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중에 입을 꾹 닫고 있는 종구가 마음에 걸리는 듯 영추가 묻고 만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벙어리가 됐어?"
"저는 아무래도 서울 못 갈 것 같심더."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이유가 뭐야?"
"저는 가족이 딸려 있고, 하나뿐인 친구도 시청공무원이 돼 있는터라 그리 멀리 움직이기는 어렵습니더."
"고작 그런 이유였어? 내가 네 가족을 생각치 않고 서울로 같이 가자고 했을 것 같았나?"
"더는 제 가족까지 사장님의 짐이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생각 끝에 드리는 말씀입니더."
"네 가족을 왜 내 짐이라고 생각하지? 그리고 친구는 아무리 친해도 일생을 함께할 수는 없는 거야."
"저한테도, 제 가족한테도 그 친구는 아주 특별한 존잼니더."
"그렇다고 같은 곳에서 살라는 법은 없어. 가족도 멀리 떨어져 사는데 하물며 친구와 헤여질 수 없다니, 그게 말이나 돼? 부산에 남고자 하는 다른 이유라도 있어?"
"친구 문제 말고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심더."
"뭔지 모르지만 집에 가서 그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고."
집으로 돌아온 영추를 가현이 현관 밖에서 팔장을 낀다.
"네가 이 시간에 웬 일로 집에 있니?"
"서울로 이사간다고 생각하니 학교 다니기도 싫어졌어."
"그렇다고 강의를 빼먹어?"
"강의 빼먹은 건 아니야. 동아리 모임에 안 갔을 뿐이지. 아빠는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이 집을 매물로 내놓고 왔어."
"어머나! 이사 이사하다가 집을 판다고 하니 실감이 나는 걸."
"그런데 허 군은 서울 안 간단다. 허 군 들어오거든 네가 물어 봐."
그 때 마침 종구가 들어 온다.
"이리 와서 나랑 얘기 좀 해요."
시무룩한 얼굴로 소파에 앉은 종구에게,
"서울에 안 가려는 이유가 뭐예요? 혹시 나 때문이예요?"
"왜 가현 씨 때문일 거라 생각하시죠?"
"내가 그 쪽에게 갑질한 것은 사실이잖아요."
"그거야 뭐 따끔하고 마는 정도였는데..."
"뭐라고요? 듣고 보니 기분 나쁘네. 내 말을 벌한테 쏘인 정도로 여겼다는 말이잖아요?"
"그럼 내가 큰 상처라도 입기를 바랐습니까?"
"그만 해라. 대화 해보라고 했더니 긁어 부스럼 만들고 있으니."
"솔직히 말해봐요. 올림픽클럽의 지배인이라는 사람과 친하던데 부산에 남아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꼬신 거 아니예요?"
"글쎄요. 그런 꼬심 받은 적은 있죠."
"쳇! 부산에서 조폭 노릇이나 하겠다는 거네 뭐."
"이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남의 말을 들어 보지도 않고 제 멋대로 지껄이고 있어. 너는 네 방으로 가든지, 가만히 듣고나 있어. 허 군! 내가 서울에 어떤 집을 사 놓았다고 했지?"
"지붕이 넷인 한옥을 사 두셨다고 하셨잖습니꺼."
"기억하고 있군. 그 중 뒷채는 본시부터 한 가족이 따로 살게끔 설계된 공간이야.
방 둘에 부엌과 장독대와 외부로의 출입문까지 따로 있거든. 그 집을 보고 마음들어 한 것은 바로 그 뒷채 때문이었어. 왠 줄 아나? 네 가족이 살기에 안성맞춤이라서야. 헌데 네가 서울엔 안 가겠다고 하면 뭐가 돼?"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장님이 안전지대인 서울로 이사하시면 제 쓰임새도 다한 것이라 생각합니더."
"서울이 안전지대라니, 누가 그래?"
"설마 누가 서울까지 따라가 해치려 들겠습니꺼?"
"넌 아직도 기태를 잘 몰라. 이번 일로 뉘우치기는 커녕 원한이 사무쳤다고 봐야 하는데 그까짓 거리 좀 떨어진다고 안전? 게다가 커다란 한옥에 노인과 여자 둘만 살고 있다면 얼마나 허술 하겠어?"
종구가 고개 떨구고 생각에 잠겨 있자.
"그동안 내가 못되게 군 것 사과할게요. 우리랑 같이 서울 가요."
