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실의 커피타임에 기태가 창배를 대동하고 참석한다.
"강 이사도 커피를 즐기나? 임원 둘이 함께 오니 회의 분위기구먼."
"그렇잖아도 회의 하려고 강 이사를 불렀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경매 물건에 대해섭니다만."
"그 건이라면 회의할 것도 없어. 새우가 고래를 삼키려 하면 안 된다고 했잖은가?"
"우리가 왜 새웁니까? 회사의 운영 자금만 해도 웬만한 은행지점을 능가하는데요."
"깔아 놓은 돈을 다 거두면 그리 되겠지만 여유자금이 그럴 정도는 안 된다는 거지."
"욕심이 과한 줄은 압니다만 포기해버리기엔 너무 아깝습니다. 지난 며칠간 강 이사가 발품 팔아가면서 조사한 것도 있으니 들어보시고 다시 판단하시죠?"
"들어보나 마나야. 문제는 돈이지 물건이 아니라고."
"제가 이러는 것은 단순히 욕심 때문만은 아닙니다. 자식들 머리가 커지고 보니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이 기회에 업종전환을 해 보자는 겁니다."
"여러 말 할 것 없고, 무슨 돈으로 그 걸 손에 쥐겠다는 건지나 말해 봐."
"그야 깔아 놓은 돈 회수와 보유 부동산 매각을 통해 현금확보를 최대한으로 하고 나머지는 회사의 실 소유자이신 형님이 증자를 하셔야죠. 형님한테는 그럴 능력이 있잖습니까?
"결국 그 이야기군. 내 추측이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어."
"형님!"
"그런 호칭, 회사에서 쓰지 않기로 했지? 솔직히 말해 난 그 호칭이 께름칙하고 싫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형님이 전같지 않아서 심히 혼란스럽습니다.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못마땅 하시면 말씀을 해 주십시요."
"그만하게. 내가 변한 건 사실이야. 나는 이제 회사도, 사업도 정리할 나이지 떠벌릴 때가 아니야. 이 참에 못박아 두지만 더 이상 투자는 하지 않겠네."
영추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전화를 건다.
"나 지금 내려가니까 차 빼."
***
입고 작업이 한창인 창고 마당 한 켠에 차를 주차시킨 종구, 잠든 듯이 등받이에 기대 있는 영추의 모습을 보고 기척없이 차에서 내려 달려오고 있는 박 소장을 막아선다.
"사장님은 잠이 드셨습니더."
"오신다는 말씀이 없으셨는데 무슨 일이지?"
"출근 하실 때까지 별 이상이 없으셨는데 갑자기 녹초가 되버린 모습으로 차를 타시고 여기로 오자고 했심더."
"혹시 간밤에 술 드셨나?"
"그런 기 아이고,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심더."
영찬은 경비실로 돌아가고 종구는 작업현장으로 가 노무자들과 인사를 나눈 후 차로 돌아 와 독서를 하고 있을 때 잠을 깬 영추가 기지개를 켠다.
"한숨 잤더니 몸이 가뿐해졌군. 내가 오래 잤나?"
"반 시간 남짓 됐심더."
"차속에서 그만큼 잤으면 많이 잔거지."
경비실로 자리를 옮긴 영추가 종구와 영찬을 불러 앉히고 커피타임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준다.
"들어 보니 사장님이 선전포고를 하셨네요. 박기태로서는 벼락맞은 느낌일 겁니다."
"내가 사무실을 나올 때까지 넋 나간 사람같이 앉아 있더라고. 평소에 못 하던 말들을 줄줄 쏟아내고 나니 나도 가슴이 후련해지면서도 심장이 쿵쿵거리고 살떨림이 일더라고."
"그래서 녹초가 되셨그만 예. 전 그것도 모르고 갑자기 이상이 생겼는가 하고 걱정했심더."
거실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영추, 초인종 소리에 신문을 내리고 아줌마가 이층으로 가라는 손짓을 해 보이자 벌떡 일어나 계단을 오른다.
기태가 현관을 들어서자,
"오랜만이네 예. 우얀 일로 아침나절에 여기로 오셨능교?"
"형님이 사흘씩이나 회사를 안 나오시니 와 볼 밖에요."
"사흘 전인가 한밤중까지 술을 드시더니 몸에 무리가 간 기라 예. 속상한 일이 있는 지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으시데 예."
"방에 계십니까?"
"아침에 죽만 조금 자시고 올라 가셨는데 주무실런 지도 몰라 예. 올라 가 보이소."
