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탁에 앉은 기태가 밥을 깨작거리고 먹다가,
"반찬이 떨어지면 밥은 해먹지 말고 토스트와 우유, 계란, 라면 등으로 먹도록 하자. 설거지는 교대로 하고. 나는 아침만 집에서 간단히 먹을 테니 신경 쓸 것 없다."
"어머니는 찾지 않을 겁니까?"
동우의 말에 기태는 고개를 치켜든다.
"제 발로 나간사람 제 발로 들어오면 몰라도 찾아서 데려 올 생각은 없다."
"그럴바에는 이혼을 하지."
화영이 말에도 기태는 퉁겨내 듯이 ,
"이혼도 네 에미가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나 하는 거야."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던 종구, 노크 소리에 이불을 차고 일어나 방문을 연다.
"주방으로 가서 얘기 좀 하자고."
"피곤하실 긴데 괜찮겠습니꺼?"
"KTX 여행은 고생이기 보다 휴식이더만."
"술은 너만 마셔. 난 새 생명을 얻은 것이나 다름 없는데 남은 생은 금주하기로 결심했어."
"잘 하셨심더. 그 결심을 돕기위해 저도 금주 하것심더."
"그래, 그럼 차 한 잔 하자고. 그동안 박 전무의 동태에 대해 알아 낸 거 있나?"
"박 전무와 백상아리가 손을 잡았답니더."
"뭣이! 확실한 정보야?"
"이미 양측의 합작으로 나이트클럽을 만들어 개업하기 직전입니더."
"기태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게로군. 그럴 돈이 어디서 나왔겠어? 보나마나 회삿돈 횡령이지. 장소는 어딘가?"
"남포동 끝단이라 들었심더."
"그럼 남포동 사람들이 가만 있지 않을 텐데..."
"조폭과 합작이라니 이판사판이라 이건가?"
"그야 뻔하지 않습니꺼? 일차적인 목표는 절 제거하는 것이고, 사장님과 가현 씨도 위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습니더. 그들이 이 집을 살펴보고 가기도 했심더."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리 있으니 안전에 좀 더 신경을 써야 되겠어."
"제 나름대로 생각해 둔 것이 있습니더. 집은 김 감독한테 맡기고 저는 가현 씨 등하교에 치중할까 합니더. 사장님은 가급적이면 외출을 삼가 하시고, 꼭 외출시에는 저랑 동행하시거나 심민보, 천상조를 불러서 경호를 받는 기이 좋을성 싶습니더."
"허 참! 숨겨둔 무기를 끄집어내 손질해두어야 되겠군."
"무기라니, 무슨...?"
"내 침실의 비밀 장소에 닛뽄도 한 쌍과 권총이 보관되어 있어. 밀수선 타고 다닐 때 마련해둔 것인데 늙으막에 쓰이게 될 지도 모르겠군."
호출받고 전무실로 간 창배를 기태가 반기며 맞는다.
"어서 오게. 차 같이 마시자고 불렀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나 보군요?"
"사람하고는... 꼭 할 말이 있어야 자넬 불러야 하나? 지내기가 어때?"
"개밥에 도토리로 지내는 걸 잘 아시면서 뭘 묻는교? 사장님과 전무님 사이가 전 같지 않아 더더욱 눈칫밥을 묵고 있그만요."
"이럴 때일수록 자네 역할이 중요한 것 아니겠어? 사장님이 날 기피하고 있는 지금은 자네가 유일한 가교야."
"말빨이 서야 가교가 되든 징감다리가 되든 하제요. 말 나온 김에 제 심중을 밝히지만 회사를 다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중입니다요."
"그 무슨 소리! 자네는 엄연한 주주야. 사장님을 설득하여 회사를 존속시킬 생각은 않고 그만 둔다는 소리가 왜 나와?"
