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실에서 대기하고 있던 종구, 크락숀 소리에 후다닥 뛰어간다. 운전석 옆 좌석으로 들어가 앉자 강 부장이 핀잔을 준다.
"철 지난 옷이잖아. 옷이 그것 밖에 없어?"
"봄 옷을 안 가지고 와서 예."
"월급타면 옷부터 사 입어."
"그럴 생각입니더. 오딜 가는지 물어도 됩니꺼?"
"박 소장이 말해주지 않았어?"
"가 보면 안 다고만 했심더."
"사장님 댁이야."
"예?"
"꼰대가 무슨 맘이 들었는지 저녁식사에 널 초대했어. 네 전임자 그 누구도 초대받은 적이 없은깨 그리 알고 처신해."
대체 무슨 일이지? 식사 초대라면 나쁜 일은 아닌데.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 강 부장이 산비탈의 축대 높은 집 앞에서 차를 세운다.
"이 집이야. 계단 올라가 초인종을 눌러."
"부장님은요?"
"난 초대받지 못했어. 차고에 차 넣고 바로 집으로 갈 거야."
계단을 올라 초인종을 누르자 개들이 짖어대고 철꺽 쪽문이 열린다.
한 발작 안으로 들어서 보니 눈 앞에 별천지가 펼쳐져 있다. 숲을 이룬 너른 정원을 S자형의 조약돌 길이 두 쪽으로 갈라 놓고 있는데 그 끝의 다갈색 이층 가옥에서 웬 여자가 나와 이 쪽을 바라본다.
앳되 보이는 그녀가 허리에 두 손을 얹고 턱을 높이 들고 있는 모습이 무척 거만해 보인다. 종구가 꾸벅 인사를 해도 본체만체 하고 집안으로 들어가버린다.
"어서 오게."
"영문도 모르고 왔심더."
"저녁 같이 먹자고 부른 거야. 집이 어떻던가?"
"이런 저택에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라서... 정원이 공원같심더."
"이 집의 진가가 정원에서 보는 전망이야. 산 중턱이라 시내와 항구, 바다가 훤히 보이지. 이쪽으로 오게."
주방과 유리문 하나를 사이에 둔 식당 길다란 식탁에는 이미 수저와 밑반찬이 놓여있다.
"내 딸내미 봤지?"
"좀 전에 그 여자분이 따님입니꺼?"
"이 집에 여자라곤 그 애와 주방아줌마 뿐이야."
유리문이 열리고 주방에서 늙수그레한 여자가 음식을 실은 카터를 밀고온다.
"저녁 무로 온다 카던 손님이 이 총각인교?"
"인사 나누게. 주방장 겸 우리집 집사야."
"창고 경비원 허종굽니더. 잘 부탁드립니더."
"듬직도 해라.! 미성 딸이 있으모 사우 삼것구만."
"삼대 독자라는데 주변에 씨암탁 같은 처녀 있으면 중매들어 보지 그래."
"아이구야! 요새 가수나들이 얼라 마이 낳고 살라 캐야제.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지만 묵고 가소."
"가현이 불러요. 식사 같이 하게."
"갸가 내려 올라나?"
그녀가 이층을 향해 소리친다.
"가현아. 밥 무우로 내려와."
"난 이따가 따로 먹을 거야."
"아빠가 같이 묵자 카이 어서 내려와."
"싫다니까. 양아치 같은 남자하고 밥 먹느니 굶고 말지."
'귀 밝은 종구, 못 들은 척 한다.'
"밥은 우리 둘이서 먹어야 되겠그만. 자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나?"
"모르는데 예."
"근무한 지 한 달째 되는 날인데 몰랐어?"
"그건 알지만..."
영추가 식탁 위에 놓인 봉투 두 개를 밀어주며, 하나는 월급이고, 하나는 특별상여금이야."
"감사합니더. 그런데 첫 달에 웬 상여금입니꺼?"
"스카웃하는 데는 비용이 들지. 그걸 자네한테 주는 거야."
"과분하지만 고맙심더. 저야 말로 일자리 주신 걸 은혜로 여기고 있심더."
"나는 여간해서는 개인적으로 사람을 채용하지 않지만 일단 채용했다 하면 끝까지 가지. 박 소장과 강 부장은 이십 년이 더 됐고, 아줌마도 이십 년 가까이 됐어."
"집으로 아랫사람을 초대하기는 처음이라 들었심더."
