다. 괜찮아 보이는 재래시장은 한참을 운전해서 찾아가야 했다. 결국 어제 들렀던 농협마트를 다시 찾았다.

  “무슨 요리 할 건데?”

  “아무거나 잘 먹어?”

  “딱히 못 먹는 건 없지.”

  “두부전골 어때? 돼지고기랑 해물도 좀 넣고.”

  “두부 좋지. 나 두부 좋아해.”

  그렇게 두부전골로 정하고 농협에서 장을 보았다. 섬이라 그런지 재료가 싸지 않다. 내색은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그런 셈을 하고 싶진 않다. 머리 아픈 일은 돌아가서 생각하는 거다. 준비하는 동안 그에게 먼저 씻고 나오라고 했다. 국물이 끓어오르는 사이 그가 젖은 머리를 하고 목에 수건을 걸친 채 다가온다.

  “냄새 좋은데.”

  “배 많이 고파? 다 되려면 아직 좀 더 있어야 하는데.”

  “괜찮아. 천천히 해.”

  그리곤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캔을 하나 꺼내더니 달칵, 그 캔을 따서 들이켠다. 듣고 있는

 내가 다 시원해질 만큼 벌컥벌컥, 목을 타고 내려가는 소리가 듣기 좋다.

  “저기, 여보.”

  그가 손에 맥주캔을 든 채 나를 본다.

  “열심히 저녁 준비를 하는 아내를 위해 마실 거냐고 물어봐야지 않겠어?”

  그 눈이 동그래진다.

  “혼자만 챙기지 않는 것도 결혼생활에서 배울 과목이거든.”

  “아, 그래, 미안. 마실래?”

  “아니. 지금 식사준비 중이잖아. 있다가 마실게.”

  “물어보라며?”

  “안 마셔도 물어는 봐야지.”

  얼굴이 뜨악, 하다는 듯 벌어진 채로 굳어진다.

  “원하지 않는 것도 물어보라고?”

  “그런 게 챙긴다고 하는 거야.”

  “쉽지 않네.”

  “결혼생활이 쉽다고 한 사람 본 적 없어.”

  흐르릅. 이번엔 조심스레 맥주를 삼킨다. 그를 불편하게 할 의도는 아니었는데. 잠시 침묵이 흐른다. 말이 없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소리, 탁탁탁, 내리치는 소리, 촬촬촬, 물이 쏟아지는 소리만 공간을 채운다.

  “텔레비전이라도 켤까?”

  “그래도 되고.”

  그가 텔레비전 리모컨을 찾다 짧게, 감탄사를 뱉는다.

  “이야. 이거 완전 구식 모델인데.”

  그의 손에 들린 건 오래돼 보이는 라디오였다.

  “그거 비슷한 거 어릴 때 우리 집에도 있었는데. 밤마다 듣곤 했어.”

  “심지어 채널 맞추려면 옆에서 이렇게 돌려야 해.”

  그가 감탄하며 웃음소리를 낸다. 옆에 달린 둥그런 조정기를 돌려 채널을 바꿔본다. 광고가 나오고 뉴스가 나오고 잠시 지지직, 거리는 소리에 이어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맑고 청아한 여가수의 목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운다.

  “나 이 가수 알아. 누구더라? 그래, 이소라잖아. 이소라 노래구나. 제목이 뭐였더라?”

  “이소라 노래는 아닌데.”

  “맞아. 이소라라고. 내가 잘 아는데.”

  남자의 낮고 나직한 목소리가 뒤를 잇는다.

  “이소라가 아니라…….”

  “맞다니까. 아, 듀엣곡이구나. 누구랑 함께 불렀지? 남자 가수는 모르겠어.”

  노래가 이어지고 그가 내 안색을 살피는 듯해 눈을 마주쳤다.

  “왜?”

  “억지 부리는 걸 맞춰주는 것도 결혼생활에서 배워야 할 과목인가?”

  “억지라니?”