"가현 씨 때문이 아니라니까요."
"자주 다쳐서 가족이 반대하는 모양인데 서울 가서 외로운 집안끼리 화목하게 지내보자고요."
"난 정기검진 받으러 서울을 또 다녀와야 하는데 갔다 와서 네 동생과 네 친구를 만나 보도록 하마. 어쨌든 이 시기에 네가 내 곁을 떠나는 것만은 용납이 안 돼.
손잡고 살여울 건너다가 강 한가운데서 손을 놓아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어."
가현이, 침대에 걸터 앉아 회상에 잠긴다. 종구를 처음 보던 날 술 취해 거실바닥에 큰대자로 누웠던 모습, 정원으로 불러내 한바탕 해대고 밖으로 쫓아버렸던 일,
위험에 처해 있을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구해주던 일들, 그리고 납치 당했다가 구출되어 업혀 나오던 광경 등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자 두 손으로 머리채를 잡아 헝클고 뒤로 넘어진다.
"몰라, 몰라. 떠날 테면 떠나라지 뭐."
***
영추를 부산역으로 바래다 주고 문현동으로 간 종구가 혼자 마당을 걸어다니고 있는 어머니를 담 너머로 바라보며 눈시울을 적신다.
<이제 제 한이 절반은 줄었심더, 어머이!>
대문 흔드는 소리에 민숙이 달려 와 문을 열어 준다. 그 때 어머니가 "아들"하고 희죽 웃어보인다.
"옴마! 방금 뭐라 캣노?"
"빵 도라."
어머니의 동문서답에 남매가 서로를 바라본다.
"실망할 것 없어. 어머니가 정신이 돌아오는 징조니까.
"오빠 말이 맞으모 얼마나 좋아."
"지성이면 감천이라 캤는데 느그 남매의 효성이모 어머이 정신을 돌려 주것지."
어머니는 빵 봉지를 받아 방으로 가고 종구, 민숙, 재만은 마루바닥에 모여 앉는다.
"느그 사장이 이사 간다는 것 말인데 네 마음은 정했나?"
"내 마음이사 부산에 눌러 살고 싶제. 우선 니하고 헤여지기 싫고, 부산도 이제 정 붙이고 살만하니까."
"내 마음도 널 붙잡아 앉히고 싶은데 그러자니 묵고 살 걱정이 앞선다. 주먹 가지고 살자 카모 모를까 정상적인 직장은 어려울 것 같아서 말이야."
"근데 영감제이가 안 놔 줄라 쿤다. 어제 부산에 남겠다는 말 끄집아 냈다가 본전도 몬 건졌다 아이가. 영감제이가 날 붙잡는 건 이해가 되는데 그 가시나가 지랄하는 건 도통 이해가 안 돼."
"그 집 보디가드 하는 건 영 마음이 안 놓여. 그러다가 오빠한테 큰 일 생기모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이야."
"큰 위험은 지나 갔은께 너무 걱정마라. 근데 재만이 니는 느그 어른들한테서 결혼하란 소리 안 듣나?"
"촌노인들이야 다 그렇지 뭐. 시골에 처녀가 별로 없어서 그런지 선보로 오라 카지는 않는다. "
"시청에 예쁜 처녀들 많다아입니꺼? 연애 좀 해보지 예?"
"연애가 그리 쉽나? 다른 거 다 내비두고 요기이 있어야 붙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 그려 보인다
"차 가지고 왔는데 다같이 어머이 모시고 드라이브 가자. 바닷가에 가서 해물요리도 묵고."
"드라이브 조오치! 이런 때 아이모 언제 캐딜락을 타 볼끼고."
"집은 우짜고?"
"우리집에 도둑질 할 만한 기 있나 오디?"
드라이브 하고 해걸음에 문현동으로 돌아 온 종구가 가족과 재만을 골목 앞에 내려 주고 대신동으로 향한다. 집으로 오자마자 어머니는 잠이 들고 민숙과 재만은 마루 끝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내가 보기엔 느그 오빠가 그 집 벗어나기는 애저녁에 틀린 것 같다."
"서울 가기는 정말 싫은데. 재만이 오빠가 좀 적극적으로 말려보이소."
"서울이 와 그리 싫노?"
"그야 어머이가 사고난 곳도, 오빠가 사고친 곳도 서울 아입니꺼?"
"싫은 이유가 그뿐이가?"
