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 청학산 산비탈 동네에서 반지하 월세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한 재만과 종구는 부산 온 지 사흘 째 오후 부산진역 인근의 한 인력사무소를 들린다. 텅 비어 있는 널따란 사무실을 여직원 혼자 지키고 있다가 방문자의 행색을 살펴보고는 의아한 눈초리로 묻는다.
"무슨 일로 오셨죠?
재만이 쪼르르 그녀에게로 가 꾸벅 허리를 굽힌다.
"오랜만입니더, 누님. 군에 가가 전에 여기서 소개받고 부두에서 일용직으로 일을 했는데 제 얼굴 기억 안 나는교?"
여직원이 입을 삐죽하고는 퉁을 준다.
"사람 잘못 봤어요. 난 여기서 일한 지 반년밖에 안 됐어요."
재만이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딱 소리나게 때린다.
"이노무 눈깔이 주인을 망신시키네. 미안습니더. 착각해서."
"눈이 나쁜 기 아이라 넉살이 좋으신 것 같은데요."
"헤, 헤. 제가 좀 그런 편입니더. 하지만 부두에서 일한 건 사실이라 예."
"믿어드리지요. 신청서 드려요?"
"한 부만 주이소. 일할 사람은 저 덩치 큰 놈입니더."
종구가 책상 위에 있는 신청서에 기입 하고 있을 때 머리가 희끗희끗한 풍채좋은 장년인이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사무실로 들어선다. 그냥 지나치려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종구 아래 위를 훔쳐본다.
"나 여기 소장인데 일자리 구하러 왔나?"
재만이 휙 돌아서며 허리 꺽어 절을 한다.
"안녕하십니꺼. 전 여기서 소개받고 일한 적이 있어서 친구를 데리고 왔습니더."
소장은 재만을 본채 만채 하고 허리를 편 종구만 바라본다.
"시골에서 농사 짓던 놈이라 가진 기술은 없어도 힘 하나는 장삽니더."
"자네가 대변인 노릇하는 걸 보니 자네 친구는 벙어린 모양이군."
재만이 머쓱해 하자 종구가 입을 연다.
"죄송합니더. 제가 부산이 처음이라서 친구를 앞세웠습니더."
"따라 오게."
소장실의 응접 소파에 무릎을 모우고 앉은 재만과 종구는 잔뜩 기대감 묻은 얼굴로 소장을 바라본다.
소장이 여직원을 불러 커피를 시킨다.
"농사짓다가 부산에 왔다고?"
재만이 입을 떼기 전에 종구가 먼저 대답한다.
"농사 지었다기 보다는 집에서 어영부영 지냈습니더."
"음! 자네가 어디서 뭘 했건 내가 알바 아니고, 내 관심은 자네의 잘 다듬어진 몸과 기도에 있어. 지나가던 나를 자네가 자극했다는 편이 옳겠군.
"저 역시 소장님한테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심더."
"맹수는 맹수를 알아본다 이건가? 나야 이제 한물간 맹수지. 자네 같은 사람이 이런 데 일자리 구하러 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야. 그래, 어떤 일자리를 원하나?"
"이 친구가 말씀드린대로 저는 내 세울만한 스펙이 없습니더. 막노동 할 각오로 왔심더."
"자네는 몸이 스펙이지. 그것도 내 눈에는 최상급으로 보여."
"그리 봐 주셔서 고맙습니더만 그런 스펙으로 일자리 찾기는 싫습니더."
소장이 고개를 갸우뚱 하고는 묻는다.
"이유를 물어도 되나? 누구나 자기가 가진 최고의 장점을 활용하기 마련인데 그러지 않겠다니."
종구는 난감한 표정을 지을 뿐 대답을 망설인다.
"마침 자네한테 맞는 일자리가 있어서 소개할까 해. 나는 체육관을 가지고 있어서 힘 가진 사람 구해달라는 부탁을 자주 받는다네."
"죄송하지만 그만 가보겠습니더."
일어서는 종구를 소장이 손짓으로 앉힌다.
"가더라도 커피는 마시고 가."
엉거주춤 해있는 종구를 재만이 끌어 앉힌다. 마침 여직원이 커피를 날라온다. 커피를 두어 모금 마신 소장,
"자네 막노동도 좋다고 했지?"
