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륜동의 고래등 같은 한옥의 대청마루에 교자상이 놓이고, 영추네와 종구네 가족 다섯이 둘러 앉아 식사를 한다.
"오늘같은 기념적인 날에 축배가 없어서는 안 되지. 가현아, 포도주 한 병 가져오너라."
"안 돼! 금주 결심이 흔들릴 수도 있단 말이야. 쥐구멍이 제방의 둑 무너뜨린다는 말도 못 들었어?"
"알았어 욘석아! 그럼 밥먹으면서 서울에 온 기분이 어떤지 한 마디씩 해 봐."
가현이 먼저 말한다.
"난 서부개척자가 된 기분이야."
"가질것 다 가졌는데 개척자가 뭐냐?"
"어쨌든 새출발이잖아. 인생설계도 다시 해야하고 친구도 사겨야 하는데."
"종구 너는 어때?"
"저는 부산이나 서울이나 별로 다를 기이 없심더."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부터는 신천지에 왔다는 생각으로 너 자신을 되찾아 보도록 해. 서울은 네가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악연의 도시지만 기회의 도시가 될 수도 있어."
"노력해 보것심더."
"내일은 가사 도우미가 올 거야. 탈북자야. 내 고향이 북쪽이라서 그런지 이왕이면 동향사람을 들이기로 했어.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탈북자라도 상관없어. 단 늙은이는 싫어."
"서른도 안 된 젊은 여자라니까 부지런 하고 빠릿빠릿할 테니 동생같이 생각하렴."
*****
종구가 서대문 네거리의 대로변에 서서 길 건너 7층 건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5층 유리창에 흥국건설이란 네 글자가 큼지막히 쓰여있다.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것. 비록 나 대신 변호사가 한 약속이지만 지켜야지. 내 가슴속의 응어리도 이젠 콩알만 해 졌는데>
택시 잡아 타고,
"서초동"
"서초동 어디요?"
"법원 정문 앞에 내려주면 됩니다."
택시를 내린 종구, 경삿길을 쌩쌩 달리는 차들을 바라보며,
'어머이가 사고난 곳이 여기란 말이지? 이런 길을 무단횡단 하려고 했다면 넋이 나갔거나 자살을 기도했던 거야. 얼마나 괴로웠으면...'
***
집으로 돌아 온 종구가 마루의 소파에 앉아 있는 영추에게로 가 다소곳이 앉는다.
"네가 어딜 돌아다니다 왔는지 맞춰볼까?"
"짐작하신 대롭니더."
"사고친 현장을 가보니 어땠어?"
"뉘우침만 되씹다 왔심더. 가슴속 응어리가 작아진 것도 확인했고 예."
"그럼 됐어. 널 해친 사람들을 용서하고 , 친구로까지 만드는 걸 보고 네가 결코 악인일 수가 없다는 걸 알았지. 조만호에게 복수를 하고 싶거든 피의 복수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복수 해."
"다른 방법이라면..."
"나 보란 듯이 성공해 보이란 말이야."
"저한테는 꿈 같은 일입니더."
네 장점을 올바로 쓰면 무엇이나 할 수 있어. 왜 안 된다는 생각부터 해?"
"되잖은 꿈은 가져 뭐 합니까?"
"이런 답답한 사람을 봤나? 자기가 가진 장점을 모르다니.
무적의 무술인이 되는 데는 좋은 근골과 타고난 힘도 있어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집중력과 노력이야. 그 장점을 무술 아닌 무엇엔가에 돌린다면 반드시 경지에 도달할 수 있어."
생각에 잠기는 종구를 보고 몸을 일으키며,
"잘 생각해 봐. 난 방에 들어가 좀 누워야 되겠어."
뒤란채에로 간 종구, 민숙이 일하고 있는 부엌을 우두커니 들여다 본다.
"내한테 할 말 있나?"
"특별히 할 말은 없고, 살기가 어떤가 싶어서..."
"내사 마 부산이나 똑 같은데 옴마가 문제야. 또 집에 가자고 조른다 아이가."
"어머이한테는 환경 바뀌는 게 해로운 모양이다."
"마당이 낯설고 좁아서 그런지 방에서 잘 나오지도 않아. 그 왕성하던 식탐도 줄어들었어."
"어머이도, 너도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겠지. 나도 정신적으로 공황상태 비슷한 걸 겪고 있어."
"서울에서 있었던 괴로운 일들이 생각나서 그런 거 아이가?"
"그런 점도 있고, 긴장이 풀려서 더욱 그런가 싶다.
재만이 하고는 통화 자주 하나?"
