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아닐 거야. 그보다 건실한 사람 같아서 호감이 생기는 거지.'
나는 나를 잘 안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소설 속에 나오는 한눈에 반했다는 장면은 나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한눈에 반하지 않았더라도 이유 없이 사랑에 빠지는 장면 또한 있을 수 없다.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겠지. 연수 선배에게 호감이 생긴 이유는 당연하다. 전기공학과에다 공부하는 자세로 보건대 자신의 미래 정도는 스스로 찾아갈 잠재력이 있어 보였고, 후배들을 배려하고 솔선수범하는 모습에서 그의 성정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배에게 가진 호감과 사랑은 동의어가 될 수 있을까.'
알 도리가 없었다. 이때까지 누굴 사랑해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사전적 의미로는 호감과 사랑이 다르지만, 사람의 마음은 사전으로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랑은 아니야.'
나는 결국 사랑이 아니라고 믿기로 했다. 굳이 사랑하는 마음을 찾아야 한다면 가족에게 사랑을 듬뿍 주고 싶다는 선배의 다짐에 있을 거다. 하지만 티클만한 이 마음조차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계산적인 사랑 같았다.
'게다가 나는 순유에게 이미 사랑을 줘버렸으니까.'
불필요한 것은 버리는 게 낫다. 특히 사랑을 받지도, 주지도 못할 사람은. 나 같은 사람이 사랑이란 감정을 들고 있으면 스스로 고문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나를 돌보고 위로한 역사 중에서 삼국지를 고르고 삼국지 중에서 순유라는 인물을 골랐다. 이유는 모른다. 그저 끌렸기 때문이다. 재능에 끌렸다고 하기에는 제갈량이 있었고 성격에 끌렸다고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데 순유에게 끌렸으니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아닐까.
'그러니 나는 연수 선배를 사랑하지 않아. 이유가 있으니까.'
어머니가 아버지를 선택한 이유는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내가 선배에게 호감을 느끼는 이유도 지극히 이성적이다. 하지만 순유는 아니다. 내가 얻을 이익도 없고 좋아하는 이유도 찾지 못하겠으니까. 어지럽던 마음이 정리되자 나는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
"잘 모르겠어. 하지만 선배의 눈을 한없이 바라보고만 싶고 친구가 선배와 함께 있으면 가슴이 아렸어. 되게 잘 어울렸거든. 비슷한 외모가 아닌데도. 게다가 선배가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하면 무척이나 기뻤어. 선배에 대해 알아가는 건 둘째치고 내가 선배에게 특별한 사람 같았거든."
하지만 이것으로 선배에 대한 내 마음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마음이 비워지기는커녕 더 채워졌으니까. 채워지는 마음만큼 선배를 향한 갈망도 커졌으니까. 나는 깜깜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보고 다시 조명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벚꽃을 바라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모르는 새에 선배에게 물들어버렸지 않았을까.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이 있듯이 같이 동아리 활동을 하다 보니까 선배의 존재가 커졌고 커진 만큼 선배에 대한 내 마음도 커졌을 거야. 처음에는 무슨 감정인지 모르다가 옷이 흠뻑 젖은 뒤에야 알게 된 거지. 이건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이번에는 벚꽃을 보는 대신 현을 바라봤다. 현은 줄곧 나를 보고 있었는지 표정이 굳어져서 절 입구에 있는 험악하게 생긴 조각상처럼 변해버렸다.
"??"
왜 저런 얼굴이지. 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앞을 안 보고 저렇게 걸으면 사람들과 부딪힐 텐데.
"뭐야, 무슨 문제라도 있어? 내 사랑 얘기가 별로야?"
"... 아니."
현은 아까와 다르게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내 말에 대답했다. 어깨도 움츠러들어서 누가 보더라도 기운 빠진 모양새였다.
"정현. 여길 봐. 그렇게 다니면 부딪힌다."
