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우가 가현을 바래다 주고 돌아오자 싱글벙글 웃으며 자리를 권한다.
"가현이랑 잘 놀고는 왜 얼굴이 어둡니?"
"좀 피곤해서요."
"애비도 끄덕없는데 젊은 놈이 뭐가 피곤해?"
"새로 들인 백부님 기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한가락 하게 생겼던데요."
"허 기사 말이구나. 학생 때 씨름을 했다던데 힘 하나는 장사야. 그는 왜?"
"가현이네 운전수라 궁금하잖아요."
"호승심이 일어서 그러나 본데 잘못하면 백부님 눈에 나 ."
"그딴 촌놈한테 호승심은 무슨... 전 방에 가서 좀 쉬어야 되겠어요."
"그러려므나. 싱거운 녀석."
남포동 올림픽클럽에서 동우가 나이 지긋한 선배 두 사람과 만나고 있다. 동우가 눈치를 보다가 용건을 끄집어 낸다.
"실은 형님들한테 부탁드릴 게 있어서 뵙자고 했습니다."
"뭔데?"
"손 봐줄 놈이 있어서요. 제 똘마이 셋을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워버렸을 정도로 실력있는 놈입니다."
"그런 놈이면 나로서도 쉽지 않겠는 걸."
"쉽지 않은 상대니까 형님한테 부탁드리지요."
"우째 달라고?"
"콧대만 꺾어 놓으면 됩니다."
"콧대 꺾어서 뭐 할라꼬?"
"그 꼴을 누구한테 보이는 것으로 목적은 달성됩니다."
"누구한테 보이려고?"
"제 형수 될 여잡니다. 제 친구기도 하고요."
"자세히 말해 봐. 손 쓰는 것도 내용을 알아야 하니까."
동우의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이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있자 재빠르게 동우가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낸다.
"형님들 수고빕니다. 연습삼아 이 아우의 부탁 좀 들어 주이소."
한 사람이 봉투속을 들여다 보고는,
"안 그래도 손이 근질거리던 중이었는데 장난 좀 쳐 보지 뭐. 느그 형수 될 사람을 쪼매 거칠게 다라도 되재?"
"필요하다면 그래야지요."
*****
재만이 택시로 가져 온 이삿짐을 날라 들이고는 집안을 살펴본다.
"마당은 뭐 할라꼬 파헤쳤노?"
"남새밭 일구는 깁니더. 될 수 있으모 채소는 자급자족 해야지 예."
"니는 천생 살림꾼이구나. 도시에서는 화초 심고 나무 심지 마당에 남새밭 가꾸는 사람은 드물다."
"돈도 아껴야 되지만 내 손으로 기른 채소를 무우야 마음이 편해 예."
"이제부터 힘든 일은 내한테 맡겨."
"오빠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공부만 하이소."
"그리 말해준깨 고맙긴 하다만 염치가 없어서..."
"그런 말 마이소. 오빠는 이 집에서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존잽니더."
"언제까진지 모르지만 신세 좀 질그마."
방에 짐을 정리하다가 저녁 밥상을 받은 재만이 눈이 휘둥그래진다.
"아이구야! 반찬이 뭐 이리 많노?"
"시골서 가져 온 밑반찬이 많아서 그렇지 별로 차린 거 없습니더."
"끼니마다 이리 차렸다가는 기둥뿌리 파것다."
"우리오빠가 돈 애끼지 말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해드리라 캤어 예."
"글마가 돈 좀 번다고 까부는 기다. 돈 없어 쩔쩔매던 때가 엊그제그만."
"걱정 붙들어 매이소. 인자 부자 안 부러울 만큼 풍족해졌은깨 예."
*****
태권도장에서 운동하고 나선 가현과 동우가 근처의 커피숍으로 들어간다.
"도장 다니는 게 전같지 않은데 운동이 싫어진 기가?"
"그래도 토요일마다 도장에 오잖아. 뭐 하나만 물어보자. 니네 동네에 깡패들 있니?"
"깡패는 오디나 있지. 그런 걸 와 묻는데?'
"실은 숙부님 생신 때 일인데 우리차에다 발길질 해댄 새끼들이 있었대. 허 기사가 혼 좀 내주고 쫓아버렸다더라고."
"그런 일이 있었어? 어떤 놈들인지 찾아내서 혼구멍을 내주지."
"혹시 네 똘만이들 아니니?"