"예."
"우리한테 작업팀이 몇 개 있는데 해 볼텐가?"
"시켜만 주이소."
이튿날 아침, 중부소개소로 간 종구는 여직원의 소개로 한 중년인을 만난다. 팀장으로 불리는 그는 종구의 이름만 묻고 승합차에 태우고 일터로 향한다.
이삼 분 거리의 일터는 허름한 곡류창고로 인부 네 사람이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가 팀장이 나타나자 몸을 일으킨다.
종구는 거기서 비로소 정식 인사를 나누는데 이야기판이 벌어지기도 전에 곡식푸대를 높다랗게 실은 대형트럭이 마당으로 들어온다.
하물선에서 하역한 밀가루 푸대를 실어다 창고에 쌓는 작업에서 종구에게 맡겨진 일은 지게차가 가져 온 푸대더미에서 푸대를 위로 던져 올리는 것으로 키 크고 힘 좋은 그에게는 안성맞춤의 작업이다.
작업이 끝나고 인부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을 때 창고지기 노인이 멀찍이서 큰 소리로 말한다.
"어이, 김 감독. 갈 때 신입 데리고 경비실에 들려."
"아따! 어련히 알아서 신고할까. 곧 갈 긴깨 커피나 끓여 놓으소."
경비실 한 켠의 소파로 가 앉아 있자 소장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잔을 가져온다.
"김 감독. 어데서 이런 장군감 청년을 데려 왔지?"
"제가 데려 온 기 아이라 우리 소장님이 일 시켜 보라고 하더만요. 허 군. 자네가 신고해."
종구가 앉은 채 허리를 숙여 보인다.
"허종굽니더. 스물 다섯 살이고, 시골에서 엊그제 부산으로 왔심더."
"일은 서툴어도 힘이 장사더만. 손 좀 내 밀어 보게."
종구가 내미는 손등에 박 소장이 자신의 손을 갖다 대 보고는 입을 쩍 벌린다.
"자네 손에 비교하니 내 손은 애들 손 같그만. 거짓말 좀 보태서 솥뚜껑만 해. 헌데 자넨 이런 데서 막노동할 사람이 아니야. 그 손도 농사 짓던 손이 아니고."
표정이 어두워지는 종구를 돌아보고 김 감독이 말을 보탠다.
"소장님 말씀을 곡해하지 말어. 창고를 책임진 분으로서 낯선사람을 경계하는 건 당연지사 아니겠어? 자네는 내 눈에도 우리네 부류는 아냐."
숨을 길게 내 쉰 종구가 입을 연다.
"농사짓다가 왔다는 건 거짓말이고 집에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다 도시로 왔습니더. 집에 병든 노모가 있어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할 처집니더."
박 소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사정이 있었구먼. 중부인력 소장님이 자넬 여기 보냈을 땐 보증을 한 것이나 다름없지만 자넨 누가 봐도 범상한 인물이 아니어서 해 본 말이었네. 열심히 해 보게."
"오늘 일하는 거 보니 내 마음에 쏙 들었어. 소장님도 오케이 했은깨 오늘부로 우리팀의 정식 멤버로 받아 들이기로 하지."
벌떡 일어난 종구, 굽신굽신 절을 한다.
"고맙습니더. 고맙습니더."
경비실 나온 두 사람이 어둠이 옅게 깔린 부두의 이면도로를 걷는다.
"팀원으로 받아주신 것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더."
"저기 모퉁이 돌아가모 단골 식당이 있은깨 가서 저녁 묵고 술도 한 잔 걸치자고."
***
기분좋게 취한 상태로 자취방으로 돌아 온 종구를 재만이 앉은뱅이 책상에 앉은채로 맞는다.
"니 술 뭇나? 잘 하는 짓이다. 첫날부터 술이나 뭇고 댕기고."
"감독님이 샀어. 나 오늘 정식 팀원이 됐어."
"진짜가?"
"진짜지 그럼. 축하주꺼정 마셨다고."
재만이 책상을 밀고 벌떡 일어나 종구와 손뼉을 마주친다.
"축하한다 새꺄. 그런 일자리, 아무한테나 주는 거 아인 거 알재?"
"알다 마다. 이거 다 네 덕분이야."
