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구가 가페 "희"에서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데 김용건이 카페로 들어선다.
"감독님이 여긴 우짠 일입니꺼?"
"소장님이 여길 가보라고 해서 왔지. 자네가 기다린 사람이 바로 나야."
"소장님이 짓궂은 장난을 치셨네 예. 설마 감독님을 일 시키로 보내지는 않았을 긴데..."
"자네가 부탁한 사람이 나라니까. 보수 많이 준다기에 감독질 때려치와뿌고 왔어. 먼지 풀풀 나는 데서 일하기는 진절머리가 나서 말이야."
"진짜로 예?"
"진짜지 그럼. 가짜로 여기까지 왔을까. 소장님이 그러시더만 . 반 년이나 일 년쯤 자네와 같이 지내보라고."
"일 터지지 않으면 한가하지만 아주 위험할 수도 있습니더."
"소장님한테서 자네 얘기를 대강 듣고 왔은깨 서론은 생략하자고. 나 이래뵈도 아직 혈기가 넘쳐 . 자네와 한 집에서 지내다 보면 몇 수 배우게 될 거고."
"소장님이 가장 믿는 분을 보내주신 걸로 이해하것심더."
"우리 둘의 인연도 있잖아? 전우의 인연 말이야."
"이왕 이 카페로 오셨으니 제가 형님으로 모시는 분과 인사 나누시죠."
종구, 용건을 창수와 인사시킨다.
종구를 옆에 태우고 대신동으로 간 용건, 종구와 함께 집을 둘러 본다.
"오 사장님이 소문난 알부자라더니 이런 집에 살그만. 웬만한 공원은 저리 가라네."
"경비하기가 그만큼 어렵지 예."
"밤 손님이 자주 드나?"
"옛날에는 그랬다는데 먹고 살만한 세상이 되고는 없다시피 하답니더. 감독님이 신경쓰셔야 할 대상은 밤손님이 아니라, 사람을 해칠 목적으로 잠입하는 혹시 있을 지도 모르는 칩입자입니더."
"자넬 그 지경으로 만든 악당이면 곤란한데..."
"제가 이 집을 비울 때 집을 지키는 기이 감독님 일이고, 필요할 때 제 전우가 되어 주셔야 합니더."
"그만하면 알아 들었고, 이 집에서 내가 있을 곳은 어딘가?"
집 모퉁이를 돌아 잡동사니가 보관 돼 있는 창고로 데려가 방을 보여준다.
"오래 비워둔 방이라서 손을 좀 봐야 됩니더."
"그건 내가 해도 돼. 한 때 노가다판도 다녀 봤거든."
***
대문 여닫는 소리에 뒤란에서 앞 정원으로 나온 종구, 중간에서 가현과 은실을 만나다.
"밖에 차가 와 있던데 집에 누구 왔어요?"
"아침에 말했잖습니까? 오늘쯤 사람이 올지 모른다고. 지금 창고의 헛방을 손보는 중입니다. 사장님도 잘 아는 분으로서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럼 됐고요, 좀 있으면 손님이 올 거예요."
"유학중이라는 박동수 말입니까? 가현 씨가 좋아한 사람이라 들었습니다."
"아니 땐 굴뚝의 연기는 아니예요. 내가 많이 좋아하고 따른 데다 그 집 어른들이 날 며느리 삼겠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예요."
초인종이 울리자 산뜻한 가을옷을 입은 가현이 대문을 따주고 현관 밖으로 나간다.
동수가 대문을 들어서며 반가운 표정으로 가현에게,
"이 게 얼마만이야?"
"오랜만이예요."
"대학생이 된 널 보니 감회가 새롭다. 내가 미국 갈 때는 여고생이였는데... 백부님은 서울 가셨다지?"
"간이 나빠져서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갔어요."
두 사람의 모습을 종구는 나무 뒤에 숨어서 본다. 그런 종구를 가현은 슬쩍슬쩍 훔쳐 본다.
가현이 거실의 소파로 동수를 이끈다.
"내 친구예요. 같이 있어도 되죠?"
"박동숩니다. 친구 분이 와 있는 줄 모르고 방문했습니다. "
"장은실입니더. 어떤 분인지 궁금했는데 마침 뵙게되네 예."
"같은 대학 같은 학과를 다니고 있는 친구예요."
"반갑습니다."
"근데 학기 중에 한국은 어쩐 일이예요?"