"매일 한 번씩은 해. 공부하라는 소리를 해사서 탈이지만."
"니가 올 안에 검정고시를 통과하는 기이 내 희망이야."
"오빠까지 날 기름짤 기가?"
"아 - 알았어. 난 그만 간다."
*****
일요일 오후, 무협지를 읽고 있는 종구를 가현이 마루로 불러 낸다."
"무슨 일로 불렀습니까?"
"앉아 봐요."
종구가 의아한 표정인 채 소파에 앉자,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집에 있으면 좀이 쑤시지 않아요?"
"내가 왜 하는 일이 없습니까. 난 엄연히 사장님의 보디가드라고요."
"쳇! 억지 부리지 말아요. 보나마나 방에 틀어박혀 무협지나 읽으면서 빈둥거리잖아요."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요?"
"과일 가져오면 먹고 나하고 시내 구경 좀 다녀 봐요."
"가현 씨와 둘이 말입니까?"
"나하고 다니기 싫어요?"
"싫다기 보다는 엉뚱해서요."
그 때 영순이 과일을 깎아 마루로 가져온다. 가현이 영추를 불러내면서 대화가 중단되고 만다.
"이 거 먹고 우리 둘은 구경하러 갈 건데 아빠도 갈 거야?"
"구경은 너희들이나 다녀. 난 차 없이 다니기는 힘에 부쳐."
명륜동에서 걸어 동숭동 대힉로로 간 가현과 종구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거닌다.
"그 쪽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서 살았다고 했죠?"
"일 년간 살았죠."
"그 정도면 서울의 명소들은 다녀 봤을 것 아니예요?"
"조만호란 원수를 찾아 다니는 데 온 정신을 팔고 있어서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습니다."
"이곳에 서울대학의 여러 단과대학들이 집중되어 있던 데라는 것 알아요?"
"모릅니다."
"쳇! 서울에 일 년이나 살았다면서 대학로도 안 와 봤다는 게 말이나 돼요?"
"....."
"이제 모든 풍파가 지나가고 평화를 맞았는데 그 쪽도 지금부터 뭘 할지 생각을 해봐요."
"...."
"왜 말이 없어요?"
"사장님과 가현 씨를 지켜주는 보디가드가 내 직업이라고요. 이제와서 달리 뭘 합니까?"
"무협지나 읽고 아까운 청춘 허비하지 말고 대학에 들어 갈 준비를 하란 말이예요."
"가현 씨! 대체 나한테 왜 이럽니까? 같이 구경다니자고 하지를 않나, 대학을 가라고 하지를 않나, 난 도무지 가현 씨 마음을 모르겠습니다.?"
"쳇! 그 쪽은 몸만 컷지 머리가 텅 비었잖아요. 지금부터 머릿속을 채우란 말이예요.
***
수영동의 한 부동산 사무실, 책상 두 개가 나란히 놓여있고, 영찬과 창배가 소파에 앉아 이야기 나누고 있다.
"사장님이 이사간 지가 반 년밖에 안 됐는데 몇 년이 된 것 갔군."
"부모 잃은 기분이 이런 건지 모르겠어요."
"우리한테는 그 분이 형님이고 부모였지. 말년에 이런 건물을 차고 앉았으니 사장님 배려가 새삼 고마워져."
"형님이나 저나 사장님한테 할 만큼 했다 아인교."
"퇴직금을 현금으로 주면 자식들한테 다 뺏긴다고 부동산을 준 거야. 또 자네와 둘이 떨어지지 말라고 공동명의로 해주고."
"사장님 뜻이야 알죠. 그러나 저러나 박기태가 자꾸 찾아와 사서 신경쓰이는데요."
"회사를 깨끗이 정리 했으면 됐지 우리한테 뭘 바라고 오지?"
"그노무 속을 우찌 알아요. 와서 밥 산다, 술 산다 카이 마다할 수가 있었야제."
"나는 그 인간하고 밥 먹었다간 체할 것 같아서 절대 사절이야. 자네도 가급적이면 피하라고."
"저는 형님하고 입장이 다르다 아입니까. 날마다 얼굴보고 지낸 세월이 이십 년을 넘고, 상사로 모신 것도 2 년이 더 돼 노골적인 냉대는 못합니다."
"그 인간이 자네한테 접근하는 까닭이 뭐겠어? 사장님과 연결고리가 자네라 싶은 거지. 안 그래?"
"그래봤자지요. 우리가 사장님의 집주소를 압니까, 전화번호를 압니까? 아니면 가현이 학교를 압니까."
