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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경계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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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경계선 안쪽에서 살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밖을 넘게 될 상황에 처하면서 경계하고 그 경계하던 태도가 차차 변화하는 모습을 탐구해보려 노력했습니다. 경계선 바깥과 안을 넘나들다 결국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공감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책 재미나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경계 - 38 - 1
작성일 : 23-06-12 13:02     조회 : 197     추천 : 0     분량 : 1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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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등나무 - 환영

 

  수요일.

  주위에서 흔히 듣는 질문이 있다. 그런 질문은 대답하기 곤란해서 그런지 더욱 자주 듣게 된다. 마치 대답하는 사람을 곯리려는 용도인 것처럼.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라던지, 물냉이 좋아 비냉이 좋아라던지, 하는 답을 고르기 어려운 질문들. 내겐 산이 좋아 바다가 좋아, 라는 질문도 답하기 곤란하다. 둘 다 좋아하니까. 제주도는 산도 있고 바다도 있어 고르지 않아도 되니 좋다. 산에 가고 싶으면 산에 가고 바다가 보고 싶으면 바다 보러 가면 되니까. 오늘 일정은 한라산을 등정하는 것으로 정했다. 제주도까지 와서 그 유명한 한라산을 놓치고 갈 수는 없지.

  어젯밤에도 숙면을 취했다.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누우면 솔솔, 잠이 잘 온다. 그 말인즉, 정민 씨와 한 침대에서 잠만 잤다. 사람 마음이란 게 요상해서, 자주 볼 수 없을 땐 그가 그렇게 고프고 그의 살이 그리웠는데, 이제 이렇게 실컷 보게 되니까 그 간절함이 덜하다. 단지 일주일이라는 걸 잊고 어느새 진짜 부부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 걸까. 슬쩍, 그의 손가락을 건드려 본다. 맞다. 살아있는 존재다. 실제 인간이다. 그렇지만 그의 옆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어째 자꾸 현실감이 떨어진다. 난 그럴 자격이 없다거나, 너무 과분하다거나,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차오르는 걸까. 아님 이래선 안 된다거나, 이건 가당치도 않다, 같은 밀어내려는 의도인지도. 생각을 정리하러 왔는데 더 복잡해지고만 있다. 이러다 떠나는 날까지 아무 결론을 내리지 못하면 어쩐다지.

  “산 잘 타?”

  “못 타진 않아. 등산이 몇 안 되는 내 삶의 즐거움 중 하나거든.”

  “못 타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등산가 수준인 것처럼 들리는데. 오히려 내가 뒤에서 쫓아가기 급급하지 않을까 걱정이군.”

  “등산가 수준은 아니고. 산에 오르면 그렇게 좋더라고. 자기는, 산에 많이 올라봤어?”

  “별로. 나는 헬스맨이라서. 헬스장처럼 짜인 프로그램에 맞춰 해야 할 과제를 완수하는 게 좋지 여유롭게 산에 다니는 건 내 취향이 아니거든.”

  “아, 그 몸 헬스장 다니면서 다진 거구나. 난 헬스장에 가본 적이 없어.”

  “한 번도?”

  “단 한 번도.”

  “그렇구나. 누구나 자기 식대로 보는 건가. 난 내가 항상 헬스장에 다니니까 다들 그렇게 하는 줄로 당연시하게 되더군.”

  내게 맞는 게 모든 사람에게 맞을 리가 없는데 주변을 보는 시야가 사는 반경에 따라 좁아진다. 항상 보고 겪는 걸 당연시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사실 당연한 건 없지 않나. 다만 확률의 차이일 뿐이지.

  “아무리 여름이라지만 산 중턱을 넘어서면 쌀쌀해진다고 하니 긴 팔 옷도 가져가는 게 어때?”

  “그럴까? 허리에 묶고 다니다 추워지면 입으면 되니까.”

  “물도 한 병씩 챙기고.”

  “여보는 은근 꼼꼼한 성격이네.”

  “여보라.”

  “왜?”

  “자기까지는 그럭저럭, 들을 만했는데 여보는 정말 낯설다.”

  “자기나 여보나 거기서 거기 아닌가?”

  “귀에 꽂히는 느낌이 사뭇 달라.”

  자기, 와 여보, 의 차이라. 자기, 는 조금 더 가볍게 다가오려나. 여보, 는 더 어른스럽고 격식을 차린 듯하고.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신 어르신들이 많이 쓰는 용어다 보니. 괜히 짓궂어지려 한다.

  “여, 여보.”

