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식사 후 차고에서 차를 꺼내 계단아래 세워두고 먼지를 닦고 있던 종구, 사장 부녀가 계단을 내려오자 차 문을 열어준다. 부녀가 뒷 좌석에 나란히 앉는다. 언덕배기로 내려 와 큰 길로 들어섰을 때 영추가 침묵을 깬다.
"회사에서 지켜야 할 것이 몇 가지 있어. 누가 네 신상에 대해 묻더라도 곧이곧대로 대답해 주지마. 실력도 가급적이면 숨기고."
"평소에 그리하고 있심더."
"회사 사람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도록 하고, 나 말고는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말어.
너는 나 개인에 속한 사람이지 회사 소속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두라는 소리야."
"알것심더. 회사에 제가 경계해야 할 사람이 있는지 예."
"셋인데 그 중 박기태 전무는 특별히 조심해야 해.
그렇다고 경계하는 눈치는 보이지 말어."
"기태 숙부님을 왜 경계하라는 거야?"
"회사일이니 넌 몰라도 돼."
"쳇! 그럴바엔 의형제는 왜 맺었어?"
항의조의 말임에도 영추는 눈을 감고 등받이에 몸을 비스듬히 눕히는 것으로 묵살한다. 광복동의 회사 앞에 차를 세우자 비로소 눈을 뜨고,
"돌아오는 대로 5층 내방으로 와."
하고 5층의 건물속으로 들어간다.
다시 차를 출발시키자 가현은 가방에서 책을 꺼내 무릎 위에 올린다.
"무슨 학괍니까?"
"국문학과요. 그쪽은 학교 어디까지 다녔어요?"
"고졸입니더."
"대학은 왜 안 갔어요?"
"..... "
"대답하기 싫으면 말고. 나 공부할테니까 말 시키지 말아요."
첫 운행을 무사히 마친 종구는 가슴 뿌듯한 행복감으로 휘파람을 불며 돌아온다.
'아! 이 모두가 꿈같은 일이야.'
****
광복동으로 돌아 온 종구, 엘리베이터로 5층을 오른다. 대표이사 명패가 붙어있는 방을 노크하고 들어가자 사장과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신사가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때 맞춰 돌아왔군. 이리 와서 인사드려. 전무이사야."
종구는 마음속에 서있는 가시를 눕히며 허리를 꺽는다.
"허종굽니더.
"반갑네. 기사가 바뀌었다는 말을 조금 전에야 들었는데 창고 경비원으로 있었다고?"
"예."
"일로 와서 앉지 그래."
종구는 사장의 눈치를 슬쩍 보고서야 소파 끝단에 엉덩이를 걸친다.
"촌에서 농사짓던 사람이라 숫기가 없어."
"도시에서 닳고 닳은 사람보다 낫지요. 고향이 어딘가?"
"진줍니더."
"좋은 체격이군. 농사로 썩히기엔 아까워. 혹시 하는 운동 있나?"
"중고등학생 때 씨름을 좀 했심더."
"씨름이면 진주 씨름도 알아주지. 아무쪼록 사장님 잘 모셔. 제가 사무실로 데려가 인사 시킬까요?"
"나도 같이 가지. 사무실 분위기도 볼겸."
4층으로 내려 간 종구는 <대양투자 주식회사> 사무실이 하나뿐인 것에 실망하며 안으로 들어선다. 직원도 남녀를 통털어 여남 명 뿐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구멍가게 같은 회사다. 박기태 전무가 소리친다.
"다들 주목해 봐. 여기 있는 허 군은 사장님이 최근에 교체한 운전기사야.
자네가 한 바퀴 돌면서 악수 나누는 게 좋겠어."
책상마다 들러 인사 나누고 간부들의 책상이 있는 뒷 줄에 이르렀을 때 온 몸에 비게 덩어리를 달고있는 거구의 청년이 종구에게 손을 내민다.
"정연민이오. 잘 지내봅시다."
"허종굽니더. 잘 이끌어 주이소."
