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구가 퇴원해 대신동으로 온 지 얼마 안 된 한나절에 대문 초인종이 울린다. 아줌마가 현관으로 뛰어간다.
"낯선 사람인데 예."
"누구냐고 물어 봐."
"김희상이라는데 예."
종구를 돌아보고,
"네가 말한 그 사람 아냐?"
"맞습니더. 제가 전화를 꺼놓고 있었더니 여기로 찾아 온 모양입니더."
종구가 목발을 짚고 현관까지 걸어가 손님을 맞아 들인다.
"제가 어려운 걸음 시켜드렸네 예."
"그 꼴이 뭐야? 목발까지 짚고."
"어떤 놈의 칼에 당했심더. 들어가입시더. 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더."
영추가 현관에서 희상을 맞아 들인다.
"김 지배인 얘기는 허 군한테서 많이 들었소이다."
"사장님을 뵙기는 처음이지만 오래전부터 명성은 들어왔습니다."
"허 군 걱정에 여기까지 오시다니 우정에 감복했오. 민 회장은 나와도 안면이 있는데 그 분의 의제라지요?"
"예. 사장님한테 안부인사 전하라는 당부를 받았습니다."
"나는 이만 자리를 비켜드릴 테니 얘기 나누시오. 좀 있다가 저녁 함께 드시고."
영추가 2층으로 가버리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전화는 왜 안 받고?"
"병원에 있을 동안 전화를 꺼놓고 있었습니더."
종구의 설명을 듣고는.
"자넬 유인하려고 여동생을 납치했다면 아주 전문가야. 놈의 정체는 알아냈어?"
"호남 말씨를 쓴다는 거 말고는 아는 게 없습니더."
"놈을 쓰러뜨렸다면서 그것도 안 물어 봤어?"
"청부업자씩이나 되는 놈이 다구친다고 자기 신분 밝히고 사주한 사람 대것습니꺼?"
"사주한 놈이야 알아 보나 마나 박기태 부자겠지. 경찰에서 알고있나?"
"경찰이 개입되면 골치아파지죠."
"그렇지만 박기태는 이 정도로 그칠 인간이 아니야. 어쩌면 다음을 준비하고 있는 지도 몰라."
"그렇겠죠. 어느 한 쪽이 박살나야 끝날 싸움인깨."
"다음 번에도 칼잡이일 걸. 단검이 아니라 회칼일지도 모른다고. 전에 말한 적 있지? 백상아리가 가장 위험한 가상의 적이라는 것 말이야."
"그 쪽 동태에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꺼?"
"그래서 더더욱 급하게 자네를 찾은 거야."
가현과 종구가 부산역에서 영추를 전송하고 대합실을 나온다.
"학교로 가실 거죠?"
"그 쪽은 요?"
"집에 다녀 올까 합니다. 오랜만에..."
"자고 오는 것 아니죠?"
"나 없으면 무서워요?"
"나도 여자라고요."
"난 가현 씨가 남자 뺨치게 용감해서 겁이 없는 줄 알았어요."
'이 가시나가 이 기회에 철이 좀 들려나?'
***
집으로 간 종구에게 민숙이 문간에서 와락 안기며 울음을 터뜨린다.
"마이 놀랬재?'
"놀랜 것 보다 오빠 걱정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뭐. 다리는 아직 덜 나았는 가베?"
"다 나았어. 목발은 상처 아문데 무리 안 가게 짚는 기고. 어머이가 놀랜 것 같던데."
"옴마는 내가 곁에 없으모 애가 된다 아이가."
"오빠가 우찌 돈을 벌어 오는지 이번 일로 똑똑히 알았다. 이 집도 좋고, 옴마 의족도 좋지만 그런 돈은 눈물 나서 싫다, 마."
"좀 위험해도 내가 선택한 일이야. 당면하고 있는 사장님 문제가 해결되면 편한 시절이 올 거야."