  뜨악, 해지는 그의 표정. 이번엔 그 끝 발음을 더욱 늘어뜨리려 입술을 오므렸다.

  “여보오오옹.”

  “뭐야. 왜 이래?”

  “아아이, 여보오오오.”

  “그만 안 해. 한 대 맞는 수가 있어.”

  “어머, 무드 없긴.”

  “무드? 그러면 없던 무드가 생기나?”

  “낯설다고 하니까 익숙해지라고 반복하는 거지.”

  동시에 터져나오는 웃음. 밖으로 나서며 그에게 물었다.

  “그럼 선택의 여지를 줄게. 자기, 당신, 여보, 어떤 걸로 할래?”

  “자기.”

  얼른 대답하는 걸로 보아 자기가 편하긴 편한가 보다. 호칭이란 게 발음하기 그리 쑥스러운가. 난 아무렇지 않을 듯한데. 자기와 와이프. 그래, 그 정도야 내가 감수해주지. 새로운 것들을 익히는 게 쉽지는 않으니까.

  “자기는 산이 좋아 바다가 좋아?”

  그가 운전대를 한 손으로 고쳐 잡으며 고개를 돌린다.

  “갑자기 그건 왜?”

  “그냥. 흔히 하는 질문이잖아.”

  “생각 안 해봤는데?”

  “지금 해보지.”

  “머리 아픈 건 싫은데.”

  “그게 뭐 대수라고. 생각나는 대로 대답하면 되잖아.”

  “운전할 땐 운전에 집중해야지.”

  “핑계는.”

  자꾸 짓궂어지려는 자신을 추스르기 힘들다. 이것도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단계인 걸까.

  “그럼 짜장면이 좋아 짬뽕이 좋아?”

  “질문을 해도 꼭, 그렇게 어려운 질문 할 거야?”

  “아니, 이게 무슨 어려운 질문이라고. 머리 싸매고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떠오르는 대로 대답하라니까.”

  “그게 쉽지가 않으니까 그렇지. 다 좋은 걸 어떻게 고르라고.”

  “그래도 식당에 가면 골라야 하잖아.”

  “짬짜면도 있어.”

  “끝까지 대답은 피하네.”

  그렇다. 반드시 골라야 할까. 짬짜면처럼 반반, 먹을 수 있으면 좋잖아. 이것도 맛보고 저것도 맛보고. 하기야 사람은 그럴 수 없겠지. 이 사람도 맛보고 저 사람도 맛보고 그러면 좋겠지만 사람은 음식이 아니니까.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연애를 많이 해보라고 하나 보다. 다양한 맛을 봐야 정말 좋아하는 걸 고를 수 있을 테니까.

  “우와, 우리도 일찍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벌써부터 북적이는데.”

  “사람들, 휴가지에 와서도 참 부지런해.”

  이른 아침부터 주차장은 이미 붐빈다. 자리를 못 찾을 정도는 아니지만 예상보다 훨씬 많은 차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등산로 초입부터 마주치는 사람들 여럿과 인사를 나눈다. 등산을 하면 이런 게 좋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살갑게 인사를 나누게 된다.

  “초면에도 그게 잘 되나 봐?”

  “어때서? 지나가며 인사하면 반갑지.”

  “난 처음 보는 사람과는 불편해서.”

  이건 남녀의 차인가? 아님 성격이 그렇게 타고 나서? 인사가 불편하다는 그가 생경스럽다. 산에 오르다 누군가와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는 게 내겐 자연스러웠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는 거네. 그 사람이 하필 내 바로 옆에 있고. 게다가 그 사람은 좁고 경사진 길목에서 모여드는 등산객을 피하려 애를 먹는다. 그만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혀 얼굴빛이 금세 어두워진다.

  “괜찮아?”

  “으응.”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지나다 부딪힐 수도 있지.”

  “부딪힐 수도 있지만 예의는 차려야지. 이건 사람 툭, 쳐놓고 사과도 없이 지나쳐버리네.”

  “그러려니 해. 별 사람 다 있지. 모두가 그런 건 아니야.”

  “와이프는 마음 참, 편해. 그리 살면 스트레스 받을 일 없겠어.”

  내가 무던한 성격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오히려 현무 아빠가 상당히 무던한 사람이라 그 앞에서는 내가 예민한 사람이 된다. 이게 상대적인 거구나. 정민 씨 앞에서는 내가 무던한 사람이 되다니.

  “자기도 이렇게 좋은 한라산에 왔는데 이왕이면 마음씨 곱게 가지라고. 여기까지 와서 스트레스를 풀고 가야지 받아서 가면 안 되잖아.”

