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인이 멱살을 잡아오자 종구가 손목을 잡아 비튼다. 중년인의 상체가 숙여지자 종구의 특기 무릎치기가 연거퍼 두 번 명치를 가격하자 상대가 주저 앉았다.
깜짝 놀란 백두만이 탁자 위의 벨을 누르고 다리에 차고있던 단검을 뽑아든다.
"보통 놈이 아니군. 날 찾아 온 건가?"
"높은 양반이 내 이름을 들어 봤으려나. 나 허종구요."
"여기까지 왔으니 그 실력도, 용기도 알아주지. 하지만 젖비린내 나는 네 놈 재롱은 여기까지야."
"인질은 어딨오?"
"흥! 그걸 내가 말해줄 것 같나?"
"당신은 박기태같은 인간과 손잡은 것이 망쪼였어. 어디 할 짓이 없어 여자를 납치했어? 당신도, 박기태도 그 걸로 종친거라고."
"그 시건방진 아가리부터 찢어주지."
"명성만큼 실력이 있는지 후배한테 보여 주시지."
복도에서 종구와 백두만의 대결이 벌어진다. 키와 체격이 비슷한 두 사람의 싸움이 복도를 가득 메운다.
백두만의 단검은 아랍인들의 그것처럼 끝이 휘어져 찌르기 보다 휘두르기에 알맞은데 다같은 휘두르기지만 종구의 목봉이 번번이 칼을 퉁겨낸다.
약이 오른 백두만이 저돌적으로 공격하다가 팔뚝을 맞고 주춤한다.
승기를 잡은 종구지만 기회를 활용하지 않는다. 방어만 할 뿐 공격은 하지 않는 종구를 보고 백두만이 칼쥔 손을 늘어뜨리고는 묻는다.
"너 지금 날 가지고 노는 거야?"
"대 선배를 이기고 싶은 마음은 없오."
"뭐라고? 내 아성을 박살냈으면 나도 밟으라고. 그게 피차 간에 사나이 다우니까."
"체면은 지켜드릴 테니. 인질만 나한테 넘겨 주시오."
"내가 호락호락 인질을 넘길 것 같나?"
그 때 복도 입구쪽에서 어수선한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연합회 사람들이 들이닥친다. 민창수가 무리 뒤에서 앞으로 나선다.
"백 형, 오랜만이요. 이런 모습으로 보게 돼 안 됐오. 그러게 왜 남의 나와바리는 욕심내 갖고 이런 수모를 당하시오?"
"백상아리는 형님들이 잡아서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이소. 난 가현이를 찾아야 되것오."
복도 안을 살피다 자물쇠가 걸려있는 방문을 발견한다. 열지 못해 쩔쩔 매고 있을 때 천상조가 품에서 망치를 꺼내 종구에게 넘겨준다.
"이 망치를 오늘 제대로 써 묵는데요."
"이래서 천 선배랑 궁합이 맞는 갑소."
망치로 자물쇠를 부셔버린 종구, 어두컴컴한 실내 안 구석에서 가현을 발견해 안아들고 복도로 나온다. 밝은 불빛에 살펴 보니 얼굴이 엉망이다.
한쪽 눈이 부어서 감기다시피하고, 입술에도 피딱지가 앉아 있다. 밧줄을 풀고 테이프를 떼자 첫마디가 욕설이다.
"야 이새끼야! 너 믿었다가 죽을 뻔했잖아."
종구가 엉, 엉, 울어대는 가현을 들쳐업고 클럽을 빠져나간다.
***
기태와 순태가 술 마시고 있는 단란주점으로 연민이 급하게 들어온다.
"왜 이리 늦었어? 전화는 왜 꺼놓고?"
"클럽에 난리가 났다 아입니까. 사태를 지켜보느라 휴대폰을 꺼놓을 수밖에 없었어요."
"그 게 무슨 소리야? 인질을 데려오고 두 시간이 채 안 돼 습격을 당했단 말이요."
"대체 누가 감히 거길 습격해?"
"허종구 일당이지 누구겠어요. 내실은 허종구와 심민보, 천상조에게 제압당하고 홀은 광남연합회 삼십여 명한테 점령당했단 말이요."