"느그 오빠가 그리 안쓰럽거든 소원을 하나 들어조라."
"우리 오빠 소원이 뭔데 예?"
"니가 검정고시 쳐서 대학에 들어가는 걸 보고싶다 안 쿠나."
"재만이 오빠까지도 그런 말 하깁니꺼? 검정고시가 한두 달 공부해서 될 일인가 뭐. 그건 나더러 옴마를 포기하라는 소리나 같아."
"그런 말이 아닌 거 알잖아. 어머이 때메 니가 무식자로 살아가는 한 나는 우황 든 소처럼 앓으며 살 수밖에 없어."
"그라모 오빠가 결혼을 해. 새언니한테 옴마를 맡길 수 있게 될 때는 검정고시 아이라 만리장성도 넘을 긴깨."
***
종구가 사무실로 들어가자 웬 남자 둘을 상대 하고있던 여 사무원이 반색한다.
"어머! 미스터 허. 교통사고 났어요?"
"그 비슷합니더. 여기는 세월도 안 흐르는지 누님은 여전 하시네 예?"
"무슨 소리예요. 노처녀로 팍팍 늙어가고 있그만. 소장님 곧 오실 거예요."
때마침 소장이 나타난다,
"또 한바탕 했구먼? 들어 가자고."
정원에 개들을 풀어놓고 놀고 있을 때 가현이 은실을 달고 학교에서 돌아온다. 잔디 위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종구에게로 간 가현이 살가운 태도로 말을 건다.
"벌써 와 있었네요. 오늘부터 은실이가 우리집에서 같이 지낼 거예요."
"가현 씨와 둘만 있기가 거북했는데 잘 오셨습니다. 저는 주로 방에 있거나 정원에 있을 테니 집안에서 편하게 지내십시요."
"몸은 어때요?"
"워낙 건강체질이라서 잘 낫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은실 씨한테 신세 많이 졌습니다."
"자리 비켜 줄 테니까 둘이 잘해 봐."
은실이, 가현의 뒤꼭지에 주먹 먹이는 시늉하고 따라간다.
***
김해공항 입국장에서 동수가 큼직한 캐리어를 끌고 게이트 나서자 화영이 쪼르르 달려가 품에 안긴다.
"화영이는 어른이 다 됐네."
"큰오빠는 외국인 같아졌어. 옷차림도, 머리 스타일도."
화영을 밀어내고 멀찍이서 기다리는 어머니에게로 가 포옹한다.
"어디 아팠어요? 좀 마르셨어요."
"늙어가는 기지 뭐. 네 얼굴을 봐서 좋기는 하다만 공부하기도 힘든 널 오게 만들어서 영 못마땅하다."
"이유는 말하지 않고 무조건 다녀가라고 하던데 대체 무슨 일이예요?"
"나도 잘 몰라. 백부님과 네 아부지가 다툰 모양인데 무슨 까닭인지, 얼마나 사이가 나빠졌는지는 말해주지 않는구나. 걸핏하면 부자가 머리 맞대고 소근거리는데 예삿일은 아닌 모양이야."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거라고. 둘이 이야기 하다가도 내가 가까이 가모 입 싹 닫아버리는 걸."
"차 가지고 왔은깨 가면서 얘기 하자꾸나."
"졸업 후에 뭘 할지 계획은 섰어?"
"글쎄요. 국내로 돌아와 취직하는 것과 미국에 눌러 사는 걸 반반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거기 눌러 살 생각도 했구나. 니 아부지가 들으면 홰장작 팰 소리야."
"왜요?"
"몰라서 묻나? 가현이와 결혼시켜 사업 물려 줄 거란 말을 언제부터 해왔는데."
"그건 아버지의 생각일뿐이예요. 가현이와의 결혼은 저도 바라마지 않지만 아버지와 백부님의 대부업은 딱 질색이예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사업보다는 다른 것에 꿍심이 있다는 건 너도 알잖아? 니 아부지는 그 일이 틀어질까 노심초사야. 동우까지 한 통속이 되어 우짜자는 건지 알 수 없다 카이."
