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의 소동이 가라 앉은 후 경비실 소파에 사장, 강 부장, 박 소장이 차 마시며 담소한다.
"강 부장이 보기엔 어땠어?"
영추의 물음에 창배는 시큰둥한 얼굴로 얼버무린다.
"글쎄요. 덩치 크고, 힘 세고, 맷집은 좋은데 싸움에는 젬뱅 같아서..."
"내가 보기엔 실력을 감추고 있는 것 같은데?"
"제 눈에도 그래 보이던데요. 싸움을 피하다가 마지못해 나선 것만 봐도 실력 발휘는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아 아니야, 아무튼 미련이 남는 청년이야. 박 소장. 작업 끝나는 시간에 다시 올 테니 그 청년을 만나도록 조치해둬. 그리고 그 청년 부르기 전에 김 감독부터 불러. 고군분투한 걸 봐서라도 포상은 해야지."
인부들이 바닥에 빈 푸대 깔고 앉아 짜장면, 우동을 먹는다. 다들 상처에 약바르고 붕대 감은 모습이다.
"바빠서 입 놀릴 틈도 없었는데 할 말 있으면 하라고."
"몰매 맞는 대장을 놔두고 도망친 졸개들이 무슨 말을 해."
"김 감독의 깡다구는 알아줘야 되것더만. 물러설 줄을 모르니 말이야. 그러다가 병신 되모 우짤라 캤어?"
"글마들이 진짜 폭력을 쓰려고 했다 카모 난 진작 요절이 났을 걸. 오늘 작업은 시작도 못 했을 기고."
"아무튼 큰 사고 없이 마무리 되서 천만다행이야."
"그 놈들, 아무래도 다시 올 것 같은데."
"올테면 오라지. 막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야."
해질녁 작업을 완료한 용건이 박 소장과 함께 경비실로 들어선다.
소파에 앉았던 영추가 반색하며 손짓한다.
"앉게. 몸은 어때? 매타작 당하든데."
"견딜만 합니다."
"다들 다친 몸으로 작업하느라 고생이 많았어."
준비하고 있던 봉투를 탁자 위로 밀며,
"이걸로 팀원들 회식시켜 주게."
"위로금까지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일은 내가 교통정리를 제대로 못해서 생긴 것이라 미안하이. 경찰 부르지 못하는 우리 입장을 이해 해주게."
"그 사람들이 바로 그 약점을 알고 뗑깡부리는 거 아이것습니까? 그들이 다시 올 것 같아 걱정됩니다."
"대책을 세워 보지. 그리고 허종구란 청년은 여길 좀 들리라고 하게."
"허 군 말입니까? 혹시 무슨 잘못이라도..."
"잘못은 커녕 오늘의 고비를 큰 탈 없이 넘기는데 수훈갑이지. 나랑 저녁식사를 같이 할 생각이니까 그리 알게."
경비실 나선 김 감독,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혼잣말을 입속으로 굴린다.
'뭐지? 혼자 남아 디지게 맞은 나보다 꽁무니 빼다가 가리늦게 싸움에 끼어든 허 군의 공이 더 크다는 소리잖아?'
경비실에서 돌아 온 감독이 봉투를 치켜들고 소리친다.
"이 게 뭔 줄 알아?"
"돈 아인교?"
"맞아. 매값이야. 오늘 저녁은 배 터지게 묵어 보자고. 그라고 허 군 자네는 옷 갈아 입고 경비실에 가봐. 사장님이 저녁을 같이 먹자더군."
긴장한 모습으로 경비실로 들어 선 종구를 먼저 박 소장이 맞아 소파로 이끈다. 푸근한 미소를 띄고 있는 사장의 얼굴을 대하고 종구는 비로소 긴장을 푼다.
"등 기대고 편히 앉게. 다친 데는 없고?"
"없심더."
강 부장이 상체를 당기며 묻는다.
"싸울 때 한동안은 무대같이 맞아주던데 작전이었나?"
"맞고도 끄떡도 하지 않으면 상대가 기 죽을 줄 알았심더."