  “말이나 못하면.”

  짐짓, 삐친 얼굴을 하는 그의 등을 일부러 과장해서 두드려준다. 무던한 사람이 되는 게 기분 나쁘지 않다. 경사가 가팔랐다 완만해지기를 반복한다. 가파른 지점에선 띄엄띄엄, 흩어지던 등산객이 완만한 구간에 이르면 모여든다. 아무래도 경사가 완만해서 쉬어가듯 오래 머무르게 된다. 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일부러 완만한 구간에서 더욱 속력을 낸다. 그런 그를 따라가려니 힘에 부친다.

  “저기 남편 양반. 좀 천천히 가지.”

  문득, 어딘가에서 봤던 장면처럼 느껴진다. 그랬다.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나들이를 가면 꼭 아버지는 앞장서서 걸었다. 그런 아버지를 따라잡으려 어머니는 종종걸음을 치지만 간격을 좁혔다 싶으면 어느새 아버지는 다시 저만치 거리를 벌렸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남들처럼 부부가 같이 손잡고 다정하게 걸어가면 얼마나 보기 좋아, 라고 푸념하면,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며 못 들은 척, 더 속력을 냈다. 그게 이해되지 않았다. 왜 아버지는 어머니를 기다려주지 않는 건지. 지금 정민 씨가 똑같이 행동한다. 역시나 이것도 남자라는 동물의 속성인가. 기다려주지 못한다거나, 속력을 줄일 수 없다거나. 저만치 떨어져서야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찾더니 발걸음을 멈춘다.

  “뭐가 그리 급해? 한라산 관광하러 왔지 철인3종경기 하러 온 거 아니잖아.”

  “아, 미안. 걷다보니 이만큼 와버렸네.”

  그가 멈춰 선 자리에 도달해서 잠시 숨을 골랐다.

  “해야 할 과제를 완수하는 걸 좋아한다더니 등산도 해결해야 할 과제로 보는 거야, 지금? 상금이 걸린 것도 아니고.”

  씨익, 입술 한쪽으로만 짓는 미소.

  “와이프가 너무 느린 건 아니고?”

  “느리다니? 이래봬도 산 잘 타는 편이라고. 그렇지만 그걸 완수해야 할 임무로 보진 않아.”

  “알았어, 알았어. 속력 줄일게. 어쩌다 속도를 낸 거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니라고.”

  그 이후부터 나와 어깨를 맞춰 걸으려 노력한다.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은지 멀찍이 앞서갔다 서서히 간격을 좁혀 다시 나란히 걷길 반복한다. 노력한다는 사실만으로 감동이긴 하다.

  “이렇게 나란히 걷는 거 쉽지 않은 일인데.”

  “그것도 부부생활을 위해 배워야 할 부분이라고. 발 맞춰 걷기. 사실 우리 아버지는 그걸 잘 못했지만.”

  “그러셨어?”

  “항상 어머니가 달리듯 뒤따라야 했어. 어찌나 걸음이 빨랐는지. 어머니가 푸념해도 들은 체 만 체 했지. 자기 아버지는 안 그러셨어?”

  “부모님과 다녀본 적이 별로 없어서. 두 분이 어땠는지 떠오르질 않네.”

  그리곤 뒷말이 이어지질 않는다. 아, 괜히 주제넘게 물었나. 가정마다 속사정이 있을 테니. 얼른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내가 앞서 볼 테니까 잘 따라오라고.”

  “어, 그러셔.”

  기껏 호기롭게 말해놓고 앞장섰지만 얼마 가지 못해 금방 따라잡혔다. 그가 추월하지 못하도록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아니, 잘 따라오라더니 겨우 이 정도?”

  “기껏 한라산까지 와서 경주하듯 그럴 거야. 여유를 즐기면서 오르자고.”

  “앞서본다던 사람이 누군데.”

  경사가 완만할 땐 오를 만한데 그게 가팔라지면 힘이 든다. 거의 다섯 시간이 걸리는 긴 등반이라 동네 근처 산을 오르는 것과는 또 다르다.

  “힘들면 쉬었다 가도 되고.”

  “잠시 물 마실게.”

  차게 식혔던 물이 어느샌가 미지근해졌다. 그래도 목이 마르니 꿀맛이다. 꼬르륵. 그의 뱃속에서 소리가 난다. 머쓱한 표정이 얼굴 위로 떠오른다.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배가 고플 때가 됐지.”

  가방을 뒤져 준비해온 초콜릿과 막대 모양 빵을 꺼냈다.