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벚꽃 길에서 나갔다. 현은 갑자기 잡힌 손목에 상당히 놀란 것 같았지만 순순히 나를 따라왔고 나는 그런 현이 커다란 대형견 같아서 피식 웃었다. 말 잘 듣고 반항하더라도 금방 풀려버리는 커다란 댕댕이네. 현은 손목이 붙잡힌 채로 나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우리 사진 찍자. 풍경도 아름다운데 그냥 지나가기는 그렇잖아?"
사실 이유가 있어서 현을 끌고 온 게 아니었다. 그냥 시무룩한 현을 보는 내 마음이 편치 못해서 끌고온 것이다. 하지만 현은 내가 무엇을 할지 상당히 기대했나 보다. 말하지 않아도 아까와 달리 눈에 생기가 돌았으니까. 그래서 꺼낸 것이 사진찍기였다. 여기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다시 벚꽃을 봐도 되겠지만 그러기 싫었다. 아까 현이 보였던 험악한 표정이나 시무룩한 댕댕이같은 표정이 다시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섭거나 이상하진 않았지만, 현은 웃는 모습이 가장 잘 어울렸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웃어주길 바랐다.
"현! 가까이 붙어!"
나는 나를 배려해서 한 뼘 떨어진 현을 팔로 감싸고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찰칵 소리와 함께 사진이 나왔지만 현과 달리 못생겨진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다시 찍었다. 현과 함께 사진을 찍으면 늘 느끼는 거지만 내 외모는 현보다 뒤떨어져서 찍을 때마다 내 못생김이 부각되는 것만 같았다.
"다시 찍자..."
"왜? 예쁘게 나왔는데?"
현은 내가 찍힌 사진을 보더니 사진 속에서 웃는 현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저장 버튼을 눌렀다.
"정말이야. 예뻐. 그러니까 나중에 문자로 보내줘."
그럴 리가. 객관적으로 봐도 현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못생기게 나왔다. 하지만 현이 나를 배려해서 괜찮다고, 예쁘다고 말하니까 반박은 하지 않고 한 번 더 찍었다.
"음~ 이제야 좀 괜찮게 나왔네."
9번이나 찍었을까, 나는 필터를 씌워서 본래 모습보다 더 예쁘게 나온 내 모습을 보고 만족했다.
"현, 이제 너 차례야.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했으니 이제 너도 전여친 이야기를 들려줘야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현도 여친과 함께 벚꽃이 피어나는 길가에서 사진을 찍었을까? 분명 나보다 예쁜 사람이었겠지. 이런저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좋았는데. 현은 내 감정을 눈치챘는지 머뭇거리다가 정말 말해도 되냐고 물었다.
"그럼. 너도 말하기로 했잖아. 궁금해. 니 이야기."
현은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민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다시 벚꽃을 보다가 끝없이 이어진 벚꽃길을 보며 얼마나 더 걸어가야 할지 가늠해보았다.
"이만 돌아갈까? 벚꽃 구경은 다 한 것 같은데. 돌아가면서 마저 구경하고 카페에 들어가서 쉬자. 벚꽃이 보이는 카페가 있으면 앉아서도 구경할 수 있을 거야."
현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운을 띄웠다.
"처음은 고등학생 때였어. 딱히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는데 그냥 등 떠밀려서 고백을 받아준 것 같아."
음, 그렇게 안 봤는데 현도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가지고 노는 재주가 있나 보다.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상대가 애매모호한 태도로 질질 끄는 것도 비참해지지만, 그보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을 주고받는 척 하는 게 더 비참해진다. 아무리 둔하다고 하더라도 상대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연애 감정을 유지한다니, 얼마나 화가 나고 슬펐을까. 현은 내 마음을 알았나 보다. 그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때는 친구들도 연애하고 나도 연애가 어떤지 궁금할 나이었으니까. 근데 사랑 없이 한 연애라서 오래가지 못했어. 먼저 차였거든."
