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추와 종구가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가현이 과일 디저트를 가져 와 합석한다.
"아빠한테 허락 받을 일이 있어. 오늘 차 좀 쓰게 해 줘."
"어디 가려고?"
"해수욕하러 일광에 갈 거야. 친구들과 달맞이고개에서 만나기로 했어."
"안 돼. 수영도 못 하는 애가 해수욕은 왜 가?"
"내가 누구 때문에 수영 못 배웠는데. 등산도 안 돼, 해수욕도 안 돼, 여행도 안 된다면서 날 바보로 만들어 놓고 아직도 안 된다 타령이야?"
"야이 녀석아! 널 위험한 데 못 가게 하는 애비의 심정을 그렇게도 모르겠니?"
"나 이제 애가 아니라고. 성인 된 지가 언젠데 애 취급이야? 친구들 하고 약속했단 말이야."
"에이그! 대학생 되더니 애비 말을 뭣 같이 안 다니까. 허 군은 수영 잘 하나?"
"좀 하는 편입니더."
"해수욕장에 가거든 가현이한테서 한 순간도 눈 팔지 말고 가까이서 지켜. 물에 들어가 있을 땐 물론이고, 사내놈들이 찝쩍대는 것도 예방하란 말이야."
"알것심더."
"어둡기 전에 돌아오는 것도 명심하고."
"내가 못 살아. 증말!"
때 이른 점심을 먹고 차고에서 차를 꺼내 냉방시키는 종구, 가현이 대문을 나서자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본다. 어깨와 무릎이 시원스럽게 드러난 하얀 색 원피스 차림에 주름장식의 검정색 볕 가리개 모자를 쓴 모습이 헐리욷 영화의 주인공 같아 보인다.
'성질은 지랄 같아도 몸매는 죽여주는군'
상큼한 향수 내음을 풍기며 가현이 차에 오르자 종구가 먼저 말을 건다.
"만나는 친구들이 누구죠?"
"동우 친구들 만나는 거 아니니까 신경 꺼요. 동우와는 당분간 거리를 두기로 했어요."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물어도 됩니까?"
"몰라서 물어요? 그 새끼 때문에 그런 수모를 당했는데."
"난 또 동우가 날 해치려 드는 게 괘씸해서 그러나 했죠."
"그런 이유도 없지 않으니까 운전이나 똑 바로 해요."
저만치 집 앞에 나서 있는 은실을 보고 가현이 깜짝 놀란다.
"어머! 저 계집애 좀 봐. 핫팬츠 입었잖아?'
"가현 씨도 한 번 입어 보지 그래요."
"내가 미쳤어요. 저런 야한 옷을 입게?"
은실이 차안으로 들어오기 바쁘게 가현이 핀잔을 준다.
"야! 누굴 꼬실라고 그런 옷차림이니?"
"그리 야해 보이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요조숙녀 스타일이잖아. 통통한 다리를 내 놓으니 씨암탁 같아서 보기는 좋다만."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나 볼라꼬 패션에 신경 좀 써 본 기다 와."
"기분 좀 냈다는 거네. 난 국제시장에 들려서 수영복을 살 건데 넌 준비해 왔지?"
"언니가 입던 거 빌려 왔는데 나도 마음에 드는 거 하나 사야 되것어."
"내나 너나 여태 뭐하고 살았는 지 몰라. 수영복 하나도 없이."
"허 기사님은 수영 잘 하지요?"
"바다에서는 해본 적 없지만 민물에서는 잘 하는 편입니다."
"그럼 우리한테 수영 좀 갈차주이소."
"그건 좀 곤란한데요."
달맞이고개에서 이슬과 지애를 픽업하고 일광 해수욕장으로 간 일행이 즐비한 탈의 가게들 가운데의 한 곳으로 들어간다. 종구는 가게 앞쪽 백사장에 퍼질고 앉는다.
이윽고 수영복으로 갈아 입은 일행이 가게를 나오는데 가현과 은실은 튜브 하나씩을 옆구리에 끼고 있다.
종구 옆으로 지나가다가 이슬이 묻는다.
"허 기사님은 물에 안 들어 갑니꺼?"
"아~예. 수영복 준비가 안 돼서요."