  “언제 그런 건 준비했어? 난 물만 챙겨온 줄 알았는데.”

  “한 가정의 안주인으로서 가족이 배를 곯는 건 용납 못하지.”

  “나보고 꼼꼼하다더니 오히려 나보다 낫네.”

  “내가 주변 사람 잘 챙겨.”

  웃으며 입으로 음식을 가져가다 저만치 남녀가 섞여 앉은 한 무리를 발견한다.

  “우와, 저 사람들 봐봐. 여기까지 컵라면을 챙겨왔네.”

  “한국인은 라면 없인 못살지. 아아, 냄새가 좋긴 하네.” “그러게. 라면까지 챙겨올 생각은 못했어.”

  “라면도 부부생활을 위해 배워야 할 부분인가?”

  그가 미소짓는다.

  “라면 못 끓여서 소박맞았다는 얘기 어디서 들어본 거 같기도 하고.”

  내가 덩달아 미소지었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내게 맞춰 걷는 그의 걸음걸이가 더욱 능숙해진다.

  “이제 나란히 걷기 잘하는데. 잘 배우는 학생이네.”

  “잘 가르치는 선생님 덕분입니다.”

  “그런가? 이참에 선생님이나 돼볼까?”

  “안될 것도 없지. 아직 늦지 않았어.”

  멈칫, 생각이 한순간 정지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어릴 때 꿈이 선생님이었다. 교단에 서서 학생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지식을 전수하는 모습이 내겐 연예인보다 더 멋있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게 현실이 될 거란 생각은 부모님 돌아가시고 일찌감치 접어버렸다. 4년제 대신 택했던 3년제 원예조경학과. 지금도 그렇다. 언제 교육대학교 다녀서 교단까지 오른다고.

  “늦은 것 같은데. 나이 먹을 대로 먹어서 새파란 젊은 애들이랑 함께 공부해야 하는데. 책을 들여다 본 적이 한참 전이라 머리가 굳을 대로 굳어버렸다고. 졸업하고 교생실습까지 한참이 걸릴 텐데. 게다가 임용시험도 어렵다고 하고.”

  “변명 거리가 너무 많네. 하겠다는 의지만 있으면 그거 다 극복할 수 있을 듯.”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가슴 안에 자리한다. 상황이 나만큼 어렵지 않은 그의 입장에선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거부감. 그 말처럼 변명만 늘어놓고 할 의지는 없다는, 수긍. 교단에 서는 건 고사하고 학교를 다시 다닐 수나 있으려나. 생각만 해도 덜컥, 겁이 난다.

  “말이 없어졌군.”

  “어머, 저기 구름 모양 봐봐. 천사가 날개를 폈어.”

  “딴 소리는.”

  “아, 바람 좋다. 여름이라 덥긴 해도 산에 오르면 이렇게 시원한 바람이 식혀준다니까.”

  “뭣하면 자원봉사 자리부터 알아봐도 되지. 한글학교나 대안학교 이런 데서 가르치는 경험도 할 수 있을걸.”

  “자기 은근히 집착한다. 그냥 넘어가지.”

  “꿈은 그냥 넘어갈 거리가 아니잖아.”

  꿈이라.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방울. 우리를 앞지르는 등산객 커플이 이렇게 날씨가 화창하니 오늘 정말 운이 좋다, 라는 대화를 나누며 지나친다. 비가 올 수도 있었고 천둥번개를 동반할 수도 있었는데 해가 쨍쨍한 날이었다. 등산로 입구 근처에서 안개가 자욱하게 꼈던 걸 제외하곤 오르는 내내, 햇살이 밝게 비추었다. 구름이 간간히 지나치며 뜨거운 햇빛을 막아줬다 풀어주기를 반복하는 것마저 좋다. 제주도 한라산 검색을 하면서 어떤 등산객이 일부러 아침 일찍 서둘러 왔다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는 글을 보기도 했으니 운이 굉장히 좋았다고 할 수밖에. 그걸 지나가는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며 깨닫는다.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내 꿈도 정민 씨가 꿈이라고 하니 꿈인걸 상기한다. 그 말을 듣기 전엔 막연한 동경이었다. 그게 꿈이 될 수도 있구나.

  “허황된 망상일까봐 그러지.”

  “그게 허황된 건지 아닌진 해보기 전엔 모르지.”

  “괜히 시간 낭비하긴 싫은데.”

  “꿈을 좇다가 흘려보낸 시간을 누가 낭비라 그러지? 결국 실패해도 그건 낭비가 아니잖아.”

