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동네 허름한 단층집, 대문을 두드리자 정선희가 마루로 나선다.
"거어 누고?"
"나 박기태입니다."
"아니! 박 전무님이 우리집에 우얀 일인교?"
"문이나 좀 열어 보시지요."
고개 갸우뚱거리며 대문을 열고는,
"우리집은 우예 알았능교?"
"서울 가서 김서방도 찾는다는데 아줌마 집을 못 찾겠오?"
"무슨 일로 날 찾아 왔는교?"
"집에 혼자 계시나 본데 들어가기는 뭣하고, 저 아랫동네로 내려가 뭘 드시면서 이야기 좀 합시다."
"내가 전무님하고 할 이야기가 뭔교? 고마 여어서 말 씀 하이소."
손에 든 꾸러미를 내민다.
"빈 손으로 오기 뭣해서 굴비를 한 두름 사왔습니다."
"이런 거 받을 이유가 없는데..."
그때 한 청년이 언덕길을 올라 와 기태의 뒤에서 걸음을 멈춘다.
"가져 온 것이니 받기는 하지만 나한테서 뭘 알아 낼 생각은 하지 마이소."
"이것 참! 경계부터 하시니 물어 볼 엄두가 안 나는구먼."
뒤를 돌아 보고는,
"이 분은 누구신데 남의 얘기를 엿듣고 계시나?"
"아들이라 예. 얼마 전에 제대하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다 아입니꺼."
"옴마 찾아 온 손님인 모양인데 와 밖에 세워놓고 있노?"
"니는 들어가 있거라."
"비싼 굴비까지 들고 온 손님인데 그라모 안 되지. 손님! 안으로 들어가입시다."
"고맙그만..."
안으로 들어가 마루에 걸터 앉는다.
"무슨 얘긴지 어서 하고 가이소 마."
"다름이 아니고, 가현이한테 에미를 찾아주는 일에 힘을 보태주십사 하고 찾아왔습니다."
"그 무슨 귀신 씨나락 까묵는 소린교?"
"내가 저지른 일이 있으니 그런 소리 들어도 쌉니다만 이번 일은 경우가 다릅니다. 얼마 전에 우연한 일로 가현이 생모가 살아 있다는 꽤 믿을 만한 얘기를 들었지 뭡니까."
"거짓말 하지 마이소. 가현이 에미는 가현이 낳다가 죽었단 말이요."
"나도 그리 알고 있었오만 사실이 아닐 수도 있어요. 영추 형님의 입에서 나온 말일 뿐 묘지도, 제사도, 심지어 결혼 사진을 비롯해서 사진 한 장 본 일도 없잖습니까?"
"그기사 사장님이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없애버릴 수도 있제. 내는 마 박 전무님이 또 무슨 꾀를 낼라꼬 이러나 싶기만 합니더."
"허 참! 선의가 안 통하는군. 어떤 여자가 영추 형님과 고아원에 맡긴 아이를 찾아 다니더란 말을 들어서 이럽니다."
"혹시 그 여자가 생모가 아닐까 싶어서요."
"암튼 내는 박 전무님 말이라 카모 콩으로 메주를 쑨다 캐도 곧이 안 들린깨 헛수고 그만하고 가이소."
"그럼 나한테 한 가지 도움만 주시오. 가현이가 있던 고아원 이름이 뭡니까?"
"그 거 알아서 뭐할라꼬 예? 모르기도 하지만 알아도 갈챠 줄 생각은 없소."
"손님한테 너무 하는 거 아이가? 그 여자가 진짜 가현 씨 생모라 카모 옴마야 말로 죄짓는 기다."
"니가 뭘 안다고 나서노?"
손목 시계를 보며,
"시간이 벌써 이리 됐나? 약속에 늦겠군."
명함 마루에 두고는,
"혹시 생각이 나거든 전화 주시지요. 형님을 대신해서 사례는 톡톡히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기태가 가버리자,
"옴마. 그 고아원 진짜 모르나?"
"알모 뭐 하그로? 저 악마거턴 인간이 또 무슨 해꼬지를 할 지 모르는데."
"그 기 무슨 소리고? 저 사람이 사장님을 형님이라 카던데."
"니는 몰라도 된다 카이."
"옴마는 그 고아원을 알고 있는 가베?"
"니하고는 상관없는 일인깨 관심 꺼."
*****
대양빌딩 4층의 전당포에 나타난 기태가 복도에서 철망 친 유리창을 통해 소리친다.