"야! 말 삼가해. 사람을 우찌 보고..."
"아니면 그만이지 왜 화를 내? 영주동 깡패면 너한테 알아서 길 것 같아서 해본 소린데."
"느그 운전수, 보통내기가 아닌갑네. 깡패 셋을 혼내줬다 카이."
"아빠 말로는 고수라는데 내가 보기엔 허당이야. 아빠가 속고 있는 거지."
"아참! 다음주 주말에 서울 친구들이 피서하로 부산에 온다는데 같이 어울리지 않을래?"
"네 친구들인데 내가 왜?'
"아주 물 좋은 애들인깨 사겨봐."
"너처럼 운동하는 애들 아냐?"
"아니야. 다들 명문대 다니고 재력 빵빵한 애들이야. 작년 여름방학 때 친구 소개로 같이 놀던 애들인데 이번엔 여학생들도 같이 온대."
"다음 주말에 온다고?"
"그래. 열흘간 해운대에서 바캉스를 즐긴다 카이 이런 기회에 니도 수영 좀 배우고, 썬팅도 해봐. 사실 걔들 접대를 나혼자 하기는 버거워서 니한테 도와달라는 기다."
"알았어. 생각 좀 해보고."
'따분한 대학생활에 활려소가 돼 주려나?'
***
여름방학을 맞아 정원의 파라솔 밑에서 독서하고 있던 가현이 동우의 전화를 받는다.
"왜 전화했어?"
"여기 해운덴데 놀러 안 올래?"
"서울 친구들이 온 모양이구나?"
"세 명이 먼저 왔어. 나머지 셋은 내일 도착 예정이고."
"지금은 못 가. 집에 친구가 오기로 돼 있어서."
"친구도 같이 오면 되잖아?"
"해운대는 너무 멀어. 갖다 오면 해 떨어진다 뭐."
"그럼 밤에 남포동에서 보자. 글마들한테 내가 쏘기로 했거든. 클럽에서 놀 거야."
"남포동 어디서?"
"올림픽클럽이라고, 물 좋은 데가 있어."
"왜 하필 거기야? 거긴 싫어."
"와 싫은 긴데? 이미 룸까지 예약했는데."
"무조건 싫다고."
"야, 니가 온다고 친구들한테 떠벌려 놨는데 빵꾸내면 내 입장이 뭐가 되노? 날 살리는 셈 치고 오이라, 응?"
***
은실이 오자 파라솔 밑에 앉혀두고 주방에서 다과를 가져온다.
"어떤 애들은 서울서 해운대로 바캉스를 온다는데 우리는 해수욕장을 지척에 두고 이 게 뭐니?"
"내나 너나 꼰대 잘못 만나 해수욕장은 구경도 몬 했는데 새삼스럽게 신세타령은..."
"은실아. 있다가 저녁 먹고 남포동에 안 갈래?"
"남포동은 와?"
"먼저 갔던 그 클럽에 가서 화끈하게 놀아보는 건 어때? 실은 동우가 피서하러 온 서울 친구들한테 한턱 낸다면서 같이 놀재."
"너는 몰라도 내가 와 그런델 가?'
"야아! 같이 가자. 나혼자 가기는 뭣하잖아."
***
은실을 꼬득이는 데 성공한 가현이 저녁식탁에서 영추에게 외출 허락을 구한다. 종구와 동행하는 조건으로 허락이 떨어지자 동우에게 전화로 알린다. 회사 주차장에 차를 두고 남포동으로 걸어가며 가현이 다시 전화를 건다.
"나 클럽에 다 왔거든."
"벌써? 미안해서 우짜지? 거기로 가는 중인데 길이 밀려서 말이야.."
"뭐야? 바람 맞치는 것도 아니고."
"먼저 들어가서 이삼십 분만 기다려 도. 지각한 벌을 받을 긴깨."
"발길 돌리고 싶지만 참아준다. 꾸물대지 말고 와."
클럽으로 들어 가 테이블 잡고 술마시고 있는 가현과 은실에게 남자 둘이 나타나 말을 건다.
청년으로 보기에는 나이가 들어 보인다.
"아가씨들! 동석해도 될까요?"
"뭐야? 안 그래도 짜증나는데 똥파리들까지 날아들고."
말 걸었던 사내가 입을 딱 벌리고 가현을 바라본다.
"야 땅개야.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었냐?"
"우리 보고 똥파리라 안 카요?"