  실패했는데 낭비가 아니라고? 그렇게 볼 수 있나? 이루지 못했는데도 그걸 위해 노력한 시간은 헛된 것이 아니라고?

  “이제 저기 가파른 경사만 지나치면 정상이 보일 거야. 저 너머에 있는 전망대까지 오르려면 더 가야 하는데 어쩔래? 백록담에서 만족할까, 아님 전망대까지 가볼까?”

  다리가 천근만근이긴 하다. 허리도 뻐근하다. 땀에 젖은 상의가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처음 목표는 산 정상이었다. 전망대까지 따로 있다는 건 입구에서 지도를 보며 알았다. 그가 내 안색을 살핀다.

  “고민하고 있군.”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다 가보고 싶지?”

  “그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원래 거짓말을 잘 못하나?”

  “그렇다고 하면 그것도 거짓말인데.”

  “거짓말이 하고 싶으면 해도 돼. 하얀 거짓말도 있잖아.”

  “거짓말이 하얄 수도 있고 검을 수도 있나.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이지.”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

  사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힘에 부친다.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산을 꽤 탔다고 자부했는데 겨우 이 정도가 내 한계라니. 속이 상한다. 생각 같아선 한 달음에 정상에 올라 마음껏 소리를 질러보고 싶었는데 정상에 오르기도 전에 소리 지를 힘은 이미 남아있지 않다.

  “갈 거야.”

  “어디까지?”

  “전망대까지.”

  말을 꺼내놓고 바로 후회했다. 전망대는커녕 백록담 정상도 멀어보이기만 한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포기하긴 싫었다. 현실은 막막하기만 하고 그렇다고 포기하고 싶지는 않고. 분명 내 손에 닿지 않는 거리에 있는데 너무 간절히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무리를 해서라도 팔을 뻗어야 하나? 그러다 팔이 빠져버린다면? 팔이 빠져도 살아가려나? 아님 팔을 잃고서라도 목적을 이루면 평생을 후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한라산도 산일 뿐이야. 여기 오르지 못했다고 세상이 무너지진 않아.”

  “아니, 이제 와서 포기하면 세상이 무너지진 않아도 내 마음이 무너질 거 같아. 오를래. 정상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오르겠어.”

  “쓰러지면 안 되는데. 내가 업고 하산할 만한 무게보단 더 나가잖아.”

  “으휴, 위로가 되네요, 돼.”

  “아얏.”

  얄미운 말에 그저 툭, 건드렸는데 엄살을 피운다. 설마 쓰러지진 않겠지. 발을 뗄 때마다 양쪽 허벅지에서 욱신, 하게 통증이 퍼져나간다. 그러다 쓰러지면 어쩌지? 산 정상이면 헬리콥터가 뜨려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머리를 저어댔다. 내가 쓰러지긴 왜 쓰러져. 이 정도로 쓰러지진 않을 거다. 상의 전체가 흥건히 땀으로 젖었다. 자꾸 이마를 타고 눈썹 아래로 땀이 흘러내려 눈이 쓰라리다.

  “이제 여기만 올라서면 정상에 도달할 듯해.”

  여기만이라고. 계단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쭈욱, 이어졌다. 이걸 언제 다 밟고 올라선다지.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행이다. 계단 하나, 통증 한 움큼. 한때 운동선수가 부러운 적이 있었다. 특히 그들이 받는 고액의 연봉을 보고 저렇게 인기를 한몸에 받는데다 돈까지 많이 버니 참 좋겠다, 고 부러워했다. 그랬는데 그들이 하는 훈련과정을 찍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그 마음이 쏙, 들어가버렸다. 너무 힘이 들어 토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 내가 겪는 이런 고통을 그들은 매일같이 겪겠지. 돈 많이 벌고 유명세를 타는 게 결코 쉽지가 않다. 게다가 그렇게 힘들게 훈련을 했음에도 성공하지 못하고 그대로 묻혀버리는 운동선수는 또 얼마나 많을까. 스웨덴 가수 아바 노래처럼 오직 승자만이 다 가지니까. 패자는 그저 한 구석으로 조용히 물러나야만 한다.

  “우욱.”

  “괜찮아?”

  괜히 토하는 모습을 떠올렸더니 바로 욕지기가 올라온다. 다행히 토하지는 않았다. 이런 곳에서 토했다면 얼마나 볼썽사나웠을지.

  “괜찮아. 나 잠깐만 숨 돌릴게.”

  “무리하지 말라니까.”