"날 밖에 세워 둘 참이오? 그러지 마시고 안에 들어가 얘기 좀 합시다."
"대통령이 와도 안에 들이지는 않아."
"내가 도둑질, 강도질이라도 할성싶소?"
"좋은 일로 올 자네는 아니지."
"그러지 맙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담판을 하러 왔지 전 형을 강압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오."
"담판이고 뭐시고 싫다는데 와 자꾸 와서 치근대?"
"좋수다. 까막소 면회왔다 치고 여기서 얘기합시다. 전 형은 언제까지 이러고 살 생각이오? 늙고 몸마저 성치 않은데 그만 전당포는 나한테 넘기고 작은 아파트나 한 채 사서 여생을 사시는 게 좋지 않겠오? 값은 후하게 쳐 드릴 테니 막무가내로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생각 좀 해보시구랴."
"생각은 무슨. 나는 여기서 살다가 송장이 되서 나갈거인깨 헛 꿈 꾸지 말라우."
"제발 물에 빠진 사람 건진다 치고 귀 좀 기울이시오. 나는 이 건물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몸이오. 내 사업의 뿌리가 여기에 박혀있다는 걸 전 형도 잘 아시잖소?"
"그러게 평소에 선하게 살 것이지 악한 짓은 와 해 갖고 이 난리야."
"전 형이 뭘 안다고 그런 험담을 함부로 입에 담소? 동냥은 못 줄 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 헀오. 다시 올 테니까 잘 생각해 보시오."
기태가 사라지자 전 노인이 혀를 찬다.
"저 인간이 똥줄이 탔군."
****
거실의 전화 벨이 울리자 화영이 수화기를 집어든다.
"큰오빠구나? 옴마. 옴마! 미국서 온 전화야."
"옴마다."
"귀국을 해?"
"잘 됐다. 축하해 아들."
"큰오빠가 귀국한대?"
"취직이 돼 온다는구나."
"어떤 회사래? 대기업이래?
"영어라서 몬 알아 들었어."
"다행이야. 큰오빠 덕분에 서울서 대학 다닐 수 있게 돼서."
"니는 우찌 생겨 먹은 머리가 그리 빨리 돌아가노? 김칫국부터 마셨다가 실망할라고."
"난 대학은 무조건 서울서 다닐 거야."
"아빠가 엔간히 그러라 카것다."
"옴마 돈으로 나 공부시켜 주모 되잖아?"
****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귀가한 기태를 정숙이 소파로 이끈다.
"동수가 귀국한대요."
기태가 웃음을 싹 지워버리며,
"이제 나와봤자 버스 떠나고 손 흔들기지."
"아직도 그 미련을 못 버린 기요? 취직 돼 오는 기라요."
"부자인연 끊자하고 가버린 놈인데 취직을 하든 지랄을 하든 내 알바 아니야."
"당신이야 말로 부자인연 끊자고 드는구먼."
정숙이 방으로 들어가버리자,
"등신같은 놈! 그 깟 취직해서 어느 세월에 기반을 잡아. 제 역할을 잘 했으면 집구석이 이 모양 이 꼴은 안 되지."
****
부산역 게이트를 나오는 동수를 정숙과 화영이 마중한다.
"짐은 우짜고 빈 몸이야?"
"회사에 맡겨 뒀어요. 회사에 들렸다 오는 길이거든요."
"그 회사 대기업이야?"
"아니. 본사는 미국에 있고 서울에 있는 건 지사야. 대기업이 아니라서 실망했니?"
"대기업이라야 친구들한테 자랑을 하지. 우리나라에서는 대기업 취직이 짱이거든."
"우리 막내를 실망시켜서 미안한데."
"난 대학은 서울서 다니고 싶은데 큰오빠가 도와주모 안 될까?"
"안 될 것 없어. 너 하나 공부시킬 연봉은 되니까."
"그래. 오피스텔 하나 얻어 줄긴깨 느그 둘이서 살아."
"어머니한테 그럴 돈이 어딨어요? 집안이 쑥대밭 됐다던데."
"누가 그라더노?"
"동우지 누구겠어요. 조폭을 시켜 가현이를 납치한 얘기도 들었어요."
"공부하는 니한테 별소릴 다 했구나. 우리집이 쑥대밭 된 건 아니야."
"그동안 제 학비는 누가 보냈어요? 아버지가 보냈을 리는 없는데."
