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추가 숙질실로 가버리자 종구가 설명한다.
"내일 장기호 변호사가 회사로 주총소집을 요구하면서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 예상됩니다. 박기태 전무는 주총이 열리는 걸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저지책이 무엇인가에 따라 전쟁의 형태가 결정될 것입니다."
"주먹쟁이들한테 주총이니 뭐니 해봤자 소귀에 경 읽기고, 우리가 뭘 해야 되는지만 알려주시오."
"간단히 말해서 놈들이 사장님이나 가현 씨에게 위해를 가하는 걸 막아야 합니다."
"진작 그리 말씀하실 것이지. 이미 그럴 셈으로 우리가 여기를 왔다 아인교."
"우리쪽은 방어에만 치중합니다. 그러니까 사장님이 이 경비실을 임시 사무실로 쓰고 계시니 두 분 선배님은 경비원 자격으로 사장님을 경호하시면 됩니다."
"따님도 지켜야 된다면서요?"
"따님은 제가 지킵니다. 지금까지는 차로 등교만 시켰는데 내일부터는 하교시에도 차로 데려와야 됩니다."
"휴~진땀 뺄뻔했네. 그 학생과 대면할 일이 꿈만 같았는데 ."
"그러게 와 여자한테 주먹질을 해 갖고..."
"이 새끼 봐라! 저는 쏙 빠지것다 이거지?"
대양투자를 방문한 장기호 변호사가 박기태 전무와 면담한다.
"어서 오시오. 장 변이 회사에 오신 걸 보니 사장님이 돌아오신 모양이오?"
"며칠 전에 오셔서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이거 임시주총 소집요구서입니다. 검토하시고 전무님의 의사를 말씀해 주십시요."
"차 드시면서 천천히 내 대답을 들으시는 게 좋지 않겠오?"
"두 분 간에 불화가 생겨 제 입장이 여간 난처한 게 아닙니다. 저야 회사의 고문변호사이기도 하고 주주이기도 하니 업무적인 이야기는 좋지만 그밖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말이 불화지 내가 사장님한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실정임을 잘 아시잖소?"
"그래서 미리 말씀드린 겁니다. 죄송하지만 업무적인 이야기만 듣겠습니다."
"좋소이다. 주총을 며칠 늦추어 주시오. 부끄러운 일이지만 집안의 분란으로 아내가 가출을 해서 말이오. 명색이 주주들인데 주총에는 참석해야 안 되겠오?"
"어쩌다가 그런 일이... 며칠이나 늦추면 되겠습니까?"
"넉넉잡고 일 주일 정도면 됩니다."
"그럼 일 주일 뒤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지요. 가정분란까지 생겨 정신이 사나우시겠습니다."
"고맙소. 사장님이 기어코 회사를 깨자고 하시면 내가 무슨 수로 막겠오?"
"전 바빠서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박기태와 백두만이 공사중인 클럽의 룸으로 들어가 밀담을 나눈다.
"오늘 오영추의 대리인이 회사로 와서 주총소집을 통보하고 갔소이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먼. 여기 공사도 내일 모레면 마무리되는데 이제 그쪽 일에 신경쓰도록 하지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주총 열리는 건 막아야 합니다."
"그기 뭐 그리 어렵다고 걱정이오?"
"말이 주식회사지 오영추와 나 두 사람의 동업체고, 주주라야 꼭두각시 주주를 포함에 총원 여덟이라 그중 대 여섯 명이 어디서 주총을 열지도 모르는 게 실상이오."
"나라면 이 기회에 대가리를 칩니다. 아니면 그의 딸내미를 납치하든지."
기태가 침중한 모습으로 한참을 생각하고는,
"하긴 지금까지 온갖 수단을 다 써봤지만 소용 없었오. 그 수단만은 피하고 싶었지만 이 지경에서는 도리가 없지."
"그럼 결심이 선 거요?"
"오영추는 안 됩니다. 그는 약아빠진 늙은 여우고, 맵디 매운 고추요. 그를 잡아 오기는 어렵지 않겠지만 닥달해서 뭘 얻어 내기는 어려울 거요."
"그럼 딸내미는 어떻소?"
"그 애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며느리감으로 점찍어 두었던 애였소. 문제가 생기면서 그 애가 냉정하게 등 돌리고 말았으니 백 사장이 알아서 하시구려."
"좋소! 남자라면 그 정도의 결단력은 있어야지요. 난 손을 썼다 하면 끝장을 보는 사람이오. 이참에 그 애를 통해서 얻어 낼 것은 모조리 얻어내는 것이 좋을 겁니다.