"그까짓 종이 쪼가리 주식이 뭐라고, 사장님, 전무님이 회사를 마음대로 주무르는데 5%짜리 들러리 주주가 무슨 힘이 있는교?"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군. 회사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힘은 주식인 거야."
"실없는 소리는 그만 하시고 날 부른 용건이나 말해 보소."
"퇴근 후에 술 한 잔 하러 가자고. 자넬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 가보면 알아."
***
룸으로 안내 된 창배, 여자 둘을 좌우에 끼고 앉아 있는 중년인을 보고 훔칫 놀란다.
"오랜만이야. 못 본지 삼십 년이 더 됐는데 대번에 날 알아 보는군."
"때린 놈은 맞은 놈을 몬 알아봐도 맞은 놈은 때린 놈을 몬 잊는다 안 카능교?"
"내가 강형을 때린 적이 있었나? 그런 기억은 없는데."
"부산의 거물이 되버린 백 형이 나 같은 찌질이를 다 기억해주니 탄복할 일이요."
"코흘리게 시절의 동무는 잊혀지지 않지. 한때는 부산이 좁다 카고 함께 휘젓고 다니기도 했는데 말이야. 거어 섰지 말고 이리 와 앉지."
"이제 보니 두 분은 그냥 아는 사이가 아니었구려?"
"소년원 들어 갔다가 나와 보니 강 형이 보이지 않더만. 강 형은 그 때부터 음지를 떠나 양지로 간 모양이지?"
"대장이 잡혀가면 부하들은 흩어지기 마련이지요."
"그 때 배신했다고 나무라는 거 아인깨 오해하지 말어. 박 전무님으로부터 우연히 옛친구 이름을 듣고 반가워서 보자고 한 거야. 자~술이나 마시자고. 야~ 이년들아! 저 분한테 술 부어드리고 살도 좀 부벼 봐."
창배가 손으로 여자가 오는 걸 막고는,
"백 형과 박 전무님이 이리 친한 사이인 줄은 몰랐오."
"백 사장과 내가 동업으로 클럽을 하나 만들고 있어. 여길 온 것도 견학차 온 거고."
"그거 진짠교?"
"내가 농담하는 것 같나?"
"진짜라면 더더욱 나한테 숨겨야 하는 것 아인교?"
"개업을 눈 잎에 두고 있는데도 여태 아무 눈치도 채지 못했다는 건데 그리 감각이 둔해서야 오영추 충견 노릇을 제대로 하겠어?"
"말씀이 너무 노골적이시그만. 내가 충견이면 오영추의 의제인 전무님은 뭔교?"
"오영추가 날 죽이려는 이 마당에 내가 모가지 빼고 쳐 주십사 해야 하나? 나도 살 길을 찾아야지. 사장님을 설득해 주게. 서울 갔다가 두 달이 넘어서야 돌아오고도 나하고는 통화조차 하지 않으려 하니 설득할 사람은 자네 뿐이야."
"이거야 원! 협박인지 회윤지 알 수가 있나. 아무튼 오늘내일 사장님댁으로 인사차 들릴 생각이었는데 말씀은 드려보지요."
"부탁하네. 파탄만은 막아주게. "대양투자"는 내 분신이나 다름없네. 내가 늑대가 되느냐, 온순한 양이 되느냐는 자네한테 달렸어. 이런 절박한 심정을 잘 헤아려 주게."
창배가 혼자 클럽을 나와 택시 잡아타고 대신동으로 간다.
불시의 방문에 영추가 뜨악한 얼굴로 맞는다.
"급히 보고 드릴 기이 있어서 왔습니다. 빈 속에 독한 술 두어 잔 마셨더니 속도 쓰리고 배도 고프네요. 아지매, 저왔습니다."
"오랜만이네."
"속 쓰려 죽것는데 해장국 없는교?"
"와 없어. 데우기만 하모 된깨 잠깐 기다려."
"딴청 부리지 말고 보고부터 해 봐."
"아까 전에 박 전무따라 어느 나이트클럽으로 갔다가 백두만이를 만났습니다."
