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전화를 왜 안 받아? 호준은 건물 밖으로 나와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관엽수 사이 놓인 야외의자에 자리를 잡는다. 휴대폰에 입력된 단축번호를 반복해서 누르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오른다리 위에 올려진 왼다리가 간헐적으로 떨리고 있고 손을 들어 목을 긁적이는 동작은 초조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무심코 오른쪽으로 고개를 틀었을 때 바로 앞에 누군가 서 있자 '억'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상체를 휘청거린다. 앞에 있던 사람은 별다른 반응 없이 자연스레 호준의 옆으로 가 자리에 앉는다.
“왜 그렇게 놀래?”
자신을 놀라게 한 당사자가 아무렇지 않게 나오자 오히려 무안해진 호준은 너무 조용하게 나타나서 있는 줄도 몰랐다며 얼버무린 채 시선을 피한다.
“네가 딴 생각에 빠져있다 내가 다가오는 것도 몰랐겠지.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데?”
담배를 꺼내들며 너도 한 대 줄까라고 묻자 호준은 됐어요라며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점심시간에 맞춰 건물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호준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두 명의 여자가 서로 팔짱을 끼고 입과 발을 바쁘게 움직이면서 지나간다. 그들의 수다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아 웬만한 거리에서 다 들릴 정도다.
“나 휴대폰 바꿨는데 완전 망했어. 모양만 이쁘고 기능은 완전 별로.”
“그 폰 얇아서 좋아 보이던데 신통치 않은가 보네.”
옆으로 지나가는 여자들의 수다에 잠깐 정신이 팔렸던 호준은 옆사람을 쳐다보며 천천히 말을 꺼낸다.
“주임이 파트 또 돌리려나 봐.”
“주임이 직원들 한 곳에 잘 안 두려고 하잖아. 나는 계속 칼질 하는데 있었으니까 이번엔 뼈 고르는 데로 보내지려나?”
지나가는 여자들의 수다가 신경이 쓰이는지 호준은 산만하게 양쪽을 흘끔거린다. 그들의 얘기를 듣느라 대화가 멈춘다.
“근데 너 그거 얘기 들었어?”
“뭔 얘기?”
작업하다보면 자꾸 이상한 소리가 한 번씩 난다더라. 아무도 안 건드렸는데 '퉁'하고 벽을 치는 소리가 나거나 이상하게 울리는 진동이 느껴지기도 하고."
“그거 공장 소음 때문에 이명이 들린 거 아냐?”
“여러 사람이 같은 소릴 들었다면?”
“다들 비슷한 증상을 겪나 보지.”
여자들 방향으로 시선을 주던 호준은 더 이상 그들의 얘기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자 옆사람을 향한다. 남자는 담배를 입에 물고 손에 든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결혼 준비는 잘 되고 있는 거야? 챙길 거 많지?”
“그렇죠 뭐.”
시큰둥한 호준의 반응에 시선을 들어 호준을 본다.
“새신랑 될 사람 태도가 영 시원찮다. 뭔 일 있어?”
“일은요. 여러 가지 신경 쓸 게 많아서 피곤해서 그래요.”
다시 휴대폰을 바라보며 담배를 문 입으로 연기를 내뱉는다.
“그게 다 그렇다. 쉬운 게 없어.”
호준은 망설이는 모습으로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어렵게 질문을 꺼낸다.
“종석이 형. 형 결혼할 때도 형수랑 많이 다퉜어요? 의견 안 맞는 일 있으면 어떻게 했대?”
한 손엔 담배, 다른 손엔 휴대폰을 쥔 상태로 종석이 눈을 맞춘다.
“말도 마라. 그냥 다투기만 했을라고. 싸우고 열에 받쳐서 방방 뛰다가 화해하고 다시 시작하고 그러기를 여러 번 했지. 이건 숫제 전쟁이더라, 전쟁. 여자들 절대 만족하지를 못해. 그래도 마지막엔 남자쪽에서 고개 숙이고 들어가야지 안 그럼 일 커진다.”
거의 다 타버린 담배를 비벼 끄고 휴대폰에 몰두하는 종석을 보는 호준의 눈에는 망설임과 난감함이 교차하고 있다. 터놓기 어려운 말. 그렇지만 혼자서 삭이기도 힘들어 어떻게든 퍼내고 싶다. 답답한 호준은 마지못해 입을 연다.
“형수가 형이 결코 안 된다고 하는 걸 끝까지 고집 피운 적은 없었어?”
종석은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한다.
“한두 번이겠어. 어르고 달래다 내가 한 수 접어주기도 하고 그랬지. 그런데 결혼할 마음이면 결국 한 발자국씩 양보하게 되던데. 나나 그 사람도.”
결혼할 마음이라는 단어가 쓱, 호준의 이마로 들어온 것 같다.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해가 걸쳐진 건물의 옥상을 향해 눈을 올린다. 눈이 부셔 인상이 찌그러졌지만 피하지 않겠다는 듯 꿋꿋이 쳐다본다. 마치 고개를 내리면 지는 듯이.
그렇게 위를 향한 채 툭, 내뱉은 말은 다짐이라기보다 확신이 서지 않는 자문이다. 답을 구하기 힘들어 누군가에게 대신 찾아봐 달라고 하고 싶은 그런 문의.
“결혼을 걸고 설득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