"물론 그래야지요. 일만 잘 되면 전리품은 반타작을 합시다 그려."
"좋소이다. 헌데 결행시기는 조금 늦추는 게 좋겠오. 클럽이 고고성이나 올린 뒤로 날짜를 잡아야 안 되겠오."
"옳은 말이오. 옥동자 탄생에 잡귀가 끼어 들어서는 안 되지. 개업식은 언제가 좋겠오?"
"사나흘 뒤로 잡지요. 내일부터 당장 전단을 만들어 돌려야 되겠오."
***
아침식사를 끝낸 종구가 가현에게 통고하듯이 말한다.
"오늘부터 은실 씨는 못 태워 줍니다."
"왜요?"
"어제 말했잖습니까? 위험이 닥쳐오고 있다고."
"나는 위험해도 괜찮다는 거야, 뭐야?"
"쯧, 쯧! 말을 비비 꼬는군. 이런 땐 제발 얌전히 굴어."
"오늘부터는 하교시에도 내가 모셔옵니다."
"그쪽이 뭔데 명령조예요?"
"또, 또! 그래야 할만큼 네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위험, 위험하는데 나는 조금도 실감이 안 나. 누가 날 납치라도 한다는 거야?"
"지금의 가현 씨는 그들의 표적입니다. 당하고 후회하는 우는 범하지 마십시요."
"뭐라고요? 아빠! 들었지?'
"허 군의 말이 다소간 직설적이긴 해도 너한테 경각심 심어주려고 그런 거야. 자꾸만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해."
숟가락을 던지 듯이 내려놓고 일어서는 가현,
"생각 좀 해봐야 되겠어." 하고 식탁을 떠난다.
"저 녀석이 어려서부터 납치 조심하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납치란 말에 예민한 거야."
"가현 씨로서는 황당하게 느껴질 말이기도 합니더."
"가현이가 표적이라는 네 생각에는 변함 없어?"
"저는 생각보다는 감을 믿습니더."
영업 준비중인 카페로 희상이 급한 걸음으로 들어온다.
"난리 났어? 아침나절부터 쫓아 오게."
"이것 좀 보시죠. 우리 업소 문 앞에 뿌려놓은 걸 청소하는 아줌마가 줏어 왔더라고요."
종이를 받아 훓어보고는,
"개업알림 전단이잖아. 당연한 걸 가지고 뭘 그리 호들갑이야?"
"놈들이 이걸 우리 업소 앞에다 뿌려 놨는데 흥분하지 않게 생겼어요?"
"설마 우리 업소 앞에만 뿌렸겠어? 이 일대의 길거리마다 쫙 깔렸을 텐데."
"놈들이 우리 나와바리에 버젓이 개업을 알리는 걸 보고만 있자니 속이 부글거려 죽을 지경입니다."
"참으라고, 이럴 때는 섣불리 덤비는 쪽이 당하기 쉽상이야. 모레가 OPEN 이군."
"허 아우는 알고 있으려나?"
"오영추 사장이 돌아왔다니 그쪽도 나름대로 싸움에 대비하고 있겠지. 주총소집이 방아쇠가 될 것이라 했으니 우리쪽도 비상대기 상태로 들어가야 할거야."
***
퇴근해 있던 기태가 화영을 거실로 불러내린다.
"너는 네 에미랑 통화 자주 하지?"
"그런데? 옴마 안 데려 올 거야?"
"싹싹 빌고 들어와도 받아 들일지 말지야."
"피! 그람시로 전화하고 있는 지는 와 물어?"
"주총이 열리는데 통보는 해주어야지."
***
학교 정문에서 조금 떨어진 길가에 차 세워놓고 기다리던 종구, 캠퍼스 안 저만치 가현과 은실이 보조를 맞추며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차에서 내린다. 은실이 다가와 말문을 먼저 연다.
"안녕하세요. 저 차 타러 온 거 아입니더."
"미안합니다. 같이 모시지 못해서."
"가현이한테 사정 얘기 들었어 예. 야가 납치 당할지 모른다는 말이 사실입니꺼?"
가현을 향해 눈살 찌푸리고는,
"그런 말까지 했습니까?"
"내가 행방불명되면 친구 하나 정도는 납치된 걸 알아야 되잖아요."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끔찍하다, 야! 허 기사님을 철석같이 믿으면서?"
"인사 핑계대고 만나 봤으면 됐지?"
"그동안 차 태워줘서 고맙습니더."
"조심해서 가이소."
