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추가 종구를 대동하고 장기호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한다. 여비서가 끓여 온 차를 마시며 영추가 운을 뗀다.
"박기태와 갈라 설까 하네. 함께한 세월이 너무 길었어."
"박 전무도 알고 있는 사실입니까?"
"닷새 전에 구두로 알렸네. 사직형식을 빌렸지만 사실상 결렬 통보였어."
"반응은 어땠고요?"
"펄쩍 뛰지 어쩌겠어. 생각해보라 하고 자리를 떴지만 아직은 무반응이야."
"사장님의 결심은 확고하고요?"
"그러니까 자넬 만나로 온 것 아닌가?"
"야단났군요. 박 전무로서는 가만히 입 벌리고 있으면 입안으로 떨어질 홍시가 나무째 사라질 판이니."
"자네도 박기태의 꿍심을 알고 있었군 그래."
"대양투자 고문 변호사이자 주주의 일원이 된 지가 자그마치 십오륙 년이 됐는데 분위기 파악도 못해서야 말이 됩니까?"
"홍시 몇 개는 떨어뜨리고 갈까하네. 회사를 키우는 데도 큰 공이 있는 사람이니까."
"어쩌실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요."
"먼저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야지. 회사를 해산하느냐, 나 빼고 존속시키느냐를 의결해야 할 것이고, 내 지분을 어떻게 회수하느냐도 논의 해야지. 회사를 존속시킬 경우 내 지분의 절반은 현 주주들에게 골고루 나눠 줄 생각이네."
"사옥빌딩은 어쩌고요?"
"그건 내 개인 소유야. 회사를 존속시킬 경우 응당의 임대료를 지불해야지."
"그 빌딩도 문제가 되겠는데요. 회사의 사옥처럼 인식되어 왔으니."
"무슨 소리! 회사 사무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내 개인이 임대료를 받아 왔어."
"사장님의 뜻은 충분히 납득했습니다만 박 전무도 그리 생각할까요? 어쨌든 좀 더 반응을 지켜보지요."
***
동우와 함께 귀가한 기태를 정숙이 고개 갸우뚱거리며 맞는다.
"해가 서쪽에서 떴나, 부자가 맨 정신으로 같이 들어오거로."
"동우랑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저녁은 좀 있다가 먹자고."
부자가 2층으로 가버리자,
"이상해. 최근 들어 저 인간의 기상도가 저기압 일변도인 것도 그렇고, 부자 간의 속닥거림이 부쩍 잦아진 것도 그래. 대체 나 모르게 무슨 일을 꾸미지?"
동우의 방으로 온 부자가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독사가 부산 오는 날이 내일이지? 착수금 건네는 것은 며칠 늦추는 게 좋겠어."
"그건 곤란한데요. 피차 간에 비밀이 엄수 돼야 할 입장인데 그런 일로 신뢰를 떨어뜨려서야 되것냐고요. 돈이 준비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가 아니라 일 착수 하기 전에 오영추와 다시 한 번 담판을 해볼 생각이야."
"이틀 정도는 여기저기 관광시키고 대접하면서 시간을 끌 수 있지만 더는 곤란해요."
"이틀이면 충분해."
***
아침나절, 영추가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린다. 아줌마가 현관으로 달려 가 폐쇄회로를 본다.
"박 전무님인데 예."
"열어 줘."
소파로 와 앉은 기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인가?"
"형님이 오시지 않으니 제가 올 밖에요."
"결심이 섰나?"
"정말 저와 갈라 설 생각입니까?"
"그 걸 확인하러 오지는 않았을 텐데?"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시죠."
"모든 걸 주총을 통해서 의결하자고. 내 뜻은 장 변호사에게 듣도록 하고."
"제가 왜 장변 따위에게서 형님의 뜻을 전달 받아야 합니까? 회사의 운명은 어디까지나 형님과 저 사이에서 결정 될 문제라고요."
"이봐! 대양투자는 엄연한 주식회사라고."
기태가 주먹으로 탁자를 친다.
"형-니 임! 저한테 어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콩알만한 사업체를 호박만큼이나 키운 게 누굽니까? 형님이 거부가 된 것은 또 누구 덕입니까? 토사구팽이란 말이 딱 형님이 저한테 하고 있는 겁니다."
"자네 우격다짐 하려고 여기 왔나? 잘 하면 나를 치겠네?"
"화가 나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형님이 뭘 믿고 이러시는 지는 몰라도 궁지에 몰린 맹수는 있는 힘을 다해 발악한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기태가 다시 한 번 탁자 치고 일어선다 .
차고에 차 넣고 휘파람 불며 정원으로 올라 온 종구가 거실로 들어가다가 소파에 축 쳐진 몸을 걸치고 있는 영추를 보고 놀란다.
"아니, 와 그러고 계십니꺼? 어디가 편찮으십니꺼?"
"맥이 풀려서 그래. 좀 전에 박 전무가 다녀 갔어."
"그가 협박이라도 했습니꺼?"
"내 앞에서 주먹으로 탁자를 치더군. 두 번씩이나."