침실로 간 기태가 침대에 누워있는 영추의 안색을 살펴보고는 입을 연다.
"그날 속상해서 과음을 하셨나본데 면목이 없습니다. 이제 그만 털고 일어나시지요."
"내일은 출근할 생각이었어. 의자 가져와 앉아."
"그 경매물건에는 관심 끊었습니다."
"잘 했어. 애당초 안 될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말 나온 김에 업종변경에 대해서는 형님과 심도있게 의논해 봤으면 합니다. 형님은 물론이고, 저 역시 사업일선에서 물러 날 날이 멀지 않았기에 자식들에게는 반듯한 업체로 개조하여 물려주고 싶습니다."
"방향은 옳지만 그건 자네 생각일 뿐이야. 나는 가현이한테 사업 물려 줄 생각은 추호도 없어.그 애의 희망도 사업과는 거리가 멀고."
충격받은 듯한 얼굴로 기태가 애원조로 나온다.
"형님! 무엇 때문에 저한테 역정을 내시는지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요. 우리 둘이서 잘 저어 가던 조각배가 갑자기 풍랑을 만난 것만 같습니다."
"이보게, 박 전무. 나는 늙고 병마저 들었어. 이제 슬슬 인생을 정리할 때가 되었단 말이네."
"정말 왜 이러십니까? 제가 보기엔 형님은 아직 정정하시고 의욕도 시들지 않았습니다. 무슨 까닭인지 최근에 들어 자꾸만 저와 멀어지려는 것만 같아서 팔짝 뛰고 환장하겠습니다요."
"내가 충고를 하나 하겠네. 추후에라도 사업과 가현이 장래는 연결짓지 말게. 나는 그 애의 인생에 가시밭도, 비단길도 깔아 줄 생각이 없어.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나?"
"제 큰 놈과 가현이를 맺어 주겠단 언약은요?"
"그 걸 언약이라 하면 안 되지. 한 때의 바람이었을 뿐이었으니까."
"그 바람이 변함 없는지 묻고 있는 겁니다."
"글쎄. 아무튼 애들이 다 컷으니 저희들 마음에 맡기자고."
한 시간쯤 지나 현관을 나선 기태가 어깨가 처진 모습으로 대문을 향해 걸어가고, 집 모퉁이에 숨어서 지켜보던 종구가 대문이 닫힌 후에 현관으로 들어간다.
***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한지 사흘째, 가현과 은실을 대학 정문 앞에 내려 주고 돌아오는 길. 한적한 구간에서 끼어들기를 하여 진로를 막는 승용차를 발견한 종구가 브레이크를 밟으며 백미러로 뒤를 살핀다. 뒤에도 승용차 한 대가 바싹 붙어있어 포위당한 형국이다. 앞 차에서 야구방망이를 든 청년 둘이 내려 종구의 차를 갓길로 유도 한다. 운전석에 감추어 둔 목봉을 허리춤에 찌른 종구, 천천히 차에서 내린다. 앞 뒤의 차에서 다섯이 내려 종구를 포위해 오는데 그 가운데 레슬러 천상조가 끼어 있다. 그가 어깨를 흔들거리며 다가 와 말을 건다.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돼 안 됐지만 빚 청산은 해야 안 되겠어?'
"무슨 빚인지 모르지만 꼭 이런 식으로 받아내야 되겠오?"
"요전 번에는 실력을 몰라보고 망신만 당했는데 이 정도면 대접이 제대로 될란지 모르겠네."
"알고 보니 명성 꽤나 있는 분들이던데 패거리 몰고 온 거 부끄럽지도 않소?"
"당할대로 당한 창핀데 뭘 더 부끄러워 할까? 잡설 집어치우고 무릎 꿇고 비는 게 어때? 그러면 병신되는 건 면하게 해줄 긴깨."
"날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군."
"우리를 상대로 싸우시겠다고? 대장부다운 기개를 봐서 한 가지 약속을 하지. 만일 우리를 물리치면 내가 그대의 부하가 되라고 해도 따르지."
"그 말 머릿속에 새겨 두지."
***
천상조가 두세 걸음 뒤로 빠지면서 공격이 시작된다. 맨손의 두 청년은 정면에서, 방망이 가진 둘은 차 위로 뛰어 오르며 방망이를 휘두르는데 방망이질에 차가 상하자 종구의 목봉이 빛살처럼 날아가 한 사내의 발목을 타격한다.