"옴마가 보냈어. 백부님이 옴마한테 돈 나올 구멍을 따로 만들어 줬거든. 한시적이지만."
"백부님이?"
"너희들 학자금 하라고 매달 돈을 넣어주고 있어. 화영이와 나만 아는 비밀인깨 니는 모르는 걸로 해."
"우리 가정이 어쩌다 이런 꼴이 됐지? 두 쪽이 나버렸잖아."
"느그 아부지 욕심 때문이지 뭐."
"별거했을 때 이혼하지 왜 되돌아 왔어요?"
"자식들 때문에 모진 마음 무우도 모래탑이더라. 대학 입시 앞 둔 화영이가 눈에 밟혀서."
"큰오빠는 미국서 사귄 여자 없나?"
"유학생이 여자 사귀면 공부는 종치는 거야."
"그라모 가현 언니가 더욱 생각 나것다."
"야가 가현이는 와 들미노? 큰오빠 마음 아프거로."
"직장 안정되면 가현이를 만나 볼 생각입니다."
"그래봤자 깨진 사금파리 아이것나? 니만 또 상처입고."
"백부님 재산 노린 파렴치한이란 이미지는 벗어야죠."
*****
아침밥상에서 영추가 묻는다.
"오늘이 차 뽑는 날이지?"
"맞심더. 같이 가 보실라고 예?"
"새 차로 시운전 삼아 교외로 드라이브 하자고."
"나만 빼놓고?"
"넌 학교 가야 되잖아?"
"약 올라서 해 본 소리야?"
"나도 이제 운전 배워서 외제차 하나 살 거야."
"운전이야 배워두는 것이 좋지만 차는 한 대로 충분해. 난 이제 차 쓸 일이 별로 없어."
"사업 안 할 거야?"
"뒷방 늙은이로 너희들 뒷바라지나 할 생각이다."
"쳇! 여든도 안 됐는데 뒷방 늙은이가 뭐야! 하는 일이 있어야 늙지 않는다고."
"앗으라. 나는 기력이 딸려서라도 사업은 못 한다. 그 대신 너희들한테 사업수완은 물려 줄 수가 있어."
"에게! 사채놀이, 대부업같은 건 절대 사절이야."
"망할 놈! 누가 그런 수완 물려주겠대? 애비의 진짜 수완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이..."
***
새 차로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휴게소를 들린다.
"차도 뽑았겠다, 집안도 안정시켰겠다, 이제 네 문제만 남았어. 공부해서 대학 가라는 말을 귓전으로 흘려버리는 너니 사업체라도 하나 만들어 맡겼으면 하는데 어때?"
"제 의무는 우짜고요?"
"말했잖아. 난 뒷방늙은이로 있겠다고."
"꼭 해야 한다면 공부보다는 사업쪽입니더."
"그럼 됐어.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을 관리하면서 부동산 사업을 하는 거야."
"내 재산의 알짜가 부동산이었다는 것 알지?"
"그 방면엔 문외한이지만 배워보것심더."
*****
기태의 귀가에 맞추어 저녁식탁이 차려지고 온 가족이 오랜만에 모여 앉는다.
"취직이 돼 귀국했다고?"
"그런 셈입니다. 귀국하기 위해 취직을 했다는 편이 더 맞지만요."
"무슨 말이 그래?"
"우리집이 망했다는데 취직밖에 더 합니까?"
"어떤 회사야?"
"투자와 엠엔에이를 전문으로 하는 미국회사 한국지삽니다."
"기업사냥꾼 말이구나?"
"그 비슷합니다."
"연봉은?"
"제 한 몸 살아가기에 충분한 연봉입니다. "
"네 한 몸 잘 살라고 유학까지 보낸 줄 아니?"
"다른 부모들은 자식이 살 집도, 결혼비용도 대준다던데요.
화영이가 서울로 가 대학을 다니면 학비 정도는 제가 책임지죠."
"넌 애비가 안겨 준 복을 걷어차버렸어.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는 사회생활 해보면 알게 돼."
"그 복을 제발로 달아나게 만든 건 아버지라고요. 왜 저한테 허물을 씌우세요?"
"네가 간수를 잘 해도 내가 그랬겠니?"
"그만 하시죠. 물 건너가버린 복덩인데 누구 자잘못 따져 뭣해요."
기태가 수저를 탁 소리나게 내려놓고 식탁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