악수하고 손을 떼려는데 정연민이 비릿한 미소를 띄우며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 상대의 의도를 알아 챈 종구 역시 손에 힘을 준다. 웅성거림 속에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정연민의 목줄은 더욱 굵어지며 얼굴로 피가 모이는데 비해 종구는 그다지 힘들어 하지 않는 얼굴이다. 마침내 정연민이 힘을 푼다.
"못 당하겠군. 아구 겨루기에 져 본적이 없는 난데 오늘 임자를 만났어."
"양보해 주신 것 같은데요 뭘."
종구는 속으로 '언젠가는 따끔한 맛을 보여주지' 하고 맨 뒤의 책상으로 간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중년인도 정연민 못지 않은 거구다.
"보아 하니 운전기사기 보다는 사장님의 보디가드시구먼?"
"그런 셈입니더."
"회사를 떠바칠 기둥 하나가 늘었으니 대 환영이오. 언제 한 번 사나이들끼리 회포를 풀어 봅시다."
"고마운 말씀입니더."
인사가 끝난 것을 본 사장이 종구를 부른다.
"그만 내려가서 차 빼놔."
건물을 나와 차에 오르는 영추의 싱글벙글한 얼굴에 종구는 회사 사람들과의 상면을 성공적으로 치뤘구나 하는 느낌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자성대로 가자고."
차를 출발시키며 종구가 짐짓 떠본다.
"실수한 것 같아 죄송합니더."
"아니야. 잘했어. 그것들이 널 시험하러 들 줄 알았다니까."
"정연민 과장은 어떤 사람입니꺼?"
"유도선수출신이야. 힘 자랑 하다가 오늘 너한테 망신 당한 거지. 유순태 부장도 운동한 사람이고, 그 두 사람과 박 전무가 바로 3인방이야."
"쓸데 없는 오긴 줄 알면서도 억누를 수가 없었심더."
"잘 했다니까. 네가 보여준 힘이 그들을 자극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정도로는 넌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진 않아. 박기태 전무는 어때 보였어?"
"강골로 느껴졌지만 연세가 드셨잖습니꺼?"
"그는 왕년에 이 일대를 주먹 하나로 누비던 사람이야. 피스톤 박이란 별명이 붙었었지. 한때는 그 주먹이 내 사업을 번성시키는 지렛대 노릇을 했지만 지금은 부담스러운 존재야."
"감이 좀 잡힙니더."
잠시만에 차를 세우고 크락션을 누르자 강 부장이 먼저 뛰어온다. 그를 본 영추가 반색해 보인다.
"자네도 여기 와 있었군 그래."
"갈 데도 없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기도 좀이 쑤셔서 여어서 세월 직이고 있습니다."
"잘 왔어. 모두 한 자리에 모였으니 있다가 어디 가서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경비실로 들어가 좌정하기가 바쁘게 창배가 묻는다.
"직원들 만나 봤어?"
종구의 대답을 영추가 가로챈다.
"좀 전에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 글쎄! 허 군이 3인방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었지 뭐야. 생각할수록 통쾌해."
"그 놈들이 우쨌길래요?"
종구와 정연민의 아귀겨룸 이야기를 해주고는 껄껄 웃는다.
"허 군 기를 꺽어 놓으려는 그들의 속셈을 뭉개 놓았는데 통쾌할밖에."
"그거 벌통 건드려 놓은 것이나 다름 없다 아인교?"
유순태와 정연민이 국제시장 시장통에 있는 단란주점에서 술을 마시는데 박기태가 합류한다.
"둘 다 얼굴이 불콰해졌구먼."
"열 받혀서 몇 잔씩 했습니다. 글마 그거 오디서 굴러 묵던 놈인교?"
"자성대 창고에서 경비원으로 있었다더만."
"그런 놈이 창고 경비원이었다고 예?"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해 봐야지."
"그런 힘이모 오라는 데가 많을 긴데 와 창고 경비원 따위로 썩었단 말인교?"