"맷집이 그럴 만큼 좋다는 말이구먼. 아무튼 자네의 의도가 통했어."
"군대는 갔다 왔다지?"
"아 - 아입니더. 저는 삼대 독자라서 군은 면젬니더."
"사장님이 자네에 대해 관심이 많으셔서 내가 아는 대로 말씀드렸는데 좀 언잖더라도 이해하게."
"죄송스럽습니더만 그 점은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심더."
"괜찮네. 프라이버시는 건드리지 않는 게 내 방침일세."
창배가 다시 끼어 든다.
"하나 만 더 묻고 싶은데."
"말씀하이소."
"무슨 운동 했나?"
"이것저것 잡탕으로 해서 내 세울만한 기 없심더."
"밖이 어두워졌는데 그만 일어서지. 감독한테서 들었겠지? 나랑 저녁 같이 먹자고 불렀는데."
"예."
*****
재만과 같이 와본 적 있는 자갈치 시장으로 사장 차가 들어가 <복>이란 상호가 붙은 식당 앞에 멎는다. 주차원에게 차를 맡기고 영추 일행이 안으로 들어서자 카운터에 섰던 여인이 달려 나와 사장에게 호들갑스런 인사를 건넨다.
"뒷방 비어 있나?"
"하모 예. 오신다는 전화받고 비아놨다 아입니꺼."
"그럼 강 부장은 여기서 먹도록 하고, 허 군은 나랑 뒷방으로 가지."
그 말에 창배가 얼굴을 찡그리지만 영추는 본체만체 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사람 서넛 앉을 정도의 뒷방에 들어가 좌정하고서야,
"자네와 단 둘이 할 얘기가 있어서 저 사람은 따로 떼어놨는데 괜찮지?"
"아 - 예."
"음식 올 때까지 술 마사면서 얘기할까?"
사장이 술병을 집어들자 종구, 황급히 무릅 꿇는 자세로 고쳐 앉아 술을 받는다.
"고향이 진주랬지?"
"진주는 태어나서 고등학교를 다닌 데고, 사는 곳은 하동군 옥종이란뎁니더."
"직장 가져 본 일 있나?"
"없심더."
"막노동 그만하고 취직할 생각은?"
"고졸에다 가진 기술이 없어서 아예 단념했심더."
"내가 직장을 준다면?"
"예?"
직장 준다는 말에 반짝 기쁨이 얼굴까지 떠 올랐다가 이내 절망의 늪으로 잠겨버린다.
"왜 그러나? 취직 못 할 이유라도 있나?"
"말씀은 고맙지만 저한테 취직은 엉감생심입니더."
"어떤 자린지 들어보지도 않고 체념할 게 뭔가? 내가 제의하는 자리는 기술이 없어도 되고, 학력은 고졸로 충분한데."
종구는 부지중에 한숨을 떨군다.
"사장님 저는 전과자입니더. 5년형에 4년을 복역하고 가석방된 기 불과 두어 달 전입니더."
"뭔가 사정이 있을 거라 짐작하고 있었네만."
"이토록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데 기대에 어긋나서 죄송합니더."
"실은... 나도 전과자일세."
"믿어지지 않습니더."
"나는 밀수만 3범이었네. 자네는?"
종구의 간추린 설명을 드고 영추가 매듭을 짓는다.
"그럼 됐네. 여러말 할 것 없고 내가 자네한테 제의하는 자리는 바로 우리 창고 경비원 자리야. 하겠나?"
"제가 우찌..."
"전과자라도 상관없네. 내가 싫어하는 전과는 파렴치범과 절도범이라네."
"받아만 주신다면 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심더."
*****
술냄새 풍기며 자취방으로 들어서는 종구를 재만이 마뜩잖은 얼굴로 맞는다.
"와 이리 늦엇노? 또 술 뭇나?"
"뭇다, 와. 우짤래?"
"어라! 똥낀놈이 큰 소리치네. 일당 몇 푼 번다고 술이냔 말이다."
