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종구,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들으며 눈을 뜬다.
"미련한 사람! 나한테만이라도 사실을 알렸어야지. 왜 혼자 위험한 짓을 했어?"
"사흘 만에 깨어난 거 알아요?"
눈길을 돌리다가 사람들과 동떨어져 있는 재만을 발견하고는,
"민숙이는?"
"아무 탈 없이 돌아 왔은깨 걱정 마."
"대체 어떤 놈이 이랬노?"
창배의 물음에 종구가 대답없이 눈을 감아버리자 재만이 앞으로 나선다.
"일마는 아직 온전한 정신이 아닌 것 같습니더. 여긴 제가 지킬 긴깨 가서 일 보시지 예."
***
아침나절, 초췌한 모습의 동우가 어둑한 카페에서 기태와 마주 앉는다.
"등신같은 놈! 네가 하는 일이 그렇지. 자세히 설명해 봐."
"손목과 발목에 골절상을 당해 걷지 못하는 그를 제가 업어다 차에 태우고 밤새 여수까지 데려다 줬어요."
"혼자 한다고 건방 떨 때 알아 봤지. 허종구는 어찌 됐어?"
"그 놈도 크게 다친 것 같았어요. 119가 와서 싣고 가는 것까지 봤는데 어딘가에 입원해 있겠죠. 독사의 말로는 다리를 깊숙히 찔렀답니다."
"그 정도로는 병신이 되지 않아. 섣뿔리 건드렸다가 산통 깨게 생겼어."
"더이상 제가 할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시원찮은 너한테 일 시킨 내가 그렇지. 넌 이 일에서 손 떼고 공부나 해."
종구가 잠에서 깨자 재만이 읽고 있던 책을 던지고 병상으로 와 이마를 짚는다.
"자면서 헛소리 해대던데 기억 나?"
종구가 힘없이 고개 젓고는 묻는다.
"오늘이 며칠이고?"
"날짜 알아 뭐할라꼬? 입원한 지 닷새 째야."
"민숙이가 보고싶다. 어머이도."
"민숙이도 애를 태우고 있다. 제 자신도 엄청 놀랐을 긴데 네 걱정만 해."
"공부에 지장을 조서 니한테도 미안하다. 곧 2차 시험일 긴데."
"남 걱정하고 자빠졌어. 네 놈하고 찢어지든지 해야지. 내 명대로 몬 살 것 같다.
종구가 다시 잠 들었을 때 가현과 은실이 병실로 온다.
"벌써 수업 끝나고 오는 깁니꺼?"
"마지막 강의는 땡땡이 치고 오는 기라 예."
"재만 씨는 지금 집에 가서 쉬시다가 밤 열시 경에 우리랑 교대해요."
재만이 소지품을 챙겨 병실을 나간다.
'저 가시나가 종구 간병에 와 저리 열성이지? 오래 살고 볼일이야'
여자들 소리에 종구가 눈을 뜨자 가현이 묻는다.
"정신이 좀 맑아졌어요?"
"몸이 상했지 정신이 상했습니까?"
"쳇! 얘기할 수 있는가를 묻는 거잖아요."
"은실 씨도 오셨군요."
"가현이 따라왔어 예."
"두 분한테 고마워요. 두 번씩이나 수고를 끼쳐서요."
"이번에는 어떤 놈이었어요?"
"모르죠.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놈이라는 것 밖에는. 그리고 칼잡이었습니다."
"그 막대가 칼에는 상극이라더니 어쩌다가 칼에 찔렸죠?"
"난데 없이 구두 끝에서 칼이 튀어 나왔으니까요."
"야는! 싸움 얘기가 뭐 그리 좋다고 자꾸 말 시키노? 떠올리기도 끔찍할 긴데."
"싸움 얘기가 얼마나 재밌다고."
***
박기태, 유순태, 정연민이 같은 수의 사나이들과 바닷가의 식당에서 술과 음식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다.
"뜸은 이만하면 충분히 들었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나와 백 사장이 남포동의 클럽을 하나 공동으로 만들고, 공동으로 운영하자는 게 요진데 백사장의 의견을 듣고 싶소."
"그거 나와바리 전쟁을 일으키자는 말씀이나 다름없는데 그런 위험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이유가 뭔지부터 말씀 해 보시지요?"