  “아니야, 괜찮아. 이상한 상상을 했더니.”

  “이상한 상상? 내가 옆에 있는데도 상상을 한 거야? 아님 내가 옆에 있어서?”

  “하여튼 남자란 동물은 진짜 못 말린다니까.”

  “무슨 상상을 떠올린 거지? 내가 말한 상상이란 건 그런 게 아닌데.”

  “으이그. 그러다 한 대 더 맞는다.”

  “와이프, 이제 보니 은근히 폭력적이야.”

  “숨어있던 폭력성을 일깨워준 게 누군데!”

  욕지기가 가라앉은 후 다시 걸음을 뗀다. 괜히 오래 멈췄다간 더 이상 움직이고 싶지 않을 듯해 힘들어도 억지로 발을 놀렸다. 가야 한다. 저 정상까지. 정상이 바로 코앞인데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다. 정민 씨 말대로 겨우 산일 뿐인데 이제 내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됐다. 왜 그런 마음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도달해야 했다. 저길 오르지 못하면 평생 실패자로 살아야 할 거라는 간절함이 등을 밀어댄다. 정민 씨는 앞으로 나아갔다 속도를 늦춰 뒤처지기도 하며 나와 보폭을 최대한 맞추려 노력한다. 이제 아주 능숙한 남편감이 되었네. 나중에 칭찬 많이 해줘야겠어. 고산이라 그런지 아님 숨이 차서 호흡이 딸리는지 머리가 얼얼하다. 산소 공급이 제대로 안 되나. 흐릿한 시야 안으로 산 정상으로 보이는 곳이 들어온다. 바로 저기가 목적지다. 이미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곳에 도달해서 사진을 찍으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다. 그래, 다 왔어, 다 왔다고. 다리가 너무 무겁다. 그걸 들어올리려니 두 배로 힘이 드는 기분이다. 이제 조금씩 다리의 후들거림이 심해진다. 그 흔들림을 가라앉히려 무릎을 눌러대며 앞으로 나아간다.

  “나 때문에 너무 느리지? 먼저 올라가서 기다려도 돼.”

  “이제 다 왔는데 뭘. 바로 저기야. 힘내라고. 손 잡아줄까?”

  “아니, 혼자서 갈 수 있어.”

  입 안이 바싹 마른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이자 쓰라림이 전해온다. 어딘가 갈라진 듯하다. 힘이 드니 허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상체가 구부러져 숫제 꼬부랑 할머니 같은 모습으로 마지막 계단을 내려섰다. 바로 눈앞 한자로 쓰인 백록담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돌덩이가 자리한다. 정상에 서면 감개무량할 거라는 기대와 달리 그저 멍하니 숨만 빠르게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한다. 감동과 환희도 내 안에 에너지가 남아 있어야 제대로 만끽하지 이건 그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수고했어. 정상까지 왔네.”

  그가 환한 웃음과 함께 내 어깨를 툭, 툭, 건드려준다. 한참을 두 무릎 위에 손을 짚고 숨만 고르고 있었다. 천천히 잦아들 때까지. 숨쉬기가 편해지자 서서히 허리를 펴며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한라산 정상의 풍경.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사방. 불어대는 바람에 휩싸여 공중을 날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세상 가장 높은 곳에서 한없이 펼쳐진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 저만치에는 물이 깊게 고인 웅덩이가 자리한다. 웅덩이가 아니다. 호수라고 해야겠지. 이렇게 높은 곳에 자리한 호수라니. 실감이 들지 않는다. 어찌 저리 예쁘지.

  “산을 타는 모습이 너무 비장해서 차마 말조차 못 걸겠더군.”

  “속으로 좀 심각하긴 했어. 내가 쓰러지더라도 정상은 밟아야겠다고.”

  “그렇게 간절했어?”

  “많이.”

  “울 정도로?”

  “뭐어?”

  몰랐다. 정민 씨 말을 듣고 얼굴을 쓰다듬으니 촉촉한 물기가 전해진다. 정상에 도달해서 주변 풍경에 압도되어 그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던가. 울음이 나는 걸 모를 만큼, 그렇게 뭔가에 압도된 적이 별로 없었지. 그래, 잘 왔어. 수고했어, 한여은. 네가 자랑스러워.

  내 예상이 적중했다. 멈췄다간 더 이상 움직이고 싶지 않을 듯했는데, 잠시 쉬자고 편평한 돌덩이 위에 앉았더니 일어설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정민 씨가 재촉해도 허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한라산은 하산시각이 정해져 있어 그 시각이 지나기 전에 내려가야 한다.