"니도 졸업하고 사회생활 해봐라. 술 안 묵고 배기는지."
"니놈 처지가 다른사람들과 같나 오디, 저녁은?"
"뭇다. 생선회에 복국으로 거하게. 재만아. 나 막노동 그만 할란다."
"뭐시라! 일마가 복국 뭇다 카더니 복독이 올랐나? 시답잖은 소리를 해대거로. 니놈을 잘못봐도 한참 잘못봤는 갑다. 겨우 일 주일 일하고 손들다니."
"방방대지 말고 내 말을 들어봐. 오늘 일터에서 큰 사건이 있었단 말이다."
종구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재만의 얼굴이 흐물흐물 풀어진다.
"얌마! 그런 경사가 있었으모 집에 오자마자 고해 바칠 것이지 심장 약한 성님을 실컷 놀려 묵고 나서 얘기하냐? 하긴 내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니는 길바닥에 굴러 다니는 원석이라 눈밝은 사람이 먼저 보석인 줄 알아보고 주운 기다. 일은 언제부터고?"
"다음 주 월요일부터야."
"당장 민숙이한테 알리자. 이 소식 들으모 깨춤을 출 긴데."
"아니. 경비원이 되고 알리는 기 좋아."
*****
나흘 뒤, 하늘색 정복에 같은색의 모자를 쓴 종구가 정문 밖을 오락가락 하다가 인부들 실은 승합차가 나타나고 어제의 동료들이 내리자 거수경례를 붙인다.
"히 야! 경비원복 입고 있은깨 사람이 확 달라 보이는데."
"막내가 제한테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 박힌 기지."
"그동안 우리 모두 눈뜬 장님이었제. 호랑이를 곁에 두고 강아진 줄 알았으이."
"좋은 자리 있을 때 잘 봐조."
"다들 와 이러십니꺼? 선배님들 덕분에 이 자리에 오게 됐는데 소쿠리 비행기는 태우지 마이소."
"자네가 허리에 방망이 차고 정문에 턱 버티고 섰는 한 그놈들이 쳐들어 올 걱정은 안 해도 되것어."
일과를 끝낸 영찬과 종구가 저녁밥상에 마주 앉는다.
"근무가 어땠어?"
"보람찬 하루였심더."
"내가 사장님한테 자넬 스카웃 하자고 적극적으로 권했다는 건 알고 있지?"
"예 감사합니더."
"인삿말 듣자고 한 말 아니네. 자네가 얼마 못 버티고 그만두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어서 예방주사를 놓는다고 생각하게."
"그런 일은 없심더."
"고맙군. 허나 자네 일과는 지금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야. 새벽녘에 끝나는 야간 근무는 고된 일인만큼 인내심이 필요하거든."
"저는 밤에 활동을 많이 했심더. 밤마다 해발 천 미터가 넘는 산꼭대기를 올랐는데 거기에 비하모 이런 데서 하는 야간 일은 약괍니더."
"정말이야? 무섭지도 않던가?"
"맹수도 없는 산인데 뭣이 무섭습니꺼?"
"자네 담력은 알아줘야 되겠군. 나는 집을 지척에 두고 한 달에 두 번 빼고는 여기서 숙식을 했네. 자그마치 이십여 년을 말일세.이제부터는 자네 덕분에 집에서 편히 자게 되었어."
한 달 뒤.
점심 먹고 잠자리에 든 종구를 박 소장이 깨운다. 눈을 부비고 벽시계를 본 종구가 투덜거린다.
"이제 겨우 네 신데 와 예? 잠을 푹 자야 경비서다가 졸지 않지 예."
"시간 없어. 후딱 일어나 목욕탕에 갔다 와."
"여기서 샤워하모 되는데 목욕탕은 뭐하거로 예."
"때 빼고 광 낼 필요가 있으니까 잔말 말고 다녀와. 이발도 하라고."
"귀한 손님이라도 옵니꺼?"
"손님이 오는 게 아니라 네가 손님으로 어딜 가는 거야. 더는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해거름에 차가 데리러 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