"아버지 호출이지 뭐. 안 나오면 송금 끊는다고 위협하는데 어쩌니? 까닭도 모르고 나왔더니 백부님과 아버지 사이가 심각해져 있지 뭐냐. 니가 좀 말려보지 그랬어?"
"오빠는 그런 일이 왜 생겨 났는지 알고나 왔어요?"
"대강 들었어. 동우가 니네 운전기사를 해쳤다는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오해라고요? 동우가 그랬다면 그 새끼는 진짜 상종 못할 말종이야."
"오해가 아니면 동우가 왜 그랬지? 아버지도 그러시더라. 근본도 모르는 운전기사 하나 건드린 걸 트집잡아 어른들 싸움으로 키웠다고."
"뭐라고요? 나 참 기가 막혀서... 동수오빠. 날 왜 만나자고 했어요?"
"그야 널 보고 싶기도 하고, 오해도 풀고..."
"아무 것도 모르는 오빠한테 말 시키고 있는 내가 바보 같아요. 미안하지만 돌아가세요."
충격받은 모습으로 앉아있던 동수, 한참만에 한숨 토하고,
"미안하지만 친구 분은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시겠어요?"
일어서려는 은실을 붙잡아 앉히며,
"할 말 있으면 은실이 있는 데서 하세요. 얘도 동우가 한 짓을 다 알고 있어요."
"나 지금 혼란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 난 사실 아버지의 말도, 동우의 말도 액면 그대로 믿고 너한테 온 건 아니야. 너한테서 진실을 듣고 싶었는데 내가 나서서 어째 보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 같아 맥이 풀려."
"맞아요.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고, 돌이킬 마음은 추호도 없어요. 나도 오빠에 대한 좋은 감정은 접었어요. 철부지 시절의 좋았던 기억들을 해치지 말고 이만 돌아가세요."
"가족은 제쳐두고 우리 둘만의 문제를 따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는 없겠니?"
"동수오빠, 우리 쿨하게 끝내요. 대문까지 안 나갈 테니 여기서 헤여져요."
어깨 늘어뜨리고 대문으로 걸어가는 동수의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종구, 집안으로 들어간다.
"박동수가 왜 벌써 가죠?"
"가만 보면 음흉한 데가 있다니까. 나무 뒤에 숨어서 그가 오가는 걸 지켜 보질 않나, 맥 빠져서 가는 걸 보고도 엉뚱한 소릴 하지 않나."
"옛정이 있을 텐데 무우 짜르 듯 할 줄은 몰랐습니다."
"싱거운 소리 그만하고, 새로 오신 경비원 아저씨와 인사 좀 할게요."
***
단란주점에서 홀로 술 마시고 있던 동수, 동우가 나타나자 옆에 앉힌다.
"집을 코 앞에 두고 낮부터 무슨 술이야? 내가 알기론 술 즐기던 형도 아닌데."
"나라고 술 마시고 싶을 때가 없겠니? 형제끼리 술 좀 마셔보자고 불렀어."
"뭐가 그리 심란한데?"
"심란한 이유가 한두 가지겠니? 느닷없이 전화해 무조건 귀국하라고 한 것부터가 나한테는 메가톤급의 충격이었는데 와서 보니 완전 파국이야."
"아버지도 나도 형이 파국을 막아 줄거라 믿었어. 가현이는 만나 봤어?"
"집으로 갔다가 금방 쫒겨났어. 동우 너, 대체 가현이네 기사한테 무슨 짓을 한 거니? 더이상 날 속이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형마저 그런 꼴을 당했다면 그 집과는 볼장 다 본 기네 뭐. 한 마디로 그 새끼는 우리를 치기 위해 백부님이 준비한 비밀병기였다고."
"그렇다 치고 니가 왜 건드려서 약점을 잡혔냐고?"
"경솔하게 건드린 건 내 잘못이었다 쳐도 모르고 당하기 보다는 낫잖아?"
"넌 마치 함정을 찾아 내기라도 한 듯이 의기양양하구나."
"바로 그거야. 함정을 몰랐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했다고."
"너는 가현이와 볼장 다 봤다고 쉽게 말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어. 다시 찾아가 무릎이라도 굻고 애걸하고 싶다고."
"정신차려, 형! 길바닥에 널린 기이 여자고, 형 정도의 남자면 입맛대로 골라 잡을 수 있어. 가현이한테 딸린 재산이 아깝지만 유학생 가운데 재벌녀도 많다며?"
"그만해. 내 동생 입에서 그런 소리가 술술 나오는 걸 듣고 있자니 속이 메스꺼워."
