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식사를 끝낸 종구가 그 자리에서 뭉그적거리자 그 모습을 본 영추가 한 소리 한다.
"할 말이 있나 본데 뭘 망설여?"
"오늘은 일요일인데 외출하실 계획이 있으신지 예?"
"없는데 왜?"
"제가 볼 일이 있어서 예."
"일 봐. 일요일은 가능한 한 네 시간으로 쓰라고."
"감사합니더."
"나한테는 안 물어 봐요? 나도 엄연히 주인이라고요."
"어 허! 내가 허락했으면 됐지. 네가 왜 간섭하려고 들어?"
"쳇! 아빠가 이러니까 위계질서가 제대로 안 잡히지."
"너는 나가 봐."
얼떨떨해 하는 종구를 내보내고는 영추가 엄한 얼굴을 하고 다그친다.
"너 그 태도가 뭐야? 허 군을 가족같이 대하라던 내 말을 어디로 흘리고 갑질이냔 말이다."
"그 게 왜 갑질이야? 자기 신분을 똑바로 알라고 해준 말인데. 셋이 같이 밥먹는 거 남들이 보면 가족인 줄 알겠다 뭐."
"아이고 두야!" 하고 영추가 뒷목을 잡는다.
*****
부산역 대합실에서 만난 종구와 재만은 캔음료 마시며 얘기 나눈다.
"그 집에서 지내 보니 어떻더노?"
"걱정했던 것 보다는 나아. 그 가시나가 갑질을 하지만."
"사장이 니를 우찌 대하느냐가 중요한 것 아이것나?"
"사장님은 넘쳐서 탈이야. 부리는 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처우도 파격적이야."
"듣기는 좋다만 찜찜한 구석이 있단 말이야."
"뭣이 그리 찜찜하노?"
"정도를 벗어난 데는 마가 깃드는 법이라서 해 본 소리야."
"일리 있는 말이야. 하지만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 들라 캐도 마다할 수 없는 기 지금의 내 처지야."
"됐다, 그라모. 난 졸업이 가까워 온깨 초조해서 잠을 설쳐."
"그 기이 취준생 스트레스라는 거 아이가. 그래도 공무원 되기로 뜻을 세운 이상 죽기살기로 해 봐라."
"니는 그런 말할 자격이 있지. 뭐든지 끝을 보니까."
종구가 뒷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끄집어 내 재만에게 건내주며,
"이 거 얼마 안 되지만 책도 사고, 영양가 있는 찬거리도 사."
재만의 인상이 일그러진다.
"얌마. 이거 뭐 하는 짓이고? 니가 내한테 용돈 줄 처지가? 개구리 올챙이 때를 생각 몬하고 자빠졌어 새끼가."
"받아라! 새꺄. 손 부끄럽그만. 니가 나한테 한 걸 생각하모 평생 업고 살아도 시원찮다."
"그리 생각한다면 잘 됐네. 나 얼마 안 있어 백수 된깨 니놈이 믹이 살리지 그래."
*****
오후 늦게 집으로 돌아온 종구는 꼬리치고 낑낑대는 개들을 보고 목줄을 풀어주고 정원에서 같이 뒹굴고 논다. 집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세운 개들이 갑자기 현관쪽으로 달려간다.
키가 큰 청년이 현관을 나왔다가 개들에게 쫓겨 안으로 황급히 피한다. 급히 달려가 개들을 붙잡는 종구를 현관문을 박차고 나온 가현이 꾸짖는다.
"이봐요. 그쪽이 개 풀어 놨어요?"
"죄송합니더. 손님이 와 계신 줄 몰랐심더."
"그걸 변명이라고 해요? 손님이 왔든 안 왔든 낮에 왜 개를 풀어 놔요?
물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어요?"
종구가 굽신하고 사과한다.
"미안심더. 이 놈들 운동시킨다는 기이 그만 실수가 됐심더."
청년이 눈꼬리를 세운다.
"운전수 나부랭이가 제 멋대로야. 이 집에 노인과 여자만 살아서 우습게 여기는 모양이지."
"말씀이 좀 지나칩니더. 손님이 와 계신 줄 모르고 풀어 준 걸 가지고 그렇게까지 비약할 건 없잖습니꺼?"