***
박기태와 백두만이 공사 중인 건물에서 만나 의견을 나눈다.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었으니 지금부터는 슬슬 인적 구성을 시작해야 안 되겠오?"
"추천할 사람이 있으면 말씀해 보시지요. "
"나야 돈 장사만 해 온 사람이라 그 방면에는 문외한일뿐더러 잘 아는 사람도 주변에 없소이다."
"일 할 사람이야 내 수하 중에 널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럼 사람 쓰는 문제는 백 사장이 알아서 하시지요."
"경리는 전무님 사람으로 한 자리 비워 두지요. 오영추는 어쩌고 있습니까?"
"병 고친다고 서울 갔다는데 회사를 이 지경으로 휘저어 놓고 훌쩍 가버리니 그 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요. 하긴 최근에 들어 안색도 나쁘고 자주 드러눕기는 했지요."
"그가 장기간 떠나 있으면 박 전무님이 운신하기에 편하지 않겠소이까?"
"그야 그렇지만 뭔가 찝찝해서요. 아무튼 우리 일이나 서둡시다."
"남포동 애들이 눈치를 챘을 긴데 아무 반응이 없으니 되려 불안한데요."
"백 사장과 이 박기태가 손잡고 하는 일을 감히 어떤 놈들이 훼방 놓겠소이까?"
"하기사 범이 무서웠으면 애당초 산에는 안 올랐지요."
동수가 집에 왔다는 전화를 받고 조퇴한 기태를 삼남매가 현관에서 맞는다.
"여! 오랜만에 가족이 다 모였구나."
"사람 하나가 보태졌는데도 집안이 꽉 차 보이네."
"그 기이 장남의 존재감이제. 차남은 찬밥이라니까."
"오느라고 고생했다. 그동안 아픈 데는 없었니?"
"공부에 쫓기느라 아플 틈도 없었어요."
"MBA인가 뭔가가 그리 따기 어렵다면서?"
"죽자살자 공부해도 따기 어려워요. 근데 절 왜 오라고 하셨어요?"
"너 아니고는 안 될 일이 좀 있어. 그건 좀 있다가 얘기하자."
가족이 방으로, 주방으로 흩어져 가고 거실에 기태와 동수만 남아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가 오영추한테 뒤통수를 맞았어."
동수가 못 믿겠다는 듯 고개 갸우뚱거리자,
"갈라서자는 통고를 받았단 말이다."
"제가 미국 가기 전만해도 두 분 사이가 좋았잖아요?"
"사이가 나빠진 건 지난 봄부터지만 알고 보니 오영추가 오랫동안 배신의 칼을 갈고 있었더라고."
"사이가 나빠진 데는 무슨 까닭이 있을 것 아니에요?"
"사단이야 있었지. 하지만 그 사단이야 말로 오영추가 고대했던 기회였어. 그 때부터 얼씨구나 하고 날 핍박하고 나왔으니까."
"제가 뭘 어쩌 길 바라시는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네가 가현이를 잘 구슬러 봐. 그 애 마음이 떠나버리면 지금까지 애비가 공들여 쌓은 탑이 와르르 무너져버려."
"두 집안에 알력이 생겼는데 가현인들 절 반기겠어요?"
"가현이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널 따랐고, 커서 너하고 결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잖니. 오영추도 널 마음에 들어 했고. 지금 갈라진 양가의 틈을 메울 아교는 너뿐이야."
"가현이를 만나 보겠지만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뭐가 어찌 된 일인지를 똑 바로 알죠."
"애비 말을 못 믿겠다는 거냐?"
"전 피곤해서 그만 자야 되겠어요."
"그래. 올라가 자고. 내일 다시 얘기하자꾸나."
'저녀석이 서양물을 먹더니 뻣뻣해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