"나도 이젠 돈장사에 신물이 나고, 힘도 딸려서 업종을 바꾸고 싶소. 클럽을 오래전부터 꿈꾸던 사업인데 세력 없이 시작했다가는 먹히거나 밟히기 십상이라 손을 잡았으면 하는 거요."
"세력 없다는 박 전무님의 말을 누가 곧이 듣겠오? 여기 있는 유 부장, 정 과장만 해도 작은 동네 하나 씩은 꿰찰 실력자들이신데. 이 백두만이도 듣는 귀가 있는데 솔직해지셔야 대화가 순조롭지 않겠오?"
동석한 황윤모가 거든다.
"최근에 대양투자의 사장님과 전무님 사이에 이상기류가 생겼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우에된 스토리인교?"
"허!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더니 벌써 그쪽 분들 귀에도 들어갔구먼. 실은 얼마 전에 그 늙은이한테 뒤통수를 까이고 말았소."
부두목 이달문이 묻는다.
"허종구라는 이름이 뒷골목 화제거리가 됐던데 오디서 굴러 묵던 놈인교?"
그와 마주앉은 유순태가 대답한다.
"글마 얘기는 내가 하지요. 진주출신으로 서울서 사람을 주먹으로 때려 죽이고 4년 옥살이를 하고 부산으로 굴러 온 놈이라요. 힘도 장사급이지만 주특기가 격투기고, 어리숙한 촌놈 같아도 아주 영리한 놈이기도 합니다."
"오영추 사장이 그놈을 믿고 박 전무님을 깟그만. 어쨌든 회사가 쪼개진다는 소문은 사실인 모양인데 우리가 손을 잡는 목적에 그 놈을 손봐달라는 것도 포함되겠지요?"
"허- 허. 너무 빨리 정곡을 찔리는구만."
"그 놈이 심민보, 천상조를 꺾었다고 기고만장한 모양인데 이 백두만이 한테는 해장거리도 못 되지."
"백 사장이야 그런 쪼무래기들과는 급수가 다르지요. 여기 있는 두 분만 해도 허종구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거요."
"말씀하신 클럽은 나한테도 여간 구미 당기는 사업이 아니외다. 오디 구체적으로 상의해 봅시다 그려."
***
영추가 먼저 와 기다리는 식당의 룸으로 장기호가 나타난다.
"허 기사는 어떻습니까?"
"어제 실밥 뽑고 먼저 그 병원으로 옮겼네. 앞으로 몇 달은 다친 다리를 무리하게 쓰면 안 된다는군."
"그럼 사장님이 추천하고 있는 일들도 속도 조절이 필요하겠군요?"
"그래서 자넬 보자고 한 거야. 주총도 두어 달 늦춰야 하고. 실은 간 이식수술 하러 서울도 다녀와야 하고."
"그럼 만사 제쳐놓고 수술부터 하셔야지요. 그런데 그리 오래 걸리면 박 전무가 야로를 부리지 않을까요?"
"부려도 어쩔 수 없지. 수술이 급하니까. 부동산 매각 말인데 나 없어도 추진해 주게."
"그러지요. 그런데 허 기사를 무방비 상태로 두고 가시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요?"
"사람을 붙이기로 했어. 자네도 아는 사람들이야. 심민보, 천상조가 허 군의 친구가 됐어. 허 군이 완쾌될 때까지 보호해 주기로 했다는군."
"예? 어제의 적한테 신변의 안위를 맡기다니, 허 기사는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군요."
***
영추, 창배, 영찬이 창고 경비실에서 모임을 갖는다.
"여긴 별 일 없었지?"
"여기야 무풍지대 아닙니까."
"강 이사는 뭣 좀 알아 냈어?"
"절 완전 왕따당하게 만들어 놓고 그리 물으면 우짭니까? 인턴사원 마저도 절 무시하는 판국이라고요."
"각오했던 일을 갖고 불평은...사람들과 접촉 없다고 동태파악도 못하나?"
"수상한 낌새가 있기는 합니다. 요즘들어 3인방이 회사를 비우는 일이 부쩍 잦아졌는데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그 셋이 꾸미는 일이라면 음모일 가능성이 농후하니 재주껏 알아 봐."