"뭐라! 내 말이 아니꼽다는 거야?"
"뉘신지 몰라도 난 주인 아닌 사람한테서 그런 말 들을 이유가 없심더."
"내가 누군지는 모르면서 그 따우로 말 대꾸를 해? 나 백부님을 대신해서 꾸짖고 있는 거라고?"
"그만 합시더."
"본데 없는 촌뜨기라서 그런 거니까 네가 참아. 안 물렸으면 다행이잖아."
"이봐. 운전수면 운전수답게 똑바로 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대문쪽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을 종구는 어이없는 눈길로 바라보다가 개들을 맨다.
거실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은 영추가 손짓해 부른다.
"속상하지?"
"생각없이 행동해서 죄송합니더."
"개를 퍽 좋아하나 보군. 그 청년이 누군지 아나?
"박기태 전무님 아들로 알고 있습니더."
"어떻게 알았지?"
"여러가지로 박 전무님을 꼭 닮은 데다 사장님을 백부님이라 불렀심더."
"박 전무 둘째 아들인데 가현이와 동갑이야. 첫째는 미국 유학 중이고,
박 전무는 이남일녀를 두고 있는데 모두 가현이와는 사촌간처럼 지내 왔어."
"그 친구의 말이 좀 거칠어서 참느라고 혼났심더."
"잘 참았어. 제딴엔 태권도 유단자라고 자넬 얕본 모양이야."
그때 가현이 거실로 들어오며 종구를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동우는 갔니?"
"지나가는 택시를 탔어. 우리 차 태워 보낼라 했는데 일이 꼬였지 뭐야."
"안 그러길 잘 했어. 예쁜 구석이라곤 없으니..."
"동우가 아빠한테 잘못한 일이라도 있어? 인사 받는 것도 시큰둥하던데..."
"그 녀석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쳇! 언제는 오누이처럼 잘 지내라더니 왜 변덕이야?"
가현이 뽀르퉁 해진 채 이층으로 통통거리며 올라가버린다.
이튿날 아침,
가현을 데려다 주고 회사 주변을 배회하고 있던 종구가 사장의 전화를 받고 5층으로 오른다.
"인사 시킬 데가 있어서 불렀어. 따라 와."
4층복도에 이르러 영추가 종구를 붙잡아 세운다.
"전당포는 사실상 지금 만나게 될 전 노인의 소유라고 알고 있으면 되고, 그는 나와 함께 피난을 온 이북 사람인데 나보다 3살 위야. 피난길에 파편을 맞아 다리를 저는데 여간 까탈스런 사람이 아니니까 그리 알고."
"사장님이 하셨다는 전당포는 따로 있습니꺼?"
"아니야. 여기가 바로 그 전당포야. 십구 년전 다른 전당포에서 점원 노릇을 하던 전 노인을 내가 꼬득여서 전당포를 차렸거든. 말하자면 그가 이 전당포의 창립자이고 지킴이야."
"그만하면 대충 알것심더."
두 사람이 전당포 창구 앞에 서자 전 노인이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나 멀뚱거리며 내다본다.
"들어가도 됩니까? 할 얘기가 있는데."
"쥔이 들어오는 걸 누가 막아. 헌데 저 커다란 젊은이는 뉘기야?"
"경계할 사람은 아닙니다."
안에서 출입문을 열어주자 허리 굽혀 안으로 들어가고, 종구도 뒤따른다.
"밥은 제대로 해 먹는 거요?"
"별 걱정을 다 해주는군. 용건이나 말하우."
"이 사람은 얼마 전에 새로 들인 내 기사요. 허 군, 정식으로 인사드려. 이 분은 내 형님 같은 분이야."
종구의 깍듯한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 하고는,
"자네 기사가 나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여길 데려왔냐고?"
"성질도 급하셔. 내가 회사에 있을 동안 허 기사가 있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여기서 지내면 안 되겠오?"
"모를 소리군. 사무실도 있고, 5층에 빈방도 있잖네? 이 무디 큰 사람을 와 하필 부엉이 집 같은 비좁은 데서 지내게 해?"
"거기 두면 때 탈까 해서요. 형을 귀찮게 하지는 않을 테니 그만 따지고 허락해 주시지요."
"쥔이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밖에."