"또 있어 예."
"뭔데?"
"몰라 예."
"니 마음인데 와 니가 몰라?"
"아이 참 내!"
몸을 꼬고 있는 민숙을 바라보고는,
"민숙아, 내 마음도 니랑 같데이. 내 마음에 초승달이었던 니가 어느새 보름달이 되어 있더라. 친구 동생한테 이라모 안 되는데."
민숙의 눈이 동그래지며,
"지가 보름달이라고 예? 놀리지 마이소."
"내 눈을 봐라. 이 눈이 누굴 놀리는 눈 같나? 내 가슴속에서 실꾸리처럼 감고 또 감았다가 이제사 풀어내는 말인데 정말 모르것나?"
"참말입니꺼?"
"참말이지 그럼. 몇 번을 확인해야 내 마음을 알것노?"
"하지만 지가 뭐라고 예? 몬 배우고, 잘 생기지도 몬 했고, 어머이를 모시고 사는 빵점 여잔데."
"네 손 이리 조오봐라."
손 뒤로 감추며,
"부끄럽거로 손은 와 예? 마디는 굵고, 피부는 거칠그만."
"내가 네 손을 몰라서? 이리 내놔 보라니까."
민숙의 손을 자신의 손 위에 올려 놓으며,
"이 손이 내 마음의 눈을 뜨게 했다 카모 믿것나?"
"그런 어려운 말은 몰라 예."
"그 손으로 흙 만지고 남새 가꾸는 네 모습이 농군의 아들인 내 눈에는 대지의 여신 같았어. 희고, 가늘고, 매끄러운 요즘 여자들 손보다 몇 배나 아름답고 성스러우니까."
"재만이 오빠! 난 정신이 하나도 없어 예. 고마 방에 들어 갈랍니더."
"그만하면 네 마음 알았으니 됐어. 잘 자."
***
가현과 은실이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때 종구가 돌아온다."
"식사가 늦으시네요."
"집에서 오는 길이예요?"
"가족과 외식을 했습니다. 난 밖에서 진돌이 진순이랑 놀고 있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 우리랑 얘기나 해요."
"내가 대학생들의 이야기 상대나 됩니까?"
"누가 어려운 대화 하제요? 심심풀이로 사람 사는 얘기나 하자는 거예요."
"은실이 너 허 기사에 대해 궁금한 것 많지? 지금 물어 봐."
"야는! 지가 붙잡아 놓고는. 한 가지 물을께 예. 서울 말은 언제 배웠어 예?"
"고등학교 졸업한 후에 서울서 몇 년 살았으니까요."
"아 - 그러셨구나. 경상도 사람은 서울 말 배우기가 어렵다 카든데."
"억양이 다르니까요."
"나만한 여동생이 있다든데 학교는 어디 다녀요?"
종구가 갑자기 얼굴이 굳어지며 침묵한다.
"내가 뭐랬기에 그런 무서운 얼굴이 돼요?"
"내 동생은 중학교 졸업도 못 했습니다. 교통사고로 외다리에 백치가 돼버린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 둬야 했으니까요. 그거 다 내가 사고치는 바람에요. 이제 시원합니까?"
그 말을 던지 듯 하고는 자리 박차고 나가버린다.
가현이 어이없어 하며.
"그게 뭐 내 잘못인가? 기가 막혀서!"
"자기 여동생을 그리 만든 스스로에게 화를 내는 것 같다 야."
"쳇! 그러게 누가 사고 치래. 살인까지 한 주제에 자기 가족 생각은 끔찍도 하네."
은실이 화들짝 놀라며,
"니 지금 살인이라 캤나?"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 막으며,
"안 들은 걸로 해."
"뱉은 말 줏어 담을라 카지 말고 얘기해 봐."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알았어."
사고친 이야기 듣고는,
"옴마야! 복수할라 카다가 자기 신세 망치고 집안까지 풍비박산 낸 기네. 듣고 보니 허 기사가 가여워진다, 야."
"요것 봐라! 너 지금 누굴 동정하니?"
"지랄! 나도 살인전과라는 말을 듣고 나니 소름이 돋아."
"화딱지 나는데 우리 술 마실까? 아빠가 보물처럼 아끼는 와인이 있는데."
"그런 걸 마셨다가 혼날라고?"
"아빠는 수술한 뒤로 술은 입에도 안 대. 거실로 자리 옮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