"심 아무개가 귀 빠지고 이런 개망신은 처음이데이. 하지만 이쁘장한 아가씨가 톡 쏜깨 짜릿한 맛은 있네."
"장미 가시에 찔린 셈 치소 마."
두 남자가 빈 의자에 앉자 가현이 발딱 일어선다.
"은실아, 가자. 이런 새끼들 꼴 보기 싫어서 두 번 다시 클럽엔 오지 말아야지."
심이라고 성을 댄 남자가,
"그냥 갈라고? 모욕을 줬으모 사과는 하고 가야지. 가현의 손목을 붙잡는다.
"이 거 안 놔?"
가현이 손을 뽑으려 하다가 뜻대로 안 되자 구둣발로 상대의 정강이를 차버린다.
"아이고 아파라! 이 가시나가 촛대뼈를 까네!
한 손으로 정강이를 문지르지만 가현의 손은 놓지 않는다.
가현이 자유로운 손으로 펀치를 날리는 순간 슬쩍 고개 비틀어 흘려버린 상대가 주먹으로 멍치를 가격하자 가현이 풀썩 주저 앉아 배를 움켜잡는다.
그때 구경꾼 속에서 종구가 나타난다.
"보아하니 평범한 분은 아니신데 여자를 상대로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이 가시나가 믿는 기이 너야? 이 년이 먼저 나한테 주먹 날리는 거 봤지?"
가현이 몸을 일으키며 소리친다.
"야이 양아치 새끼야! 니가 먼저 찍접대고 내 손목을 잡았잖아?"
"이런 쌍년이 있나! 보자보자 하니까 무서운 기이 없어."
사내가 때릴 듯이 주먹을 치켜들고, 가현이 다시 한 번 사내의 정강이를 차버리면서 겉잡을 수없는 싸움이 되고, 종구가 가현을 막아 서면서 어느덧 종구의 싸움이 되고만다.
사내의 소나기 펀치에 속절없이 밀리며 방어에 급급하던 종구가 상대의 옆구리에 묵직한 돌려차기 한 방을 적중시키면서 전세가 역전된다.
상대의 몸통을 안아버린 종구, 숙여지는 상대의 상체에 몇 번 연거퍼 무릎치기를 가하자 상대가 컥컥거리며 엎어져버린다.
구경꾼 속에서 튀어나온 키 작은 남자가 상체를 잔뜩 웅크린 자세로 돌진하여 종구의 허리를 감으려 하지만 발차기 한 방에 그마저 엉덩방아를 찧고 만다.
상대가 일어나 다시 덤비려 할 때 지배인 희상이 보안원 둘을 데리고 나타나 싸움을 말려 놓는다.
"그 때 구경꾼을 헤치고 동우가 나타난다.
"가현아! 느그 기사가 와 저 사람들 하고 싸운 기고?"
"너 때문이야. 저 새끼들이 우리한테 추근대고 행패부리다가 싸움이 났단 말이야."
"미안하다. 내가 좀 늦었다만 그새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어."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화 풀어. 내가 저 새끼들 혼내 줄 긴깨."
종구가 다가오자 고개를 까딱해 보이고,
"고맙수다. 댁이 가현이를 보호해 준 모양인데."
"아주 미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셨군."
"그거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요?"
"알 텐데?"
"내가 뭘 안 다는 거요? 길이 막혀서 좀 늦었더니 희한한 소릴 다 듣네."
그때 희상이 일행에게로 와 동우에게 묻는다.
"박 군도 이 여자분들과 아는 사이야?"
"친굽니다. 여기서 만나 같이 놀기로 했는데 제가 늦어서 이런 불상사가 생겼네요.
룸에 서울서 온 손님들이 있어서 전 그만..."
"가봐. 여기 일은 신경 쓸 것 없으니까."
동우가 가버리자 희상이 구경꾼을 향해 소리친다.
"파장에 뭐 볼 게 있다고 기웃거리고들 계시오? 싸움구경 공짜로 하셨으면 가서 신나게 노셔야지."
가현이 종구에게 다가 와 손을 잡아끈다. 깜짝 놀란 종구가 손을 뽑으려다 말고 끌려간다.
멀어져 가면서 종구가 희상에게 눈을 깜박여 보인다. 희상이 종구에게 가라는 손짓을 해 보이며 중얼거린다.
'볼수록 신기하고 매력있는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