  “전망대까지는 아무래도 무리겠네.”

  “거기도 반드시 오르고 싶었는데. 이름도 예쁘잖아. 사라오름 전망대라니.”

  결국 전망대는 가지 못했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이 악물고 힘을 주어 억지로 일어섰다. 허리가 숫제 돌덩이 같다. 내려오는 길엔 정민 씨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이리저리, 힘이 빠져 비틀거리는 두 다리를 혼자서 지탱할 자신이 없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무게 중심을 옮기며 아래로 향한다.

  “어떻게 하산 길이 더 힘들지? 되돌아갈 땐 별 무리없이 내려갈 줄 알았는데.”

  “내려서면서 땅에 닿을 때마다 무릎과 발목에 전해지는 충격이 오를 때보다 더 크지. 그래서 통증도 더 심하고. 오히려 하산할 때 더 다치곤 해. 조심하라고.”

  내려가는 길이 힘은 덜 들어도 다리에 충격이 더 많이 전해져 등산로 입구에 도달했을 땐 많이 욱신거렸다. 정상에 올라 느껴보는 그 감동은 거대했지만, 이걸 다시 오르라고 하면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다. 지금 당장은 그렇다. 아무리 예쁘고 멋있어도 그걸 감당할 수 있어야지 이건 거의 노동 수준이다, 노동.

  “뭐 먹지?”

  그래, 항상 듣는 소리. 점심 뭐 먹지, 저녁 뭐 먹지. 먹지 않고 살 수 없지만 어쩔 땐 한 알의 알약으로 때울 수 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맛을 즐기는 건 고사하고 배 채우기 급급하니까. 나 혼자였다면 바로 씻고 잠들어버렸을 거다.

  “나 많이 힘드네. 오늘은 대충 때우면 안 될까?”

  “그럼 가는 길에 농협마트 들러서 이것저것, 사자고. 라면 먹고 싶댔지? 라면도 사던가.”

  라면 먹고 싶다는 말을 내가 한 건지 정민 씨가 한 건지 기억이 가물하다. 어쨌든 이젠 라면도 귀찮다. 누가 떠먹여주면 좋겠다. 그렇게 바로 한 입 먹고 누울 수 있으면 좋으련만. 마트까지 어떻게 도달했는지 흐릿하기만 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물건을 집어서 계산을 마치고 얼른 차로 돌아왔다. 정민 씨에게 미안하게도 그가 숙소에 도착했다고 깨울 때까지 곯아떨어진 채로 있었다.

  “미안, 나만 자버렸네.”

  “괜찮습니다, 와이프. 얼굴 보니 툭, 건드리면 바로 쓰러질 상이네. 그래도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뭐라도 먹고 자라고. 먼저 씻어. 음식은 내가 준비할 테니까.”

  그저 그가 하라는 대로 고분고분, 움직였다. 씻고 나오니 뜨거운 국물이 담긴 컵라면과 족발, 보쌈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언제 족발과 보쌈까지 샀어?”

  “와이프 정말 힘든가보군. 계산할 때 못 봤나? 계산은 내가 했으니까 모를 수도 있겠네. 계산대에 올려 있었어.”

  기억에 없다. 상관없다. 음식을 집어넣으면서도 그게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기계적으로 먹고 마셨다. 그가 웃는다. 왜 웃지?

  “뭐가 웃겨?”

  “사람이 힘들면 만사가 귀찮아진다고 와이프가 딱, 그러네. 먹는 걸 꼭 해야 할 임무를 해치우듯이 먹어.”

  “솔직히 자기 아니었으면 바로 누우러 갔을 거야. 씹는 것조차 고역이네.”

  “그래도 이빨은 닦고 자. 충치 생기니까.”

  “아, 예, 이제 나를 아예 애 다루듯이 하는데.”

  “자신 몰골을 한 번 보라고. 애나 다름없어.”

  그런가.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본능적으로 움직이니 애나 다름없겠지. 그래도 이렇게 얌전한 애가 어디 있어. 애였다면 너무 힘들다고 벌써부터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거다. 양치를 하고 바로 자리에 누웠다. 선잠이 들었을까 문득, 요의를 느껴 눈을 떴다. 아, 화장실까지 가는 것조차 귀찮았지만 그건 무시할 수가 없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애나 다름없다지만 애도 용변은 봐야 하니까. 귀저기를 차고 있지 않으니 애처럼 누운 채로 해결하진 못한다. 잠에 취한 채로 흐릿해진 시선 때문에 더듬어가며 욕실로 향했다. 변기에 앉아 용변을 보다 아차, 싶었다. 귀에 들려오는 물 흐르는 소리. 그가 샤워칸막이 안에서 아직 씻고 있는 중인 걸 그제야 깨닫는다. 되돌리긴 이미 늦었다. 그도 내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당황했는지 움직임이 없다. 아, 어쩌지? 내 잘못이니 사과를 해야 한다.