"그 보다는 사장님이 전무님 모르게 운전기사를 갈았다는 것이 이상하다 이겁니다. 내 감으로는 뭔가 야로가 있어 보인다고요."
"흥분할 것 없어. 단순한 운전기사가 아니라 보디가드로 채용된 사람이니까."
"우리 자존심에 흠집을 냈는데 어떤 놈인지는 알아야지요."
"진주사람인데 학창시절에 씨름을 했다더군. 삿바잡기로 단련된 아귀힘이니 정 과장이 못 당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지."
"씨름꾼 같지는 않았는데... 저도 씨름을 좀 해봐서 알지만 글마는 체격부터가 씨름꾼과는 달랐다고요."
"잘 구슬러서 전무님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괜찮겠던데요."
"사장님 사람이 곧 내 사람인데 구슬릴 게 뭐야. 너희들 기분이 꿀꿀할 것 같아서 술 마시고자 한 거니까 그 얘기 는 그만하고 마시자고."
*****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영추, 가현, 종구 세 식구가 저녁식탁에 모여 앉는다.
"자가용으로 등교해서 좋았니?"
"당근이지."
"기사가 허 군이라서 묻는 거야. 너 허 군 싫어 했잖아?"
"아빠!"
"소리는 왜 질러대? 귀청 떨어지겠그만."
"회사에서 무슨 일 없었어? 기사가 바꼈는데."
"기분 째지는 일이 있었지. 박기태가 자랑하던 부하 정 과장을 허 군이 힘겨루기로 코를 납짝하게 만들었으니까."
"그 쪽이 정말 그리 쎄요?"
"자랑할 정도는 아입니더.
"미꾸라진 줄 알고 잡았더니 장어라면 기분이 어떻겠니? 허 군은 바로 그런 존재야."
"쳇! 그러다 용 잡았다는 소리도 나오겠어."
"용? 그럴지도 모르지. 하 하 하."
"부탁이 있어."
"뭔지 말해봐. 오늘은 뭐든지 들어 줄 테니까."
"아빠 말고 저쪽한테 하는 부탁이야."
"저쪽이 뭐야? 좋은 호칭 놔두고."
"그럼 뭐라 불러?"
"허 기사님이나 오빠나 그중 하나 고르면 되지."
"아빠! 자꾸 이상한 소리 할 거야?"
"이 녀석이 아까부터 맹꽁이 같이 소리는 왜 질러대?"
"등교할 때 내 친구 하나 같이 태워 달라고요."
"친구 누구?"
"은실이 기억 나? 입학 축하파티 때 우리집에 왔었는데."
"아버지가 시청 공무원이라는 애 말이구나?"
"맞아. 걔네 집도 대신동이야. 다니던 길에서 조금만 우회하면 돼."
"그러자꾸나. 한 사람 더 태운다고 짐될 것 없으니."
주택가 골목길에서 기다리고 있던 장은실을 태운다. 앞 좌석으로 들어오며 인사를 한다.
"폐를 끼치게 됐습니더."
"폐 될 게 뭐냐. 먼 길 통학에 동무해 가면 심심하지 않아서 좋지."
광복동 회사 앞에서 영추는 내리고 은실이 뒷 자리로 옮기더니 볼멘 소리를 한다.
"니가 권해서 이 차를 타지만 썩 마음 내키지는 않아."
"편안하고 차비 아껴서 좋은데 왜?"
"난 전철 체질이야. 빠르고 시간 정확해서 좋찮아."
"냄새 나는 전철이 뭐가 좋니? 남자 새끼들이 비비적거리는 것도 질색하겠던데."
"그 점은 좀 그래."
"잔소리 말고 우리 차로 등교해봐. 얼마 안 가 전철이 싫어질 테니까. 이 큰 차를 나 혼자 타고 다니기도 좀 뭣해서 말이야."
"정말 그리 생각하니?"
"그렇다니까."
가현이 은실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한다.
"저 남자하고 단 둘이 있기가 불편한 건 아이고?"
"그런 점도 있어."
"가시나! 진작 그리 말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