"지랄같은 소리 치우고, 사고나 치지 말어."
창고 경비실에 노인 둘과 장년인 하나가 소파에 앉아 회의를 하고 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사장이 먼저 입을 연다.
"문제가 있다고?"
창고지기 박영찬 소장이 대답한다.
"전에 여기서 일하던 인부들이 걸핏하면 떼거리로 몰려와 소란을 피우고 협박까지 합니다."
"협-바-악! 그것들이 간띠가 부었나."
사장 오영추의 운전수이자 보디가드인 문창배가 눈알을 굴린다.
"요구사항이 뭐래?"
"기득권을 가진 자기들을 배제한 지난 번의 입찰을 무효화 하고 자기들에게도 단체교섭권을 인정해 입찰을 다시 하라는 거죠 뭐."
"그럴 수 없다는 거 알텐데?'
"계약기간이 끝나는 2년후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설득했지만 막무가냅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단 말이지? 그런다고 즈네들이 뭘 어쩌겠어?"
"제 감으로는 그자들이 조만간 무슨 사단을 일으킬 것 같은데요."
강창배가 다시 끼어든다.
"무슨 사단 말인교? 창고에 불이라도 지른답니까?"
박 소장이 삐딱한 눈으로 돌아보고 소리친다.
"강 부장은 그 입 좀 조심해! 불이 뭐야? 불이."
"아니, 이런 창고에 사단 일으킬 기 방화밖에 더 있나 싶어서 한 말을 갖고 와 소리는 질러 대능교?"
"그만들 해.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은 방화 같은 범죄는 못 저질러."
"제 생각엔 보안업체만 믿지말고 든든한 경비원을 구해 자체 보안을 철저히 하는 것이 옳지 싶습니다."
"사람 구하기도 쉽지 않은 거 알잖아? 요즘 젊은 것들은 야간 경비 같은 일자리는 거들떠도 안 보니 말이야."
"제가 눈독 들이고 있는 청년이 하나 있는데 한 번 만나 보시렵니까?"
"어떤 청년인데?"
"얼마전 김 감독 팀원으로 들어 온 청년입니다만 거구에 힘이 장삽니다. 스물다섯 살이라니까 군에서 갓 제대를 한 모양이고요."
"박 소장 눈에 들었다면 만나 보도록 하지. 작업 날짜 잡히면 연락하라고."
***
인부 5명이 창고 안에서 모여앉아 잡담을 하고 있는데 종구가 경비실에서 종이컵 커피를 가져와 돌린다.
"어이, 신입. 생긴 것과는 달리 싹싹해서 좋아. 오늘부터 내캉 한조 묵자고."
"무슨 소리! 내가 첫날부터 찜해놓은 거 빤히 알믄서."
"찜이고 지랄이고 집어치우고 제비를 뽑자고."
가만히 듣고있던 감독이 컵을 비우고 일어선다.
"차소리가 들리는데 실없는 소리 그만 하고 작업준비 하라고."
푸대 실은 대형 트럭이 들어오고 인부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 한 떼의 장정들이 각목, 쇠파이프 등 무기를 지니고 난입한다. 영찬이 달려와 막아서 보지만 간단히 밀려난다. 칩입자 열 명이 트럭을 빙 둘러싸고 중부인력 인부들은 감독주위로 모인다. 칩입자 대표가 감독과 마주서며,
"어이, 김 감독. 떨거지들 데리고 여기서 나가지 그래. 몸띠로 벌어묵고 사는 사람들이 몸 상해서야 되겠어?"
"남의 작업장에 몽디 들고 들어와서 우짜자는 기요? 형씨들한테는 법도 없소."
"느그놈들 농간에 밥그릇 뺏긴 우리가 법 무서워 할기든가. 이봐, 김 감독. 이 창고는 우리가 처자석 믹이 살리고 공부시킨 우리 일터였어. 십여 년간 착실히 일해온 우린데 난데없는 입찰제를 가져 와 우릴 미영씨 볽아 내드끼 했삣제. 그기 중부소개소의 농간이라는 건 이 바닥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야."
"나 참! 어거지도 푼수가 있지. 입찰제는 이 창고의 경영개선책 일환으로 채택된 것이었고, 우리는 단지 낙찰을 받았을 뿐인데 무엇이 농간이란 말이오? 그리고 우리는 도급받아서 작업하는 노동자들일 뿐이라. 형씨들과 다툴 일도 없소."