악! 비명과 함께 그 사내가 굴러 떨어지고, 얼마 못 가 나머지 사내도 똑 같이 비명을 지르고는 차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네 명의 합공에 종구 또한 피투성이가 된다.
관전하고 있던 천상조가 가담하지만 악귀의 모습을 한 종구의 받아치기는 조금도 위력이 줄지 않는다. 싸움이 지지부진 해지자 드디어 심민보가 차에서 나와 소리친다.
"야이 등신들아, 빨리 해치워! 사람들이 차 세우고 구경하잖아."
그 소리에 남은 청년 둘이 잭나이프를 뽑아 든다.
또 다시 청년 하나가 목봉에 손목을 가격 당하고 비명을 지르는데 멀리서 순찰차의 삐뽀음이 들려오자 심민보가 또 다시 소리친다.
"야! 다친 애들 태우고 빨리 떠."
심민보 일행이 떠나버리자 종구가 차에 몸을 기댄 채 스르르 무너져 내린다.
상처투성이의 종구가 응급실 한 쪽에 누워 잠들어 있다. 창배가 헐레벌떡 달려와 종구를 살펴보고는 간호사에게로 간다.
"저기 누워 있는 환자, 혼절한 깁니까. 자는 깁니까?"
"실신한 채 실려 왔는데 진정제를 맞았어 예. 보호자시면 입원수속부터 하세요."
종구가 입원한 지 오래지 않아 가현과 은실이 급하게 병실로 온다.
"수업 중일 긴데 우찌 왔노?"
"허 기사가 우리 등교시키다가 다쳤는데 강의가 귀에 들어와요? 어머나! 저 상처들 봐?"
"겉보기는 엉망이라도 치명상은 없어 다행이야."
"누구짓이래요?"
"깨어나 봐야 알제. 짐작 가는 놈이 있기는 한데 글마가 그런 조폭같은 짓거리를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아."
"몇 놈한테 당했대요?"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관 말로는 여섯 놈이었다느만."
"옴마야! 허 기삿님이 살아있는 기 기적이네."
"누가 사주했는지는 알 것 같아."
"그럼 말 함부로 하지 마. 섣부른 짐작일 수도 있으니까."
몇 시간만에 깨어난 종구가 가현과 은실을 발견하고 멀뚱거리자 가현이 쪼르르 달려 와 묻는다.
"어찌 된 일이예요?"
"여기가 어딥니까?"
"동래에 있는 병원이예요. 만신창이가 됐는데 가만 누워 있는 게 좋아요."
"싸운 건 기억나는데 그 다음은 생각이 안 납니다."
"실신해 있는 걸 순찰차가 실어 왔대요."
"그 새끼들 짓이죠? 박동우 만나던 날 싸웠던 새끼들 말이예요."
종구가 대답없이 눈을 감아버린다.
이튿날 대신동의 한 외과 병원으로 옮겨진 종구, 영추가 오자 기를 쓰고 일어나 앉는다.
"누워 있지 왜 일어나?"
"차를 망가뜨려 죄송합니더."
"지금 차가 문제야? 혹시 몰라서 내가 잘 아는 대신동의 개인병원으로 옮겼으니까 그리 알고 있어. 동래의 그 병원은 그 놈들한테 노출돼서 말이야."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 거야. 백주에 그 놈들이 차를 막아 습격해 오리라고는 예상이나 했어?"
은실이 가방을 들고 일어난다.
"저는 이제 가 볼랍니더. 집이 여기서 가까운깨 오다가다 들릴께 예."
"애 많이 썼어."
은실이 가버리자 영추가 병상 옆에 붙어 앉는다.
"또 그 놈들이지?"
"예. 심민보 일당 여섯 명이었습더."
"죽일 놈들! 칼, 방망이까지 사용했다니. 어찌 그럴 수가 있어?"
"이 번에는 주먹을 썼겠죠?"
"너도 허 군이 주먹 안 쓰는 사연을 알고 있구나?"
"얼마 전에 얘기해 줬습니더."
"주먹이 신주단지라도 되요? 그런 위급한 공격에도 안 쓰고 아끼게. 미련하기는 곰 저리가라야."
"나한테는 단봉이 주먹보다 훨씬 효과적인 무기니까요."
"쳇! 잘났어. 정말."
"아픈 사람한테 무슨 말이 그래? 너 때문에 허 군이 이 지경 됐는데."
"잘난체 하잖아요,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