"탈의실에서 대여도 해줘요."
"전 여기서 구경이나 하지요."
저만치 멀어져 가며,
"느그 기사는 수영을 몬 하나 본데 해수욕장에 왔으모 물장구라도 치며 더위를 식히는 기이 정상 아이가?"
"혹시 몸에 타투 있는 거 아이가? 조폭들이 하는 용문신 같은 거."
지애와 은실에게 퉁을 준다.
"추측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하는 거 듣기 안 좋다, 야."
"지나다니는 여자들 나체 구경이 더 좋은지도 모르지."
가현의 말에 귀 밝은 종구가 손가락으로 귀를 후빈다.
백사장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가 눈을 뜬 종구, 가까운 곳에서 놀고 있던 가현과 은실을 찾다가 은실이 보이지 않자 벌떡 일어나 손 차양하고 살펴본다.
튜브에 올라 탄 채 웬 남자에게 깊은 데로 끌려가고 있는 은실을 발견하자 윗도리와 구두만 벗어 던지고 바다에 뛰어 든다. 그들을 따라잡아 청년을 떼어내고 은실을 얕은 물로 끌고 오자 청년도 머쓱한 표정으로 따라 온다.
가현이 다짜고짜 청년의 뺨을 때린다.
"야이 새끼야! 싫다는 사람을 왜 끌고 갔니? 이 새끼 이 거, 상습추행범 아냐?"
"이것 봐라. 부모한테도 안 맞은 뺨을 너 따위 계집애가 때렸다, 이거지?"
"그러니까 맞을 짓을 왜 해? 분하면 덤벼 보든가."
"뭐 이런 년이 있어? 여자를 칠 수도 없고 환장 하겠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종구가 끼어든다.
"학생인가 본데 장난이 좀 심했어. 새파래져 있는 저 여자 분 얼굴을 보고도 뺨 맞은 것이 분하시오?"
청년이 종구의 우람한 덩치를 보고 풀이 죽어버리며 굽신 사과를 한다.
"악의 없는 장난이었으니 용서 하십시요. 그렇지만 저 여자의 손찌검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이 쯤 합시다. 잘못은 서로 비겼으니."
지켜보고 있던 동료가 그를 등 떠밀고 현장을 떠난다. 뒤늦게 가현과 합류한 이슬과 지애가 은실을 위로한다.
"야 얼굴 좀 봐. 새파래졌어."
"그 거 짓궂은 머스마들이 흔히 하는 장난이야."
화를 억누른 가현이 은실의 손을 잡아 끈다.
"그만 가자."
"어데로?"
"집이지 어디긴."
"벌써? 일광까지 왔는데 본전은 뽑고 가야 될 것 아이가."
"해가 아직 중천에 떠 있는데 집에 가기는 그렇다, 야."
"그럼 니네 둘은 더 놀다 와. 난 김이 새서 더는 못 놀겠어. 은실이는 나보다 더 할 거고."
가현과 은실이 탈의실로 들어가고, 이슬과 지애는 탁자를 차지하고 앉아 얼음 넣은 쥬스를 마신다.
"야! 이슬아. 허 기사 멋 있지 않니?"
"몸이 조각상이야. 미대생들이 봤으면 모델 해달라고 아우성치겠어."
"몸보다는 하는 짓이 남자답다는 거야. 저 남자 오늘 다시 봤어."
"야! 어디 남자가 없어서 친구네 기사한테 눈독을 들이노?"
"하긴 아이보가 안 맞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은실이 자책을 한다.
"난 와 이리 바보 같은 지 몰라. 그 새끼가 장난을 걸 때 너처럼 가시를 세워야 됐다고."
"네 잘못 아냐. 해수욕도 그만하면 충분했고."
"해수욕은 오늘로 굿바이야. 근데 허 기사님은 와 물에 안 들어 갔어 예? 수영을 그리 잘 하믄서요."
"근무 중이었으니까요."
"쳇! 근무란 말이 입에 붙었어. 오늘 같은 날은 놀아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데."
차를 탄지 얼마 못 가 가현도, 은실도 잠이 든다. 종구는 오늘의 일들을 되새김질 하며 자신을 꾸짖는다.
'허종구. 정신 똑 바로 차려! 네가 지금 여자들 매혹에 눈을 팔 처지야?'