"대체 무슨 소리야? 이달문이 데려간 수하들은 어찌 되고 허종구가 거기 나타나?"
"보나마나 제압당했겠죠. 허종구 일행이 피칠갑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그 전에 격렬한 싸움이 있었던 모양이라요."
"허종구가 광남연합회와 한편을 먹었다는 거야, 뭐야?"
"우리가 놓치고 있던 헛점이 바로 그들 간의 관계였다고요."
"백두만은 어찌 됐어?"
"허종구와의 대결을 직접 보지는 못 했지만 사람들 말로는 허종구가 백두만을 가지고 놀았다는데요. 아무튼 백두만과 민창수가 신사협정을 맺었다 카더만요."
"신사협정이라니?"
"서로 간에 나와바리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협정이죠 뭐. 전무님과 손을 끊고 클럽을 폐쇄한다는 약속도 했답니다."
"구렁이가 애 잡아 먹는다더니 허종구 그 놈이 내 앞에서는 어리숙한 촌놈 행세를 하고 뒤로는 날 무너뜨릴 연합전선을 만들고 있었어. 그 놈을 잘못 본 것이 천추의 한이야."
"전무님! 낙담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다 끝났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았어."
"정신 좀 차리시라고요. 범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안 캅니까?"
"너희들은 몰라. 난 이번 일에 인생을 몽땅 걸었다가 다 날려버렸어. 너희들도 각자 도생을 하라고."
***
택시에서 내린 가현이 비틀거리자 종구가 부축해준다
"업어 드려요?"
"쳇! 여자 업는데 재미붙었어. 아까는 오래 묶여 있어서 몸이 덜 풀려서 엎혔을 뿐이라고요."
"괜히 업고 나왔군. 혼자 걸어나오게 놔두는 건데."
조약돌 길 중간에서 영추, 가현 부녀가 만나 부둥켜 안고, 종구는 급히 집안으로 뛰어든다.
"무사히 돌아 왔구나! 너도 고생했지만 나도 수명이 몇 년은 줄었을 거야."
"납치, 납치하던 아빠의 노래가 현실이 됐지 뭐야. 그 새끼들이 뭐라고 한 줄 알아? 얌전히 있지 않으면 사창가에 팔아버린다고 했어."
"그런 아가리를 찢어 죽일 놈들이 있나. 내 딸한테 그 따위 소릴 해?"
"내가 아빠의 아킬레스건이라던 말을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어."
"그걸 깨달았으니 값비싸기는 했지만 좋은 교훈을 얻은 거야. 이번 일로 허 군이 얼마나 희생적이었는 지는 알지?"
"쳇! 희생적이면 뭘 해. 내가 납치당하는 걸 막지도 못 했는데."
"놈들의 소굴로 쳐들어 가 널 구한 것은 왜 생각 못 해?"
영추와 가현이 거실의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을 때 개끗이 씻고 옷 갈아 입은 종구가 합류한다.
"너한테 큰 신세를 졌어."
"실수를 만회했을 뿐입니더."
"나야말로 큰 실수를 할 뻔했어. 기태에게 회사를 넘겼으면 어쩔 뻔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회사를 넘기려 했다니."
"허 군이 클럽을 친다고 하길래 그러다가 잘못되어 너한테 해가 돌아갈까 두려워서 차라리 기태한테 회사를 넘기고 널 돌려 받으려 했지 뭐냐."
"말도 안 돼! 그래서 풀려나면 내가 고맙다고 할 줄 알았어?"
"옳지 않은 거래지만 그 게 부모 마음 아니겠습니까?"
"쳇! 누가 그걸 모른대요? 이번 일로 너무 잘난체 하지 말라고요. 그 쪽 믿었다가 내가 어떤 꼴을 당했는 지나 잊지말란 말이예요."
종구, 빙그레 웃어 보이며,
"나한테 구원 받은 게 억울합니까?"
"연합회 사람들 중에 크게 다친 사람은 없어?"
"내일 만나서 파악해 봐야죠."
"네가 나 대신 넉넉히 성의를 보여야 해."
"백두만은 박기태와 모든 관계를 끊고 남포동에서 철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만 박 전무 처리는 어떡하실 생각인지 예?"