"앞으로 제가 없을 때는 문 열어 주지 마이소. 선전포고나 다름없네 예."
***
부산역 개찰구를 빠져 나오는 건장한 남자에게 한 청년이 다가 가 캐리어를 받아 끈다. 올빽 머리에 짙은 썬그라스를 썼고, 그 밑으로 오똑한 콧날과 엷은 입술이 길게 찢어져 있어 날카로움을 풍기는 인상이다.
친구가 독사 홍남석을 이끌고 커피숍으로 들어오자 구석자리에 앉았던 동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맞는다.
"첨 뵙습니다. 박동웁니다. "
"홍남석이오."
"저보다 한참 위신데 말 놓으시죠."
"그래도 될란가?"
"부산이 처음은 아니시죠?"
"이번이 세 번째지만 일로 오기는 첨이지라."
"쉬시면서 구경도 하시고 즐기기도 하이소. 일단 해운대의 숙소로 모시겠습니다."
"놀러 온 거 아인깨 표적부터 보더라고. 아님 사는 집을 가보든가."
"어차피 부산에 체류하실 동안 차가 필요하신데 렌트카부터 빌리죠."
썬그라스를 낀 동우가 옆 자리에 홍남석을 앉히고 영추집 앞을 서행한다.
"이 집입니다."
"으리으리한 집이그만. 사람이 많이 사나?"
"주인은 노인과 대학생 딸이 모두고, 늙은 가정부와 허종구가 상주하고 있습니다."
"집은 크고 사람은 적다는 건데 너무 허술하지 않아?"
"집은 안 됩니다. 표적 외에는 누구도 해쳐서는 안 되거든요."
"예민하게 반응하는데 박 군은 이 집 사람들과 어떤 관계야?"
"반 년 전쯤 표적이 이 집에 보디가드로 오기 전까지는 아주 친한 사이였습니다."
"표적이 사이를 갈라 놓았다는 말이군."
***
렌트카 운전석에 앉은 독사, 영추의 집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길 가에 차를 세워 두고 영추의 집을 드나드는 차와 사람의 동향을 지켜 본다.
감시를 시작한 지 닷새 째 오후 마침내 종구 혼자 집을 나와 언덕 길을 걸어 내린다. 차속에 앉아 감시하고 있던 독사, 문현동 집까지 종구를 미행하고는 호텔로 돌아간다.
"무슨 일로 호출 했습니까?"
"드디어 기회를 잡았거든. 놈의 집을 알아 냈다고."
"뭘 잘못 아신 것 아닙니까? 글마 집은 시골인데."
"천만에 그 집에 놈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살고, 놈의 친구가 더부살이 하고 있더라고."
"거기가 오딘데요?"
"문현동이란 동네더만."
"제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네요. 근데 우짤라고요?"
"놈의 여동생을 납치해야 되겠어."
"그건 안 됩니다. 허종구 외에는 아무도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머리가 그리 안 돌아가는감? 고기를 낚자면 미끼가 있어야 하잖냐고?"
***
이틀 후 해거름에 장바구니를 들고 나서던 민숙이 웬 남자에게 입이 틀어막힌 채로 차속으로 끌려 들어간다.
저녁 식사중이던 종구, 주머니 속의 휴대폰이 울리자 전화를 받기 위해 식탁에서 몇 걸음 떨어진다.
"뭐시라!"
종구의 고함에 영추와 가현이 먹기를 그치고 종구를 주시한다.
"세 시간이 지났다고? 지금 바로 갈 긴깨 집에서 기다려."
단축번호를 눌러대다가 식탁으로 돌아 온 종구의 얼굴이 잔뜩 굳어있다.
"제 동생이 오후에 장보러 나가서 아직 안 돌아 왔답니더. 죄송하지만 제가 가봐야 되것심더."
"시장이 머나?"
"집에서 걸어서 5분이면 가는 뎁니더. 전화가 꺼져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일이 생긴 것 같심더."
"어서 가봐. 차 갖고."
가현이 불안 어린 눈으로 묻는다.
"집에 무슨 일이 생겼기에 저리 허둥대? 얼굴마저 노래져갖고."
"허 군 동생이 납치된 것 같구나."
"어떤 새끼가 그런 짓을 해? 또 동우 짓이야?"
"속단하기엔 일러. 어쩌면 그 애비 짓일 수도 있어."
"설마 숙부가..."
"그 숙부 소리 그만 둘 수 없니?"
"아 - 알았어. 습관이 돼 무심코 나온 거야."
"너도 정신 바짝 차려. 이젠 본격적인 전쟁이란 말이다. 누가 적인지도 모르는 철부지를 어쩌면 좋아?"
***
종구가 길 가에 차 세워두고 골목길을 뛰어가고 있을 때 폰이 울린다.
"누구시오?"
"나는 그대를 지난 보름동안 눈병 나게 지켜봤는데 그대는 날 모르니 어쩌나..."
"내 동생은 어딨오?"