"우연이 아니겠지?"
"알고 보니 백두만이 박 전무를 통해 절 유인한 것이었습니다. 소년일 때 한동안 백두만이와 어울려 다닌 적이 있었는데 30년 만에 만났지 뭡니까. 그 놈과는 만남 자체가 협박이었죠, 뭐. 박 전무가 저더러 사장님을 설득해 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실상은 비장의 무기를 저한테 보여준 깁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들 둘이 합작해서 클럽을 낸 다지?"
"아셨다니 다행이지만 백두만은 보통 조폭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허 기사가 불세출의 고수라는 건 인정하지만 박기태와 백두만의 연합세력을 감당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듣고만 있던 종구가 대화에 끼어든다.
"너무 걱정하지 마이소. 우리한테는 막강한 우군이 있으니까요."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전력 가지곤 안 돼."
***
새 양복 입은 재만이 출근 준비를 하고 마당으로 나온다.
"옴마야! 옷이 날개라 쿠더만 그 옷 입으니 귀공자 같아 예."
"양복을 처음 입어서 그런지 병아리 우장 입은 것 같은 느낌이야."
"공부하느라 살이 마이 빠져서 그럴 깁니더. 인자 운동도 하고 놀기도 하이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민숙아! 얼굴 대놓고 이런 말 하기는 쑥스럽지만 때를 놓치면 후회할 것 같아서 지금 말할게. 오늘의 내 성공은 네 덕분이었데이."
붉어진 얼굴에 미소를 머금으며,
'나좀 보레. 대문밖까지 따라 나와서 신랑 출근시키는 것 같잖아'
***
영추, 가현, 은실을 태운 차가 자성대의 창고로 간다.
"광복동은 안 가고 왜 여기로 와?"
"오늘부터 여기가 임시본부야. 이번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는 모두가 조심해야 돼. 가현이 네가 표적일 수도 있어."
"또 그 소리야? 귀에 딱지 앉겠다 뭐."
'제 생각에도 가현 씨는 표적 1호입니다. 가현 씨를 납치하여 사장님을 협박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가진 것 다 주고서라도 가현 씨를 되찾을 사장님이십니다."
다소간 심각한 얼굴이 되며,
"그 쪽이 날 지켜주면 되잖아요?"
"가현 씨는 내가 지키지만 그동안 사장님은 누가 지키죠? 그래서 심민보와 천상조를 만나 도움을 청하려고 합니다."
"뭐라고요? 왜 하필 그 새끼들이예요?"
은실이 가현을 거든다.
"남자들은 참 이상해. 어제의 적을 오늘의 동지로 삼는 일을 꺼리낌도 없이 하니 말이야."
가현과 은실을 등교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민보와 상조를 만나 창고로 데리고 온다.
"어서 오게. 또 보는군."
"서울서 좋은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허 군이 수술받은 이야기를 해주었나 보군. 수명을 늘렸으니 좋은 일이지."
"축하드립니다. 얼핏 뵈어도 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입니다."
"그래 보인다니 듣기 좋구먼."
"이번 사태가 안정될 때까지 두 분이 사장님을 경호해 주시기로 했습니더."
"이리 고마울 데가! 내 신변이 위험하다고 우기니 당분간 허 군이 하라는 대로 따르기로 했네."
"박기태 씨가 백상아리와 동맹을 맺었다 카이 제 생각에도 안심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백상아리파가 무서운 거는 회칼같은 무기를 예사로 쓰는 잔인성 때문이라 예."
"그런 걸 알면서도 힘이 되어 준다니 고마울 따름이네."
"사나이들끼리의 약속과 의리도 소중하지만 그런 악종들에게 사장님과 허 형이 당하게 놔둘 수는 없다 아입니까."
"자네들을 보고 있자니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다는 말이 생각 나는군. 나는 숙직실에 가있을 테니 편하게 지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