"박 전무는 도저희 용서할 수 없어. 회사를 해산하고 그가 횡령한 회삿돈은 그의 지분에서 공제해야지.
당초의 내 계획은 주총을 열어 나는 회사에서 손을 떼고 내 지분을 공이 있는 주주들에게 나누어주고 회사는 존속시키는 것이었지만 박 전무가 스스로 그 기회를 날려버린 거야."
***
정숙과 화영이 베이커리에서 만나고 있다.
"볼테기가 홀죽해졌구나. 음식을 제대로 해먹지 않으니 그모양이제?"
"인스턴트로 대충 때우고 살아. 잘 됐지 뭐. 다들 다이어트 한다고 난린데 난 저절로 된깨."
"그러다가 병나모 우짤라고. 밖에서라도 영양가 있는 음식을 사먹고 다녀."
"옴마는 언제까지 이러고 살거야? 화해를 하든지 이혼을 하든지 결판을 내야지."
"이혼을 해조야 말이재. 우째야 할지 나도 모르것다."
"아빠가 이상해졌어. 출근도 않고 집에서 술독에 빠져 지낸다고."
"언제부터?"
"사나흘 됐어. 와 그러냐고 물어도 대답을 안 해."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구나. 네 백부님하고 파탄이 생긴 게 분명해."
"파탄이야 벌써 생겼지. 회사가 문을 닫은 것 같다니까."
***
초인종 소리에 선희가 현관으로 달려와 폐쇄회로 화면을 본다.
"영주동 사모님인데 예."
"열어드려."
모녀가 거실 한 가운데 나란히 무릎굻고 앉자 영추가 정숙의 팔을 잡고 일으킨다.
"이러지 마시오. 제수 씨가 뭘 잘못했다고 아러십니까?"
"아주버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동수한테서 돌아가는 사정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찾아 뵙고 용서를 빌었어야 했는데 생각이 모자랐습니더. 하필이면 동수가 미국 돌아가는 날 저도 가출을 해서 예."
"미안한 말씀이지만 누가 빈다고 용서될 일이 아닙니다. 제수 씨가 빌 일도 아니고요."
"그 인간이 무슨 짓을 했는 지를 말씀해 주이소."
"가출해 있었다니 그 간의 사건들을 모르겠군요."
영추의 설명에 정숙이 엎어져 땅을 치며 울기 시작하자 화영도 덩달아 운다. 한참만에 울음 그치고,
"그 쫏아 직일 인간이 그런 짓꺼정 했다니 용서 빌 면목이 없습니더. 이만 하직 인사 올리것습니더."
"내 말 마저 들으세요. 박 전무의 행위는 괘씸하지만 회사를 정산하고 남는 게 있으면 몫을 떼어 줄 작정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학교를 다니고 있는터라 학자금은 따로 고려하고 있습니다."
정숙이 머리 조아리며,
"고맙습니더. 고맙습니더."
"앞으로 5년 간을 기한으로 매달 통장에 돈을 넣어드리지요."
"고맙습니더. 이 은혜는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것습니더."
"그 댁과 우리는 이것으로 끝내도록 하지요. 제수 씨라 부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입니다, 제수 씨."
***
장기호 변호사 사무실로 영추가 종구를 대동하고 들린다.
"그동안 회사 정리에 애 많이 썼네. 큰 불상사 없이 마무리 된 데는 장 변의 공이 컷어."
"따님 납치사건이 걸림돌들을 미리 제거해버려 제가 일하기 수월했습니다. 따님은 충격이 컷을 텐데 어찌 지내고 있습니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씩씩하다네. 세상 인심이 무섭다는 걸 이제야 깨닳은 것 같아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 오늘 장 변한테 걸음한 까닭이 또 하나 있네. 내 집도 마저 팔아 주게."
"팔아서 어쩌시게요?"
"말했잖아. 서울로 이사간다고. 부산은 정나미가 떨어져서 하루 빨리 떠나고 싶네."
"이해가 갑니다. 적지나 다름없는 부산에 미련 둘 것도 없지요. 광복동의 빌딩만 남는데 그건 어쩌실 겁니까?"
"그건 남겨 둘 거야. 내 인생의 기념탑같은 것이라 내 생전에는 안 팔 생각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