"그런깨 내쫒기 전에 일아서 꺼지란 말이야."
"댁들이 무슨 권리로 우릴 내 쫒는단 말이요?"
"저 잡것 말하는 것 잠 보소. 입찰이 어쩌고 저째? 고것이 우리네 노동자들 일삯 깎아 묵자는 수작인데 개선책이라고라. 여보게들, 저놈 쎄똥가리부텀 뽑아 배고픈 갈매기들한테나 던져 조뿔자고."
"듣자듣자 하니 입이 너무 걸그만. 좋소. 법을 개똥으로 여기는 형씨들이니 오디 쪼대로 해보소."
김 감독이 창고 안으로 들어가버리자 관망하고 있던 기사가 소리친다.
"바쁜 차 세워두고 뭐하자는 기요? 양측이 시비를 가리더라도 짐은 내려놓고 봐야 될 것 아니요. 이라모 내 손해는 누가 책임질기요?"
"아따! 기사양반이 걱정도 많다. 여그 사장이 돈 많은데 물리모 되제."
트럭을 세워두고 양쪽이 대치하고 있을 때 승용차 한 대가 창고 마당으로 들어오고, 운전석에서 강창배가 나와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트럭쪽으로 간다.
"이봐! 뭐하는 짓이야? 당신들이 깡패야?"
대표가 창배에게 꾸벅 인사하고 다가선다.
"이런 꼴로 봐서 죄송하요만 밥줄 끊긴 우리가 무슨 짓인들 몬 하것오? 일자리 되찾기까지 우린 이판사판이요."
김 감독 역시 창고에서 나와 창배에게 인사한다.
"어이, 김 감독. 이러고 날 새울 거야?"
"이 사람들이 방해하는데 우리더러 우짜라고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 일자리 지킬려거든 싸워서라도 지키란 말이야."
창배가 몸을 돌려 거버리자, 용건이 창고 문턱에 서서 소리친다.
"강 부장님 말씀 들었재? 몽디 무서워서 일 몬 하것다는 사람은 떠나고, 일 할 사람은 썩 나서더라고."
그러자 중부인력 네 사람이 분발하여 김 감독 좌우에 늘어서는데 종구만은 멀찍이 서있다. 그 모습을 본 동료들이 눈살을 찌푸리고 작은 소리로 수근거린다.
"덩치가 아깝다. 썩둥구리가 따로 없다 카이."
"무디 큰 놈이 겁도 많다 안 카던가베."
"아무튼 비겁한 인간이야."
중부인력 쪽이 움직이면서 싸움이 시작된다. 맨주먹 대 무기 든 사람들간의 싸움에서 얼마 못 가 중부 인부들이 창고 안으로 쫒겨 들어오고 용건 혼자 남아 외로운 싸움을 계속한다.
보다 못한 종구가 용건에게로 가 날아드는 무기와 주먹을 막는다.
한동안 막아주다가 마침내 상대의 무기를 빼앗아 나무는 부러뜨리고 쇠파이프는 구부려버리는 괴력을 선보인다. 그걸 본 칩입자들이 겁 먹은 얼굴로 물러서고 만다.
대표가 용건에게 접근하여,
"이제 보니 비장의 한 수를 숨겨놓고 있었구먼. 이봐, 싸움꾼을 데려와 숨겨놓다니, 비겁하지 않나?"
"비겁이라 캤오? 쪽수도 우리보다 많은데 무기까지 들고 온 쪽이 할 말은 아인 것 같소만. 그리고 이 사람은 엄연히 내 팀원이란 말이오."
"팀원 좋아하네. 이런 덩치가 이런 데서 막노동 한다 카모 지나가던 강세이도 웃어. 두고 보자고. 오늘은 물러가지만 우리도 싸움꾼은 데려 올 수 있은깨."
칩입자들이 가버리자 용건이 그 자리에서 풀썩 주저 앉아버린다. 부축해 일으키는 종구에게,
"나설기모 진작 나서지."
"미안심더. 그럴 사정이 좀 있어서 예."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이러는 긴깨 걱정들 말어. 다들 힘내서 작업 시작하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