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차속에서 가현이 전에 없던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묻는다.
"안 아파요? 얼굴이 엉망인데."
"가죽 찢어지고 멍든 건데요, 뭘."
"그 쪽을 얕잡아 본 거 사과할게요."
"틀린 말도 아닌데요. 오늘은 그 놈들이 날 시퍼보다가 당한 겁니다."
"겸손인 거 알아요. 그 새끼들이 강자들인 것도 알고요."
"둘 중 키 큰 놈은 아마 이름있는 복서였을 겁니다. 아무튼 주먹질 함부로 하면 큰코 다친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후회하고 있어요. 근데 아까 동우한테 한 말이 무슨 뜻이예요? 미묘한 타이밍이라 했잖아요?"
"아~그거요? 사실이 그랬지 않습니까?"
"동우가 꾸민 짓이라는 건가요? 말도 안 돼."
"말이 되는 지, 안 되는 지는 천천히 되짚어 보시죠. 나도 확실한 증거를 갖고 그런 말 한 것은 아닙니다."
"동우가 그런 짓 할 이유가 있어야 믿든지 말든지 하죠. 걔는 나랑 사촌간처럼 지내왔고, 우리 아빠랑 걔 아빠도 형제간처럼 지내 왔다고요."
"압니다. 하지만 우연이 겹치면 의심해보는 게 옳지 않습니까?"
"그렇다치고, 동우가 그 쪽을 해치려는 의도가 뭐죠?"
"가현씨가 날 내쫓아버리고 싶어하는 걸 동우가 알았나보죠?"
"말도 안 돼!"
"하도 이야기가 심각해서 끼어 들기는 뭣하지만 내가 듣기에도 의심이 간다, 야. 그리고 가현이 니가 허 기사 싫어한 건 사실이잖아?"
은실의 말에 가현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던 가현이 집에 도착해서야 입을 연다.
"아빠한테 이를 거예요?"
"숨기려 해도 얼굴이 이래서 숨길 수가 없잖습니까."
종구가 침대에 누워 희상과 통화하고 있다.
"몸은 어때?"
"얼굴이 호빵되고, 입술이 당나발 되버렸지만 견딜만 합니더."
"그만 하기 다행이야. 걔들이 누군지 알아?"
"모르지만 무명소졸은 아닐 것 같은데 예."
"큰 놈은 심민보라고 웰터급 동양챔피언을 지낸 복서고, 작은 놈은 왕년에 제법 알려졌던 레슬러야. 이름은 천 무엇인데 기억나지 않는군."
"우짠지...심민보란 자의 소나기 펀치에 정신이 가물가물 하더만 예."
"그런 놈들을 꺾어버린 아우는 이제 부산 주먹계의 신성이 됀 거야. 아마 며칠 못 가 소문이 쫙 퍼질 걸."
"달갑잖은 일입니더. 키 큰 나무가 바람을 많이 맞는데요 뭘."
"바람 싫어서 키 안 크는 나무도 있나? 그리고 박동우 말인데 걔는 여기 단골이야."
"그럼 박동우가 누구 아들인지도 압니꺼?"
"알고말고. 그 녀석 애비 박기태를 모르면 이 바닥 사람이 아니지.아우가 모시는 분이 오영추 사장이야?"
"결국 아시게 됐네 예. 그 문제의 학생이 바로 그 분의 딸입니더."
"세상은 생각보다 좁다네. 근데 박동우와 심민보, 천상조는 잘 아는 사이라고. 며칠 전에도 여기서 만나 숙덕거렸어. 업소에 vip나 요주의 인물이 오면 내가 보고를 받는데 박동우와 심민보도 그런 부류야."
"알만 합니더. 조만간 지금 하신 얘기를 좀 더 자세히 들었으면 합니더."
"그러자고."
***
챙모자를 깊게 눌러 쓴 종구가 고개를 푹 숙이고 집으로 들어가자 재만이 큰 소리로,
"얌마, 종구야! 얼굴 좀 들어 봐라."
그 소리에 민숙이 부엌에서 나와 종구의 얼굴을 살핀다.
"붓고 멍들었잖아. 싸왔나?"
"마이 다친 거 아닌깨 소란 떨지 마라."
어머니를 의족 의수 가게로 모셔가 맞춘 의족을 대퇴부에 끼어 넣는다. 의족으로 땅을 디뎌보며 선물받은 아이처럼 활짝 웃는 어머니를 보고 민숙도 덩달아 환하게 웃는다.
"옴마, 어떻노?"
"조~타!"
"불편한 데는 없고?"
"조~타!"
"어머이, 왔다 갔다 걸어 다녀 보이소. 아픈 데는 없는지."