"첫 월급은 의미있게 주고 싶어서 자네를 불렀어. 서로에 대해 알아 가는 시간도 필요하고. 자네는 집에 병중인 노모가 있다고 들었는데 가족은 어찌 되나?"
"어머니와 여동생 둘 뿐입니더."
"나만큼 외로운 가정이군. 자네는 손이 귀한 집안이라서 그렇다지만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아서 가정이랄 것이 없다네."
목고개 갸우뚱 하는 종구를 바라보고는,
"내 가정 얘길 못 들은 모양이군. 내 가정에 대한 궁금증은 차차 풀기로 하고, 자네 어머니는 어디가 편찮으신가?"
"대답 드리기가 좀 난처합니더."
"그래? 객지에 나와 있는 자네가 마음이 놓이지 않겠구먼."
"옆에서 지켜보기보다 가족 생계비를 벌고 있는 지금이 훨씬 마음 편합니더."
"그럼 다행이고. 봐서 부산으로 가족을 데려오도록 하게."
'그럴 수만 있다면 내 몸띠를 팔아서라도 그렇게 하제.'
"식사는 이만하면 됐고, 지금부터는 술을 마시자고. 자네는 주량이 얼마나 되나?"
"양껏 마셔 본 적이 없심더."
주거니 받거니 와인을 마시다가 위스키로 술이 바뀐다. 이야기도 잡다한 현실 이야기에서 감방 체험담 같은 무거운 화제로 바뀐다. 조니워커를 한 병 꺼내오자 종구가 만류한다.
"사장님 자정이 넘었심더. 술 그만 드시고 이젠 잠자리에 드시이소. 저도 돌아가 근무해야 됩니더."
"사장이 마시자면 잠자코 마실 것이지 무슨 잔 말이야. 내가 말했지? 오늘 밤은 주량 껏 마시자고."
"주량은 이미 찼습니더. 더 마시모 실수하게 됩니더."
"실수해. 여기서 오줌을 싸도 괜찮으니까. 근데 내가 보기에 넌 아직 멀쩡해. 젊을 쩍에 말술 소리 듣던 나보다 훨씬 생생하다고.
지금부터는 내 과거사 얘기를 하지. 내 고향은 황해도야. 다섯 살 적에 6-25전쟁이 터져 부모 손에 이끌려 남쪽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는데 도중에 포탄을 맞아 부모가 함께 사망하고 혼자 살아남은 나는 피난민에 이끌려 부산까지 와 고아원에 맡겨졌어.
성년이 되어 고깃배를 타게 됐고, 외항선 선원까지 되었는데 크게 한탕 할 욕심으로 밀수꾼으로 전락하고 말았지. 감방을 들락거리기는 했지만 밀수로 밑천을 잡아 오늘의 부를 성취한 셈이야.
나는 부자가 되겠다는 한 가지 목표로 인생을 살아왔는데 자네는 포부가 뭔가?
아니, 어쩌다가 살인을 하게 되었는지부터 얘기해 줄수 있나?"
"사장님이 흑역사를 털어 놓으셨는데 제가 우찌 제 허물을 숨기고 있것습니꺼."
조만호에게 복수하려다 죄인이 되고 만 이야기를 듣고 영추가 고개를 주억인다.
"조만호 같은 비열한 인간은 어디에나 있어. 내 주변에도 있고."
"예?"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이튿날 초아침,
츄리닝 차림으로 이층에서 거실로 내려 온 가현이 응접실 광경을 보고 인상을 찌푸린다. 소파에는 영추가 새우처럼 웅크린 채 잠들어 있고, 탁자 위에는 술병과 잔과 안주 그릇이 어질러져 있다. 큰 대자로 거실 바닥에 누워 코를 곯고 있는 어제의 그남자를 발견한 그녀는 눈썹이 역 팔자로 휘어진다.
"이 봐요!"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에 종구가 몸을 퉁기고 일어난다.
"따라 와요."
머리 흔들어 잠을 쫒은 그는 끽소리 못하고 그녀를 뒤따른다. 현관 밖 조약돌 길에 나선 그녀가 허리에 두 손을 걸친다.
"나 참! 기가 막혀서... 댁이 얼마나 꼴물견인지 알아요? 예의 없고, 염치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이 집이 댁 같은 사람이 아무데서나 누워 자도 되는 데냐고요?"
"미안합니더."
"우리 아빠는 칠순 노인이고, 간도 안 좋아요. 그런 노인과 새파란 젊은이가 밤 새도록 술을 마셔요?"
"주량껏 마시자고 하시는 바람에 그만..."