"회삿돈을 빼돌리는 건 아닐까요?"
"그런 것이면 오히려 다행이지. 회사를 통째로 떠메고 사라져버린다 해도 좋으니까."
"그럼 저는 우짜고요?"
"내가 어련히 챙겨줄까."
"허 기사는 어떻습니까? 병문안 한 번 못 가봐서 체면이 영 안 섭니다."
"자네들은 병원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말아야 해. 허 군도 그런 사정은 잘 알고 있으니까 미안해 할 것도 없고. 오늘 자네들을 보자고한 것은 내가 오랫동안 서울에 가 있을 예정이기 때문이야."
"서울은 와요?"
"병치료지 뭐겠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간이 많이 안 좋아졌어. 이식수술을 할 게획이야."
***
만취상태로 귀가하는 기태를 동우 혼자 현관에서 맞는다.
"네 에미는?"
"몸이 안 좋아 일찍 자리에 누웠어요."
"또 어디가 안 좋다는 거야. 집구석에서 핑핑 노는 여자가 아플게 뭐냐고?"
그때 정숙이 방문 열고 나오며 말 소나기를 퍼붓는다.
"핑핑 노는 여자라고요? 당신한테 살림은 일이 아니고 노는 긴 갑네. 밖에서 돈 벌어오는 사람이라야 아플 권리가 있다는 거냐고요?"
"말 꼬리나 잡고 잘 한다. 요즘 내가 밖에서 무슨 꼴을 당하고 다니는지 당신은 관심도 없지? 집구석이 망해봐야 정신이 들 여자야. "
"흥! 당신이 남을 해쳤으면 해쳤지 남한테 당할 사람인가 오디."
"뭐가 어째! 이걸 그냥..."
"때려 봐요. 때려보라고요."
동우가 재빨리 둘 사이에 끼어들며 큰 소리로 말한다.
"제발 좀 그만 하세요. 자식들한테 창피하지도 않아요?"
"니 애비가 주먹 치켜드는 거 안 봤나? 가정폭력 안 컷다고 처자석 앞에서 맹세한 지가 일 년도 안 됐어. 제버릇 개 몬 주는 기제."
"아버지도 열받는 일이 있다고요. 위로는 못 할망정 불편한 심기를 긁지는 마세요."
"너 지금 니 애비 편드는 기가?"
"편이 오딨어요? 속앓이 하고 있는 아버지가 안 되서 하는 소린데."
"동우야, 그만해둬라. 바깥 일은 집안에까지 끌고 오긴 싫다. 네 형한테 전화해서 잠시 귀국하라고 해."
"미국서 공부하는 아를 뭐할라꼬 오라해요?"
"동수가 나와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동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무슨 일인지 몰라도 갸는 지금 졸업반이라고요."
"집안 흥망이 달린 일에 졸업이 뭐라고..."
정숙이 입을 딱 벌리고 남편과 아들을 번갈아 본다.
***
카페 "희"에서 찿수와 희상이 차 마시며 이야기한다.
"요즘 허 아우의 얼굴을 통 볼 수가 없어 걱정되네요.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나도 허 아우 걱정을 했어. 박기태와 전쟁이 일어날 것이란 말을 남기고 간 뒤로 소식이 없으니 무슨 변고가 난 게 틀림없어. 오사장댁이 대신동이라던데 알 수 없을까?"
"집은 제가 알아 보기로 하죠. 남포동 끝자락에 있는 빌딩 지하에 대형 클럽이 생긴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 모르게 거기에 클럽을 열어?"
"박기태가 거기 자주 나타난다는 제보도 있습니다."
"그 인간이 거긴 왜?"
"그냥 흘려 들을 소문이 아니라서 형님한테 달려 온 겁니다. 제 예감에는 백상아리파와 무관치 않을 것 같은데요."
"가만 있자. 허 아우는 연락이 끊기고 박기태가 그 미묘한 지점에서 뭔가 일을 꾸민다면... 이제야 감이 좀 잡히는군. 박기태가 허 아우를 처치하기 위해 백상아리와 협상을 한 것 같단 말이야."
"제 예감도 그렇습니다."
"나와바리 태평성대가 흔들릴 때가 되었다고도 느꼈는데 나쁜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하는군. 허 아우를 찾는 일부터 서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