  “저, 저기, 미안해. 잠결에 그만.”

  그가 잠시 말이 없다. 맙소사, 이게 뭐람.

  “너무 피곤해서 그랬나봐. 이건 정말 아닌데.”

  크크크크. 그가 참기 힘들다는 듯 웃음을 터트린다.

  “나 너무 놀라서 완전 굳어버렸다고.”

  양손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화끈거림이 멈추질 않는다. 정말 갈 데까지 가고 있다. 그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다.

  “이것도 배워가는 거겠지. 부부생활에 한 부분으로.”

  저절로 고개가 돌아간다.

  “아냐, 아니라고. 아무리 부부사이라도 이러진 않아. 그만 내가 너무 힘들어서, 잠결에 정신이 없어서…….”

  쿡쿡쿡.

  그만 좀 웃지.

  “다, 들렸어?”

  “뭐가?”

  “알면서.”

  “샤워기에서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와 비슷하잖아. 못 들었어.”

  “다 들었구나!”

  크하하.

  후다닥.

  욕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잠이 확, 달아나버린다. 역시 이건 실수였다. 그와 함께 부부역할을 해본다니. 아주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있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바닥까지 제대로 침잠한 기분이다. 문여는 소리가 들리고 그가 바닥을 밟는 인기척이 전해진다. 그렇게 가만히 있었다. 잠이 든 것처럼. 이불 한 쪽이 들춰지고 그가 파고든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기가 코로 피부로 전해진다. 스르륵, 팔을 훑는 그의 손바닥. 물기를 따라 머금었던 냉기가 피부를 통해 전해지고 그가 코와 입으로 내뿜는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자나?”

  대답하기 쑥스럽다. 그렇게 창피했는데 어떻게 그 얼굴을 마주하겠어. 그저 내 팔을 매만지는 그의 손바닥 감촉을 느끼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 궁금해서 실눈을 떴더니 바로 눈이 마주친다.

  “아직 안 자네.”

  “자, 잤어. 자다 깼어.”

  “와이프는 깊게 잠을 못 자는 편이야?”

  “그렇다, 고 하면 거짓말인데. 사실 잠은 잘 자. 부족해서 문제지.”

  “그렇다, 고 할 뻔 했네. 거짓말엔 능숙해.”

  “내, 내가 언제…….”

  그가 말을 다 듣지 않고 입을 맞춘다. 그의 혀가 내 혀 위로 놓였다 빠져나가고 그 입술이 내 입술 주위로 둥그렇게 모여 부딪혀온다. 문득, 이건 요긴한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욕실에서 주접떤 걸 만회하는 거다. 그를 향해 몸을 가까이 돌리고 일부러 소리를 내며 그의 몸 여기저기에 입을 맞춘다. 나를 보는 시선 안으로 궁금한 빛이 스며든다.

  “일부러 노력할 필요는 없는데.”

  “노, 노력이라니. 무드없게.”

  흐흐흐.

  “그렇게 느글거리게 웃지 좀 마.”

  “느글거리는 게 어떤 건데?”

  그가 입으로 내 목 주위를 위아래로 훑으며, 오르락내리락, 율동을 반복한다. 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뒤라 머리카락에서 뿜어져 나오는 샴푸 냄새가 향긋하다. 이전에 있었던 일은 모두 잊어버리도록 기분 좋게 해주겠어, 해주겠다고. 그런데 밀고 나오는 하품을 참을 수가 없다. 억지로 입을 오므려가며 숨을 내뱉고 하던 동작을 마치려고 노력했다. 그래, 그의 말이 맞는지도. 지금 난 노력하고 있다. 실수한 걸 만회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데 하품은 끊임없이 뿜어지고 자꾸 눈이 감겨온다. 계속 상기하자. 그의 달콤한 숨결, 부드러운 피부결, 따뜻한 눈결, 또 어떤 결이 있더라. 눈앞이 흐릿해진다. 일정한 리듬을 타며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기를 반복한다. 그, 그, 결이 어떤 게 있더라…….

 
작가의 말
 

 스토리야 웹페이지에서 용량제한을 하여 두 번에 나눠 올립니다.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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