"쥔 쥔 하는데 여기 주인은 형이야. 건물이 내 것일뿐 여기 있는 물건들도, 전당포 운영권도 다 형 것이라고."
"선심 써 주는 건 고맙지만 수익금 절반은 꼬박꼬박 자네 계좌에 넣고 있다고."
"그 돈 넣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에이구! 늙어 갈수록 고집만 는다니까. 아무튼 이 사람은 형이 부려먹어도 되요.
빈둥거리기보다 일 도우면서 전당포 일도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알아서 하게."
"알았으니 사장은 그만 나가 보라우."
노인이 탐탁잖은 눈길로 종구를 바라본다.
"전당포 일은 배워서 뭘 하갔어?"
"배워 두모 좋치 싶어서 예. 먼저 청소 같은 허드렛일과 심부름부터 시켜 주이소."
"하긴 여기 사람들과 어울려서 나쁜 물 드는 것 보다는 낫갔지."
*****
점심시간에 박기태, 유순태, 정연민 세 사람이 한 식탁을 차지하고 앉아 식사를 하고 있다.
"허종구 글마,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본 바로는 별 볼일 없는 놈이던데 예. 일 년 전 쯤에 부산으로 굴러 온 촌놈으로 중부인력소개소에서 일용노동자로 일하다가 사장님 눈에 띈 기이 맞더만 예."
"확실해?"
"부산으로 오기 전에 오디서 뭘 했는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한테 발탁된 데는 사건이 하나 있더라고 예. 창고 일자리를 두고 노동자들 간에 나와바리 싸움이 벌어졌는데 글마 혼자서 각목 들고 쳐들어온 상대 열 명을 쫓아삣다 카데 예."
"그런 놈을 별 볼일 없는 놈이라 카모 되나?"
"현장노동자들 말로는 힘만 셋지 완전 무대였답니다. 맞아도 끄떡도 하지 않는 글마 맷집에 질려 스스로 물러 갔다카데 예."
"허 기사에 대한 조사는 그쯤하고 적으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해."
"강창배는 영 물러 난 겁니까?"
"아닐 걸. 조만간 회사에 자리를 만들 게 될 거야."
"말도 안 됩니다. 중학교도 안 나온 사람한테 맡길 자리가 어딨다고요."
"말 함부로 하지마. 강 부장은 엄연히 우리 회사의 주주야. 니들은 공부 많이 해서 부장되고 과장 됐어?"
식당을 나온 순태와 연민이 기태와 헤어져 커피숍으로 간다.
"부장님이 전무님 아픈 데를 건드렸는데 몰랐능교?"
"아픈 데라니? 무슨 소리야?"
"전무님이 국졸인 거 진짜 몰랐능교?"
"그런 것이었어? 영어를 잘 하시던데 국졸이라고?"
"전무님도 사장님도 국졸이랍니다. 전무님은 소년시절에 미군부대 앞에서 슈쌴보이를 했다 카더라고 예."
"정 과장이 그걸 어디서 들었어?"
"강창배 입에서 나온 말이니까 사실임이 분명하다고요. 얼마전 우연히 나랑 술 한 잔 했는데 속에 쌓인 불만이 많더라고요. 사장님도, 전무님도, 자기랑 마찬가지로 국졸인데 자기만 무식쟁이 취급을 당한다고."
*****
어느날 오후,
숲속의 잔디에 누워 무협지를 읽고 있던 종구가 현관을 나와 자신에게로 오는 영추를 보고 몸은 일으킨다.
"날씨 한 번 기똥차군! 꽃은 다투어 피고, 봄바람은 살랑거리고. 자넨 이런 날에 집에 있기가 따분하지도 않나?"
"밖에 나사봤자 갈 데도 없습니더. 하나뿐인 친구 놈도 공부하는 중이라서 예."
"이러다가 네 혼삿길 막는 건 아닌지 몰라."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더. 제 결혼은 아직 감감천리입니더."
"삼대 독자가 그러면 안 되지."
"제 결혼문제는 집안을 안정시킨 후에나 생각할 수 있심더."
"안정이라... 가족을 부산으로 옮기는 것이 급선무겠군. 네 가족이 살 집을 마련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그러실 것 없심더. 제 월급을 이삼 년만 더 저축하모 됩니더."
"그리 더뎌서야 되것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