은실을 그녀 집 앞에 내려주고 산길을 오르며 종구가 입을 연다.
"충고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알아요 무슨 말 할지."
"그래도 해야 되겠습니다. 가현 씨는 손찌검을 너무 자주, 너무 경솔하게 합니다. 그 거 고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많이 뉘우치고 있어요. 성질이 더러운 건지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가곤 해요."
"언젠가 나한테 물은 적 있죠? 왜 주먹을 쓰지 않느냐고? 난 주먹 함부로 썼다가 천추의 한을 가슴에 심은 사람입니다."
"그 주먹으로 살인이라도 했어요?"
종구가 한숨을 토하며 고개 끄덕이자,
"어머나 진짜예요?"
"다수를 상대하는 싸움이라서 정신없이 주먹을 휘둘렀는데 어먼 사람 하나가 머리의 급소를 맞고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끝내 숨졌습니다. 그래서 4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아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요?"
"경비원으로 임용될 때 말씀드렸죠. 고백 듣고나니 내가 무섭습니까?'
"천만에요. 나 그쪽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는데 그 한 마디에 막힌 게 뻥 뚫려버렸어요. 집에 가서 감동이 가시기 전에 그 이야기를 들어야 되겠어요."
"나 원! 그게 감동할 일입니까? 내 인생을 깡통 우그러뜨리 듯해버린 사건이란 말입니다."
***
퇴근길에 남포동의 룸싸롱으로 간 창배가 먼저 와서 술을 마시고 있는 기태와 합석한다. 뻣뻣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창배에게 기태가 곰살맞은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연다.
"우리 둘이 이런 데서 술자리 갖기는 처음이지?"
"솔직히 말해서 그럴 만큼 친하지도 않았지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한 깁니까?"
"자네와 내가 힘 모아 회사를 끌고가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소원했어. 술자리를 빌어서라도 좀 친해져 보더라고."
"회사에서 눈칫밥 묵고 있는 전데 전무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뜻밖인데요. 밤도 짧은데 본론으로 들어가시지요."
"이 사람이 뭐가 그리 조급해?"
"안 하던 짓이라 어색해서요."
"서면의 그 경매물건에 관해선데 조사해 보니 어떻던가?"
"그거 몇십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대물이라던데요. 전무님이 지시한 일이라 나름대로 알아는 봤지만 여간 골치 아픈 물건이 아니더라고요. 입질해 보실라고요?"
"에끼! 이 사람. 우리가 물고긴가? 입질을 하게."
"입질이나 입찰이나 그게 그거죠."
"그 입질 말이야. 우리가 사운을 걸고서라도 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걸 종합상가와 주상복합건물로 리모델링을 해서 우리가 직영하면 대박이 날 거란 확신이 들어."
"욕심이야 나지요. 문제는 우리 재력 아인교?"
"그래서 자네와 내가 손을 잡자는 것 아닌가."
"아무 힘도 없는 저하고 손 잡는다고 없는 돈이 생기능교?"
"아 - 돈이야 사장님한테 있지 않은가? 나혼자 설득하기 보다는 우리 둘이 입을 맞추는 게 효과적일 거 같아서."
'이 여우가 뭘 노리고 있지?'
"자네도 머리를 굴려 봐. 그걸 낙찰 받아 우리가 직영하게 되면 거기 사장은 자네야."
"말씀만 들어도 배가 터질라 카네요. 근데 그 건물이 경매시장에 왜 나왔는 지 아능교?"
"3인 합자회사로 잘 운영해 오다가 주인 셋 사이에 알력이 생기면서 결국 부도에까지 이르렀다고 들었네만.
"제가 알기로는 입찰에도 큰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고, 낙찰 받는다 해도 뒷처리가 엄청 복잡할 깁니다."
"알아. 우리가 그런 장사 한두 번 했나, 어디."
"권력층이 깊숙이 개입돼 있는 것도 알고 있능교?"
그럼 큰 건물에는 권력층이 주렁주렁 닿아 있기 마련이야. 그렇다고 범 무서워 산에 못 가고, 독사 무서워 풀 못 베나? 자네는 나랑 장단 맞춰 사장님 설득에나 힘써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