"연락처 알아 내기는 그 인간한테는 식은 죽 먹기야. 뭔가 다른 속셈이 있을 거야."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저기 그 인간이 오네요."
후줄근한 옷차림의 기태가 사무실로 들어온다.
"두 분이 다 계셨구먼. 저녁식사나 같이 하자고 들렸습니다."
"바쁘신 분이 밥 같이 먹자고 이런 변두리까지 오시다니 우리가 그럴만큼 친했던가요?"
"그리 말씀하시면 서운합니다. 내 딴엔 오랜 동료라 생각하고 있는데. 따지고 보면 우리 셋 다 한솥밥을 이십 년이나 먹었는데."
"나야 일 년에 얼굴 한 번 볼까말까 했던 사인데 한 식구란 말은 가당치 않지요. 난 집에 빨리 가봐야 할 일이 있어서 식사는 두 분이 하시구랴."
영찬이 가버리자,
"박 소장이 날 싫어하는 건 알지만 너무하는군."
"저라고 다릅니까? 환영받지 못할 데라는 걸 뻔히 아시면서 여길 온 이유가 뭔교?"
"자네마저 왜 이래? 끈 떨어진 연이 되고 보니 오래 한솥밥 먹던 사람들이 그리워서 찾아온 건데. 찌지고 볶던 사이도 긴 세월이 흐르면 누렁지 같은 정이 생겨나는 것 아인가?"
"신소리 그만 하시고 절 찾아온 용건이나 말해 보소."
"용건은 무슨... 어디 가서 쇠주나 한 잔 하자고."
"진짜 용건 때문이 아니고요?"
"그렇다니까. 영추 형님을 두고 자네들 말고 누구랑 넉두리를 할 수 있겠어?"
"그럼 좋수다. 매번 얻어 묵기만 했은깨 오늘은 제가 쏘지요."
***
포장마차에서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시는데 기태가 창배 모르게 술을 버리고 자꾸만 창배에게 술을 먹인다.
"술기운이 얼떨떨해진깨 사장님이 되기 그립네요. 서울 가서 연락도 끊어버린 매정한 분인데 나만 그 냥반 생각에 눈물 날라 카이 꼭 상사병 걸린 것 같그만."
"사장님이 그립기는 나도 마찬가지야. 거짓말 조금 보태서 형님 없는 부산이 사막 같기만 하다고."
"거짓말 마소. 사장님을 서울로 가시게 만든 장본인이 전무님이라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이제 와서 그렇다 카이 두드러기가 돋을 것 같수다."
"자네한테서 그런 말 들어도 싸지. 이 미친 놈이 어쩌자고 자꾸만 형님 눈에 날 짓만 골라서 했는지 몰라."
"말 나온 김에 물어 봅시다. 가현이를 납치해서 우짤라 캤는교?"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생각해 보라고. 회사를 깨자고 열리는 주총인데 그걸 막자면 정족수를 못 채우게 할밖에. 제3주주인 가현이를 잠시 맡아두자는 거였는데 결과적으론 납치가 되고 말았지. 그 때는 나도 눈이 뒤짚힌 상태였어."
"가현이가 사장님한테 어떤 존잰지 누구보다 잘 아는 분이 조폭을 시켜 납치했는데 그런 변명이 통할 것 같소? 며느리감으로 점찍어 두었다가 놓친깨내 약이 올라서 납치한 건 아니고요?"
"그만 때리게. 에미없이 불상하게 컸다고 애뜻하게 여겨와서 그런지 그 애 생각을 하면 나도 가슴이 아파."
"그 애가 납치된 걸 뒤늦게 알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내가 불구덩이 속이라도 뛰어들었을 기요."
"그러고 보니 가현이 한테는 삼촌같은 존재가 여럿 있었군. 헌데 형수님 산소는 어딨지?"
"그 건 와 묻소?"
"꽃 가지고 가서 술이라도 한 잔 부어주고 싶어서 그래."
"산소는 나도 모르요."
"박 형은 알겠군?"
"그 형님도 모르요."
"아니! 고아원에서 형제간처럼 자랐다면서 형수산소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면 말이 돼?"
"사장님이 까막소 있을 때 가현이 낳다가 죽은 분인데 우리가 산소를 우에 안단 말인교."
"애는 낳아서 어쩌고?"
"뭘 그리 꼬치고치 묻능교? 사장님이 출소한 뒤 고아원에서 찾았다는 거 말고는 아무 것도 모른깨내 더는 묻지 마소."
창배와 헤여져 혼자 길을 걸으며 주먹을 불끈 쥔다.
<고아원이라...드디어 실마리를 잡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