  “이거 이소라 노래 아니거든. 남자 목소리 나오잖아.”

  “듀엣곡이니까 그렇지.”

  “듀엣곡도 아니야. 더 이상 이소라 안 나와.”

  “방금 나왔잖아.”

  “그게 다야. 이소라가 앞부분만 불러준 거지 다른 가수 노래야.”

  “제목이 뭔데?”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그랬나? 이소라 노래가 아니었나. 듣고 있으니 그 말처럼 이소라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남자 가수만 독창으로 노래를 부른다. 멀뚱히 서서 듣고만 있었다. 내가 틀린 건 알겠는데 억지 부리는 걸 맞춰주는 것도 배워야 하냐고 묻는 건 그렇잖아. 내가 얼마나 많이 억지를 부렸다고. 내 생뚱한 얼굴을 들춰보듯 바라보며 다가온다.

  “한 곡 추실까요?”

  내가 춤출 기분이 나겠냐고.

  “빼지 마시고. 노래가 이렇게 좋은데.”

  그가 팔을 훑더니 허리 근처를 휘감는다.

  “아니, 사람이 틀릴 수도 있지. 억지 부린다고 하는 건 그렇잖아.”

  “우리에겐 아무 일도 없겠지만.”

  내가 하는 말은 듣지 못했다는 듯 그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가 흔들어대는 리듬에 맞춰 같이 스텝을 맞춰 나갔다. 그 말대로 노래가 이렇게 좋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탁, 터지듯 질러댄다. 좌, 우로 나아갔다, 한 바퀴 그대로 돌아간다. 갑자기 그가 날 끌어당겨 진하게 입을 맞춘다. 마치 짓누르듯이.

  “당신이 고픈데.”

  불 위에 올려놓은 전골 국물이 더 많이 끓어올라 온전히 그에게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보통 결혼생활은 이렇게 센불에 데운 듯 급격히 끓어오르지 않아. 오히려 약한 불로 익히듯 천천히 달궈지지.”

  그가 나를 놓아주며 슬쩍, 한쪽 눈을 깜빡여 윙크를 건넨다.

  “아직도 배우는 중이네. 그 결혼생활이라는 거.”

  불을 끄고 국물맛을 확인한다. 흡족할 만큼 맛이 잘 우러나왔다.

  “탁자 위에 수저 놓아줄래? 이제 곧 먹어도 되겠어.”

  그러게. 아직도 배우는 중이지. 당신뿐만 아니라 나도. 결혼생활이라는 게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으니까. 탁자 위로 수저와 반찬을 담은 그릇을 옮기는 그를 가만히 바라본다. 나도 초창기엔 그처럼 서툴렀다. 아니, 더하면 더했지 그보다 나았다고 할 수 없을 만큼. 나에겐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이 남았다. 그도 배워가며 나아질 거고. 그런 게 아닐까. 결혼생활이라는 게. 흔들흔들, 흔들리며 나아가는 배를 타듯이 균형을 잡기 위해 이쪽으로 저쪽으로 쏠렸다 다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살아가겠지. 마지막 눈 감을 때까지 그렇게 반복하며. 하지만 우리에겐 일주일이라는 시간만 허락됐고, 그 사이 그는 내게서 나는 그에게서 얼마나 배울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배움에서 무얼 찾을 수 있을까. 그는 내게 여행할 때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고 했지만, 어쩌면 내 조급함은 제주도 여행이 아니라 그와 나를 향한 조급함일지도. 하루가 지나갈수록 그 조급함이 더욱 차오른다. 무릎 높이에서 시작했다면 허리께까지 올라왔고 금방 가슴팍을 지나 목 근처에 이르겠지. 질식하기 전에 더욱 다리를 빨리 놀려 차올라야 한다. 숨을 쉴 수 있게. 그렇게 일주일을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일주일이 아니라 평생을 버틸 수 있게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러기를 바란다. 반드시. 아님, ……, 질식해버릴지도, 모르니까.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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