그래도 면죄부는 못 준다. 하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묵묵히 현의 연애 이야기를 들었다.
"두 번째는 대학교 입학해서 지금과 비슷한 시기에 연애했어. 내가 먼저 고백한 건 아니고 상대가 먼저 고백했는데 사랑 때문은 아니야. 캠퍼스 커플이 어떤지 궁금했거든."
이놈, 상습범인가. 갑자기 현에게 가진 호감이 점점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나 또한 현에게 속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봤을 때는 현은 나를 좋아하는 눈치지만 사실은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나는 현과 점점 멀리 떨어졌다.
"윤서야? 이리 와."
"음..."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거 아니야. 난 진지해. ... 네 감정, 모습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할 만큼."
현은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멀리 떨어진 나를 봤다. 나는 현의 말에 공감하지 못했지만 한숨 한 번 푹 쉬고 다시 현에게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오는 바람에 순간 현을 놓치고 말았다.
"정현!"
여기서 현을 잃어버려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지 영원히 사라질 것만 같아서 황급히 그를 불렀다.
"윤서야. 나 여기 있어."
그는 걱정했던 나와 다르게 해맑은 아이처럼 방긋 웃으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순간이었지만 내 마음이 돌덩이를 달고 떨어지는 물건처럼 툭 떨어져서 현을 봤을 때 반갑기도 하고 당황하기도 했다. 사라지지 않아서 다행이지만, 나는 왜 현이 사라져서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을까, 몇 초간 고민했다.
"마저 얘기할까?"
"그래. 얘기해."
몇 주 같이 있었다고 많이 친해졌나 보다. 하지만 이건 사랑보다는 친구 같은 감정이겠지. 친구가 갑자기 사라지면 놀라니까. 현은 내 마음을 모르는지 그저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때의 연애 감정을 들려주었다.
"사실은 사랑하지 않았지만, 함께 지낼 당시는 좋았어. 같이 놀이동산에 가고 같이 수업도 듣고... 혼자서 하는 것보다 여럿이서 하는 게 더 재미있을 때가 있잖아? 내 연애는 그랬던 것 같아. 연인보다는 친구에 가까웠지. 하지만 여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원래 그게 당연한 거지만. 여친은 내게 사랑을 원했는데 나는 끝까지 사랑하지 못했어. 그건 내 전전여친, 전여친에게도 그랬고."
"그럼 넌 몇 번이나 사귄 거야?"
"학창 시절까지 합치면 총 4번?"
그럼 4명의 피해자가 생긴 거로군. 모두에게 차일만 했다. 현의 말로 유추해보건대 현은 그들을 여친이 아니라 여사친으로 대했고 여친은 현에게 남사친이 아니라 남친으로 대했으니까. 어찌 되었든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논 게 맞네.
"모든 연애는 그렇게 마무리되었지만... 나는 솔직히 미안하긴 해. 왜냐하면, 연애 감정이 좋았던 게 아니라 같이 한 추억이 좋았으니까.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그러니까 너 말은 여친들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연애가 궁금하기도 했고 연애에서 딸려오는 추억과 장소가 좋았기 때문에 사귀었다는 거야?"
"응..."
그럼 현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건가 아니면 이 시기에 겪을 수 있는 추억 때문에 여기에 있는 건가. 전자였으면 좋겠는데 후자도 가능성 있어서 깊은 바다에 잠긴 듯이 기분이 계속 가라앉았다. 어느새 벚꽃으로 가득 찬 길을 빠져나가는 출구가 보였고 나는 성큼성큼 현을 제치고 앞으로 나갔다. 현은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오는 나를 보고 황급히 뒤따라왔다.
"현, 생각해놓은 카페 있어?"
"있는데 네가 마음에 들지 모르겠어."
"괜찮아. 거기로 가자."
아까와 다르게 나는 현이 오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앞서 걸어가다가 그가 찾은 카페가 어디인지 모른다는 사실에 우뚝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