***
이부자리에서 눈을 뜬 재만이 핸드폰을 더듬어 찾고는 문자를 확인한다. 용수철처럼 몸을 튕기고 일어난 그는 방문을 박차고 나가 민숙의 방문 앞에서 소리친다.
"민숙아! 나 합격했다아!"
민숙이 잠옷 차림으로 방문 박차고 나오며,
"참 말입니꺼?"
재만이 손에 쥔 핸드폰을 민숙이 눈에 갖다 댄다.
"봐라. 문자로 알려 왔잖아."
"진짜네! 둘이 얼싸안고 뜀뛰기를 하다가,
"옴마야! 오빠가 옷이..."
재만이 팬티만 입은 자신의 아랫도리를 보고 펄쩍 뛰고는 방으로 달려간다.
가현, 은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있던 종구가 전화를 받고 벌떡 일어선다.
"뭐 합격을 해? 축하한다. 집에 알렸나?"
"오늘 간다고?"
"그야말로 금의환양이구나. 돌아오는 대로 보자."
"재만 씨 전환가 보죠?"
"예. 7급 공무원 공채시험에 최종합격 했다네요."
"옴마야! 요새 공무원 되기가 별따기라던데.."
"친구는 대학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도 합격했는데 부럽지 않아요?"
"천만에요! 그 친구는 본래부터 우등생이었고, 난 공부에는 젬벵이었는데 약이 왜 오릅니까?"
"쳇! 공부 못한 것도 자랑인가?"
"야아! 그런 말이 어딨노? 허 기사는 공부대신 운동을 잘 하잖아. 얼마 전에 내가 책에서 읽었는데 스위스같은 나라에서는 20%만 대학엘 간다더라고. 그러니까 나름의 분야에서 뭐든 열심히 하면 아름다워 보여."
"이것봐라! 아예 대놓고 허 기사 역성을 드네."
***
몸을 못 가누는 동수를 동우가 부축해 대문 앞 돌계단에 앉힌다. 초인종 버튼을 누르자 화영의 목소리가 나온다.
"열고 들어오지 와 초인종을 눌렀어?"
"잔소리 말고 나와 봐."
대문 열고 나와 계단에 널부러져 있는 동수를 발견하고는,
"옴마야! 큰오빠가 와 이래?"
"나랑 술 한 잔 했어."
"누가 술 마신 걸 몰라? 좀 말리지 와 떡이 되게 놔돗냐고? 속상한 일이 많은 걸 뻔히 알면서."
"쪼깨는 기이 뭘 안다꼬 잔소리야! 이리 와서 거들기나 해."
***
기태네 아침식탁에 온가족이 모여 앉아 밥을 먹는다.
"동수 너는 밥 먹는 게 왜 그리 시원찮아? 진수성찬 차리느라 애쓴 에미를 생각해서라도 팍팍 먹어."
"놔두소. 뭣 때메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퍼마셨는지는 몰라도 음식이 모래같을 기그만."
"가현언니 만나고 고주망태가 돼서 들어왔더라 뭐."
화영이한테 눈 부라려 보이고,
"대신동에 갔다가 가현이한테 문전박대 당했대요."
그 말에 동수가 수저를 놓고 일어선다.
"전 먼저 일어 날게요."
식사를 끝낸 기태가 2층 동수의 방으로 간다.
"나다. 들어가도 되니?"
"예.
침대에 누웠다가 일어나 앉자 기태가 의자를 가져와 마주앉는다.
"가현이한테 문전박대 당했다는 말 사실이냐?"
"문전박대까지는 아니고요, 거실에서 말 몇 마디 나누고 쫒겨 났어요."
"그거나 저거나. 무슨 말을 했길래 가현이가 그랬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왜 왔냐던데요. 끝내자는 말도 했어요."
"그런다고 얼른 나와버린 거니?"
"그럼 제가 애걸복걸이라도 해야 했어요? 아버지와 동우가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마저 날렸다고요. 저 내일 돌아 가겠어요. 마지막 학기에 올인 해야 되요."
"안 돼. 아직 기회는 있어. 백부가 돌아오면 만나 봐. 백부도 널 박대하진 않을 거야."
"다 끝나버렸다는 걸 모르세요? 제발 저까지 휘말리게 하지 마세요."
"못난 놈! 한 번 부딪쳐서 포기해버리는 놈이 장차 무슨 큰 일을 하겠니? 잔소리 말고 가현이를 다시 한 번 만나 봐. 기다렸다가 백부도 만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