"경비원 따위가 사장과 대작하는 게 말이나 되냐고요. 댁은 안 되겠어요.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버려요. 해고 당할 각오 하고요."
창고로 돌아 온 종구를 박 소장이 괴이쩍은 눈길로 살펴본다. 움퍽 꺼져있는 눈과 기운없이 흔들리고 있는 팔 다리를 보고 설레설레 고개 젓는다.
"밤새도록 술을 마셨나보군?"
"면목 없심더. 밤 늦게라도 돌아 올 생각이었지만 사장님이 놓아주질 않았심더."
"널 기다리지 말라고 하실 때 알아 봤지. 헌데 네 꼴을 보니 술에는 약한 모양이군. 그렇더라도 거기서 아침밥은 먹고 올 것이지. 뭐라도 간단히 먹고, 피곤할텐데 숙직실에 가서 한숨 자."
"잠보다는 커피를 마시고 싶습니더."
"그러든지."
물이 끓기를 기다리던 종구,
"사장님의 따님을 봤심더."
"미인이지?"
"예.'
"금년에 대학에 입학했어."
"그런 따님이 있는 줄 몰라서 좀 당황했심더."
"혹시 사장님이 딸내미 출생 얘기를 하지 않았어?"
"결혼도 하지 않은 사장님인데 친딸이라 캐서 혼란스러웠심더."
"그럼 절반 쯤은 얘기한 셈이네. 혼외자식임을 밝혔으니. 그 쯤 알고 넘기는 게 좋아."
"저도 그리 생각합니더."
"커피 마시고 푹 자."
"죄송하지만 오늘 하루는 자유시간을 가지면 안 될까 예? 이것저것 살 기 있어서 예."
"월급 탓으니 쓸 데가 많겠지. 어두워지기 전에만 돌아와."
국제시장으로 가 쇼핑을 하고 핸드폰까지 구입한 종구가 재만을 불러낸다. 자갈치 시장 안의 회식당에서 만난 재만이 묻기부터 한다.
"귀 빠지고 첨 받은 월급인데 기분이 어떻노?"
"감개무량이지. 그런데 와 자꾸 불안감이 드는지 모르것다. 꼭 좋은 꿈 꾸다가 깰 것만 같다고."
"자격지심 때문이것제."
"오늘 아침에 마녀한테 혼 줄이 났어."
"마녀라니?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다 하네."
"내 얘길 들어보고 판단 좀 해봐."
사장댁에서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자 재만의 표정이 굳는다.
"니보고 양아치라 캤다고?"
"그건 안 보는 데서 한 소리고, 얼굴 맞대고 한 소리가 살을 저미는 면도칼이더라고."
"그 거 예삿일이 아니네. 사장님 금지옥엽의 눈에 나버렸으니. 하지만 그 가수나가 제 아무리 막강한 파워를 가졌다 해도 사장님이 널 필요로 하는 한 쉽게 해고는 못 할 거야."
"하마 부녀간에 이야기가 오갔을 거야. 아무튼 이 위기를 넘기모 그 가수나 있는 데는 얼씬도 말아야지."
*****
이른 아침, 대신동으로 출근한 강 부장이 소파에서 웅크리고 자고 있는 사장을 발견하고 선 걸음에 주방으로 간다.
"허 군은 오디 가고 사장님만 거실에서 자고 있는교?"
"가현이 말로는 지가 그 총각을 쫓아삣다 카더만 . 사장님은 밤새도록 술 마시고 업어 가도 모르게 자는 기고."
창배가 나와 이층을 향해,
"가현아 나 좀 보자."
"가현이 등교 차림으로 내려 와 되려 일을 시킨다.
"아저씨가 아빠 좀 업어다 침대에 눕히세요."
"아빠는 내가 알아서 하지. 근데 니가 허 군을 쫓아삣다고?"
"그런 버릇 없는 양아치를 그냥 둬요?"
"양아치가 뭣꼬! 시골에서 온 사람이라 옷을 못 갈아 입어서 그렇지 남자답게 생기고, 언행도 반듯한 청년인데."
"남의 집에 와서 술 취해 거실 바닥에서 코 곯고 자는 사람이면 알쪼라고요. 더군다나 노인을 상대로 술이라니, 난 그런 인간은 용서 못해요."
"일 냈군! 허 군을 굴러 들어 온 복덩어리로 아는 사장님인데 니가 쫓아삣으니."
"흥! 복덩이는 무슨. 양아치 같더만. 난 밥 먹고 학교 가기 바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