민숙의 부축을 받으며 걷던 어머니가 마침내 혼자 걷는다.
"싱글벙글 하는 옴마 얼굴 좀 봐라. 되기 좋은 갑다."
"이 걸로 내 가슴속의 응어리가 한 웅큼은 줄어든 것 같다."
"와 응어리를 품고 사노? 오빠는 할 만큼 했다 아이가."
"아직 멀었다. 널 대학에 보내기까지는..."
"그 기이 무슨 말인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도 아이고."
"어머이 모시고 어서 집에 가자. 나, 되기 바쁘거든."
이슥한 밤, 현관을 나와 살금살금 후원으로 간 가현이 나무 뒤에 숨어 종구의 수련을 지켜본다.
땅에 어지럽게 박아 놓은 새끼감은 말뚝들을 나무토막으로 찌르고 휘두르는 동작이다. 지켜본지 1분도 안 돼 종구가 동작을 그치며,
"숨어서 보지 말고 나오시죠?"
"쳇! 들켰잖아. 그런 감각이면 귀신도 잡겠어요."
가현이 나무 뒤에서 걸어 나오며 겸언쩍은 미소를 띄운다.
"나는 귀가 남달리 밝습니다. 멀리서 욕하는 소리도 곧잘 듣죠."
"그럼 내가 몰래 욕하는 소리도 들었어요?"
"들었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거짓말 말아요. 내가 언제 욕했다고..."
싱긋 웃어 보이며,
"걸핏하면 양아치니 산적이니 하고 욕했잖습니까?"
"어머나 정말 들었어요?"
"지금 자수하신 거 맞죠?"
"쳇! 몸으로만 유도 잘 하는 줄 알았더니 말로도 유도를 하잖아."
"한밤중에 어쩐 일입니까? 여길 다 오게."
"잠이 안 와서 바람쐬러 나왔어요. 저 말뚝들은 다 뭐예요?"
"훈련용 표적입니다."
"저기에 미운사람 이름 써 붙여놓고 패는 거 아니예요?"
"그럴 만큼 미워하는 사람은 없는데 왜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그냥 해 본 소리예요. 근데 그 커다란 주먹 놔두고 왜 막대를 고집해요? 어제 보니까 급한데도 주먹을 쓰지 않던데."
주먹 들어 보이며,
"이 주먹 말입니까? 난 여간 해서는 주먹을 쓰지 않습니다."
'이 주먹이 사람을 죽였다는 걸 알면 기절초풍할 걸'
"실은 그 쪽한테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곰곰 생각해 보니 그 쪽이 한 말이 맞는 것 같더라고요. 그 일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었어요."
"이미 확인된 사실입니다. 박동우와 그 두 놈은 며칠 전에도 그 클럽에서 만나 뭔가 모의를 했던 모양이고, 어제 지배인이 저한테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진짜요?"
"지배인 이 거짓말 할 이유가 있겠어요? 그 두 사람 중 키 큰 쪽은 웰터급 전 동양챔피언 심민보, 작은 쪽은 레슬러로 심의 오른팔이랍니다."
"어머나! 그런 쟁쟁한 실력자들이 동우의 수족노릇을 했다니 이해가 안 돼요."
"동우의 수족이 아니라 돈에 움직였겠죠."
가현이 충격 받은 모습으로 침묵하다가 불쑥 내 뱉는다.
"개자식! 지가 나한테 어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전당포 내실에서 독서하며 쉬고 있던 종구가 영추의 호출을 받고 5층으로 간다. 사장, 전무가 커피타임을 갖고 있다. 붓고 멍든 종구의 얼굴을 본 기태가 깜짝 놀라며 묻는다.
"자네 얼굴이 왜 그래?"
종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영추가 설명한다.
"엊그제 남포동에 갔다가 어떤 놈하고 싸웠다누만."
"저런! 어떤 상대였기에 얼굴이 그 지경이 되었지?"
가현이가 동우를 클럽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는데 거기 놀러 온 사람들과 시비가 붙었던 모양이야. 자네도 알아야 될 일이라서 허 군을 이 자리에 부른 거야. 동우가 관련되어 있으니 말이야."
그 말에 표정을 굳힌 기태가 종구를 소파로 손짓해 앉힌다.
"우리 동우가 현장에 있었다는 게 사실인가?"
"사실입니더. 언제부턴지는 몰라도 싸움 끝나고 저랑 몇 마디 말도 주고 받았심더."
"싸움은 어쩌다가 일어난 건가?"
설명을 듣고는,
"동우가 처음부터 그걸 봤다면 그 놈들을 가만 두지 않았을 거야."
"죄송한 말씀입니더만 제가 알기로는 그들과 아드님은 잘 아는 사입니더. 그 며칠 전에 바로 그 클럽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고 들었심더."