"동생이 참하더만. 안전한 곳에 잘 모셔놨은깨 걱정 말더라고이. 경찰에 알리면...에이! 그런 바보짓 할 그대는 아니것제."
"내가 어쩌기를 바라시오?"
"동생한테 고생 덜 시키려면 빠를수록 좋제이. 오늘 밤 자정, 유엔묘지로 오시오이. 누굴 달거나 누구한테 알리는 우는 범하지 말더라고이.
나도 혼자니께 . 아 - 그라고 , 그대가 순순히 내 말을 들으면 동생은 털끝 하나 상하지 않고 풀려난다는 걸 약속하제. 그대는 어차피 내 말을 믿어야 안 되것는 감?"
집으로 간 종구, 마루에 퍼질고 앉아 민숙아. 민숙아 하고 불러대는 어머니 모습에 주르르 눈물을 흘린다.
"벌써 몇 시간째 저러고 계신다."
"민숙이는 아직 무사한 모양이야."
"진짜? 그 걸 우찌 아는데?"
"니만 알고 있거라. 어떤 놈이 날 불러내는 미끼로 민숙이를 납치한 기다."
"지난 번 그 놈들 짓이가?"
"아니야. 말씨 부터가 달라. 날 믿제? 내가 가야만 민숙이가 풀려나니까 그리 알고 기다려 도."
가로등 불빛이 있는 유엔묘지로 들어선 종구, 인적 끊어진 묘지를 휘둘러 보고 있을 때 먼 나무 뒤에서 사람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몇 발작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인다. 바지, 윗도리, 모자, 구두 할 것 없이 검정색 일색이다.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아 고맙구먼이라. 따라 오시오이."
홍남석이 산책하 듯이 여유있는 걸음걸이로 어슴프레한 산등성이를 향해 오르고, 몇 걸음 뒤를 종구가 따른다. 이윽고 분지 같은 펀펀한 지형이 나타나자 걸음을 멈추고 돌아선다.
"여그가 내가 미리 봐 둔 자리지라. 달빛도 교교하니 한바탕 놀아 보더라고이.
홍남석이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여자 풀어 줘."
"용도 폐기니까 잔말 말고 풀어주란 말이야."
"뉘신지 몰라도 약속 지켜줘서 고맙소."
"여동생을 이용해서 미안구만이라. 그대의 약점이 그뿐이라 어쩔 수 없었당게."
"돈은 충분히 챙겼오?"
홍남석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 생각하는구만이라."
"사생결투요? 승부요?"
"그대의 사지에서 힘줄 두어 가닥 끊어놓을 뿐인깨 너무 긴장하지 말더라고."
"목숨은 살려준다니 고맙소. 자 - 오시오."
맨손의 격투가 한참 계속된다. 특이한 것은 종구가 금기를 깨고 주먹을 쓴 것. 등치도 큰 데다 격투기로 다져진 종구가 차츰우세를 점한다.
몇 번의 격돌에서 손해를 본 홍남석이 몸을 뒤로 물리고 피묻은 입언저리를 손등으로 문지르고는 비릿한 미소를 베어문다.
다시 지쳐드는 그의 손에는 어느새 가늘고 날카로운 단검이 쥐어져 있다. 종구도 고개 끄덕이고는 윗도리 안에 감추고 있던 단봉을 뽑아든다. 단검 대 단봉의 대결이 시작된 지 오래지 않아 홍남석이 무거운 신음과 함께 오른손의 단검을 떨어뜨린다.
왼손으로 또 하나의 단검을 뽑아 들고 악착같이 덤비는 그를 종구는 절레절레 고개 흔들며 방어하다가 왼손 손목마저 딱 소리나게 후려친다.
그러나 그 순간 날아드는 홍남석의 발차기를 다리를 들어 막는 순간 그의 구두 속에 감추어진 칼날이 튀어나와 종구의 대퇴부를 깊숙히 파고든다.
윽! 하는 비명과 함께 뒷걸음치는 종구를 독사는 집요하게 따라붙어 칼이 장착된 다리를 뻗어온다. 종구의 단봉이 그 어느때보다 강력하게 휘둘리며 상대의 발목을 격타하자 독사는 악! 하는 비명과 함께 풀석 주저 앉고 만다.
종구는 더이상 공격하지 않고 웃을 찢어 다리를 졸라매 출혈을 막는다.
홍남석이 괴로운 얼굴로,
"내가 졌오. 그리고 고맙소. 늦으면 출혈과다로 죽을 수도 있오."
"그대야 말로 기어서라도 가시오. 뼈만 상했지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거요."
누워있는 독사를 남겨두고 종구는 절뚝거리며 산등성이를 내려간다.평지로 내려 온 그는 아련히 들려오는 구급차 소리를 들으며 눈에 잘 띄는 공지에 몸을 누인다.
묘지 경내로 달려 온 119구급 대원들이 곧바로 누워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들것을 들고 달린다.
한편 묘지 인근에 차를 대놓고 있던 동우는 구급차 경적소리에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한참 지나 독사를 업은 동우와 그의 친구가 산에서 내려 와 유엔묘지에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