차에 올라 타고는,
"은실이를 못 보게 돼 서운해요?"
"..."
"왜 대답이 없어요?"
"말 같아야 대답을 하지요. 비상시국에는 긴장하는 척이라도 하시죠."
"뭐가 비상시국이라는 거예요?"
"사장님이 미뤄 두었던 숙제에 손을 대기 시작했어요. 회사를 정리하는 절차 말입니다. 사장님 지분을 뽑아 나오면 대양투자는 빈 껍데기나 다름없어지겠죠. 그러니 박 전무가 호락호락 하겠습니까?"
"호락호락 않으면요?"
"이판사판이 되겠죠. 백상아리와 손잡은 까닭이 바로 그겁니다."
"아빠와 갈라 선 박기태는 조폭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거네."
"아마 눈이 뒤집혀 있을 겁니다.
속담에 어륵 놓고 게 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박 전무한테 가현 씨가 게였다면 회사는 어륵인 셈이죠.
그 둘다 놓치게 생겼으니 미쳐 날뛴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 없습니다."
"그만하면 대충 이해가 됐어요. 근데 가만보면 그쪽한테 유식한 구석도 있어요. 국문학과 학생인 나도 모르는 속담을 다 알고."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지금 창고로 사장님 모시러 가고 있는데 거기 심민보와 천상조가 같이 있습니다."
"뭐라고요? 그새끼들이 왜 거기 있어요?"
"말했잖습니까. 외부인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고. 내가 지금처럼 밖으로 나돌 동안 사장님을 지켜줄 사람이 필요하단말입니다."
"내 말은 하필 왜 그 새끼들이냔 말이예요?"
*****
클럽 < MOON > 의 오픈 세레모니에 정재계 인사들을 비롯한 축하객이 줄을 잇고 있는 가운데 백두만과 박기태가 나란히 서서 축하객을 맞는다.
"박 전무님! 표정관리 좀 하시지요."
"미안하오. 잠시 딴 생각을 했오."
"심기가 불편하고 초조하시겠지만 이 백두만을 믿고 활짝 웃어 보시죠."
억지 미소를 짓고 있던 박기태의 얼굴이 한 무리의 손님을 대하고는 활짝 펴진다.
"네가 어찌 알고 여길 왔어?'
"전단지를 봤어요. 대학 친구들이예요."
"이왕 왔으니 저 분한테 인사드려라. 내 동업자시고 사람들이 백상아리로 부르는 분이시다."
놀란 표정 짓고는 구십 도로 허리를 꺾는다.
"후학 박동우가 명성이 쟁쟁하신 선배님을 뵜습니다."
"고맙네."
"내 둘째 놈입니다. 친구들을 몰고 온 모양입니다."
"잘 생긴 아들을 두셨습니다. 젊은날의 전무님 모습이 이러 했겠죠?"
"허 허! 판박이란 말을 자주 듣소이다."
"우리 다시 보기로 하고 오늘 밤은 신나게 놀고 가시게."
클럽의 오픈 세레모니를 끝내고 내실로 들어간 백두만과 박기태가 소파에 피곤한 몸을 내려 놓는다.
"이것으로 클럽은 잘 굴러 갈 것이고, 이제 오영추를 손 볼 차롄데 혹시 그 간에 심경변화는 없오?"
"이미 칼을 뽑았는데 무슨 변화가 있겠오? 휘두르고 베는 일만 남았을 뿐."
"오가현을 이곳으로 데려오고, 허종구는 다시는 운전대를 못 잡을 정도로 손봐주면 되겠오?"
"그 전에 물어 봅시다. 그 애를 어디서 어떻게 포획할지, 어디서 감금할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오."
"그건 우리한테 일임해두고 박 전무님은 뒤로 빠지는 게 좋을 텐데요."
"그 애 처리과정만은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차가 도착하자 심민보, 천상조가 경비실에서 나온다.
"나랑 눈길 마추치는 것도 피하잖아. 개새끼들!"
"가현씨! 마흔 살이 가까운 분들인데 개새끼들이라 하면 되겠어요?"
"난 아직 분이 덜 풀렸다고요. 동양챔피언씩이나 한 새끼가 술 취한 여자를 KO시켜버리다니 국제토픽감이예요."
"어쨌든 지금은 도와주러 온 고마운 분들이니까 예의를 차리시죠."
"쳇! 비상시국이란 핑계로 주객이 전도 되었다니까."
"주총을 앞 둔 지금도 위험하지만 주총이 열린 뒤가 더 위험합니다. 박기태가 발악을 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