"뭐라? 자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그 클럽의 지배인이 해준 말입니더."
"내 이노무 자식을 그냥..."
술냄새 풍기며 외출복 그대로인 채 네 활개를 펴고 자고 있는 동우를 기태가 뺨을 찰싹찰싹 때리며 소리친다.
"일어나! 임마."
"아이씨! 어떤 놈이야?"
"이 놈 보게. 애비한테 어떤 놈이라니."
힘주어 뺨을 때리자,
"와 때려요. 자는 사람을."
"일어나서 당장 거실로 와."
잠시 후 거실 소파에 마주앉은 부자가 냉꿀물 한 그릇씩을 마시고 술기운을 쫓는다.
"니가 한 짓이지?"
"예?"
"엊그제 남포동에서 무슨 짓 했는지 이실직고 하란 말이야."
"아~그거요.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 싸움과는 상관 없다고요. 가현이를 거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제가 좀 늦는 사이에 질 나쁜 놈들이 가현이를 찝쩍대는 바람에 싸움이 일어 난 기라요."
"내가 너를 몰라? 니가 허종구를 노린 거. 나한테 그 놈에 대해서 꼬치꼬치 물을 때 알아 봤어. 니가 부려먹은 권투선수와 레슬링 선수는 어떤 놈들이야?"
"속이려 한 건 죄송해요. 하지만 아버지는 허종구를 우찌 보셨는지 몰라도 제 눈에는 우리한테 방해물로 밖엔 안 보인다고요."
"그래서?"
"아버지는 그 놈은 씨름꾼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고수라고요. 한물간 선수라지만 동양챔피언까지 지낸 그를 꺾을 정도로요. 레슬링을 한 똘만이까지도요."
"그 거 정말이냐? 아니, 그 보다는 어떻게 꺾었느냐가 중요하지."
"그 새끼는 다양한 기술을 가졌더라고요."
"그래? 내가 깜빡 속은 모양이구나. 영추 형님은 그 놈을 제대로 알고 채용했나 모르겠네."
"알고 계시겠죠. 그런 놈을 운전수로 위장하여 채용한 백부님의 의도가 오히려 의심스럽단 말이예요."
"의도라... 설마 날 견제하려고 숨긴 복병?'
"아셨으니 됐어요. 허종구는 반드시 제거해야 할 걸림돌이예요."
점심시간에 호텔 라운지에서 만난 종구, 창수, 희상이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식사를 한다.
"우리 셋이 이런 곳에 와서 밥 먹기가 별따기 만큼이나 어려웠어."
"죄송합니더. 제가 매인 몸이라 시간 내기가 어려웠습니더."
"얼마 전에 시골에 살던 가족을 부산으로 이사 시켰다네요."
"그래? 허 아우도 이제 부산 사람이 됐구먼. 심민보랑 싸운 얘기 듣고 몹시 흥분 돼 있었는데 그 얘기 좀 들어보자고."
"두들겨 맞다가 운이 좋아 반격의 찬스를 잡은 건데요 뭘. 제가 맷집이 좋은 편이라서 소나기 펀치를 견뎌 낸 깁니더."
"우리 앞에서 겸손 떨 것 없어. 희상이한테서 들은 얘기는 실감이 나던데 허 아우 얘기는 재미가 없어."
"허 아우 싸우는 걸 보고 이런 사람을 적으로 삼았으면 어쩔 뻔했나 싶더라고요. 형님. 우리가 봉을 잡은 거 맞죠?"
"요새 애들 말로 대박이지. 근데 심민보 그 놈, 복수하려 들지 않을까?"
"출신성분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꼴을 당해서 명성에 먹칠을 했는데 가만 있을 리 없죠. 그대로는 부산바닥에서 얼굴 들고 나다니지도 못 할 겁니다."
"골 때리게 생겼군."
"그 놈 보다는 동우가 문젭니다."
희상의 말에 창수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박기태 혈통이면 골 때리는 족속이지. 박기태가 얼마나 끈질기고 악랄했는지 너도 잘 알잖아?"
"아다 마다요. 오죽하면 염라대왕 불알은 떼 먹고 견뎌도 박기태 돈은 못 떼 먹는다는 말이 생겼을라고요."
"허 아우!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은 아우가 모시는 오영추 사장한테도 해당되는 말이야. 오 사장 별명이 뭔지 아나?"
"모릅니더."
"샤이록 오영추야. 물론 박기태 때문에 그런 오명을 얻었지만."
"오 사장님이야 이제 저승길 예매해 놓은 노인이니 왈가왈부할 것도 없지.
하지만 박기태는 욕심이 끝이 없는 인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