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에서 버스를 갈아탄 종구, 시골 장터에서 버스를 내린다
어둠이 깔린 장터를 착잡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던 그는 챙모자를 깊숙히 눌러쓰고 장터로 들어선다.
들머리 가게에서 물건을 사들고 나오던 늙수그레한 아낙 둘이 스쳐가는 그를 보고 수근거린다.
"저 기이 뉘고? 소전머리 진주띠 아들 같그만."
"맞구마. 이 장터에 저리 무디 큰 아 -가 갸아 말고 누가 있더노?"
"갸는 살인죄 짓고 감옥살이 하고 있다 쿠던데 벌써 나온 모양이네."
"부끄러운 줄은 아는지 낯판대기 가리고 손살거치 지나가버리네."
"에이고! 3대 독자 아들이 돌아왔건만 진주띠가 자석을 알아나 볼란가 모르것네."
아낙들의 대화를 거기까지 들은 종구가 새끼손까락으로 귀를 후빈다.
'귀 밝은 것도 탈이야.'
소전머리 집에 이른 그는 흙담장에 붙어서서 고개를 뽑고 집안을 살펴본다.
식당으로 쓰던 아랫채는 어둠에 싸여있지만 사람이 거처하는 윗채에는 불빛이 있다.
한참을 그러고 서있던 그는 결심한 듯 대문으로 가 문짝을 민다.
요령소리가 울리고 여자가 마루로 나선다.
"눕니꺼?"
"내다, 민숙아."
"내라 쿠지 말고 이름을 대 보이소."
"오빠야. 종구."
"옴마야! 오빠 맞네."
축담 위의 댓돌에 놓인 신을 신다가 한 짝을 놓치자 맨발인 채로 대문으로 달려온 그녀가 문을 따고는 종구의 품으로 뛰어든다. 엉엉 울면서 가슴팍에 주먹질을 하는 동생을 껴안고 등을 토닥 거리던 종구도 울먹인다.
"미안하다, 민숙아. 내가 직일 놈이다."
"오빠가 뭘 잘 몬 했다고 그래. 내가 오빠라도 그랬을 기다. 오빠 이 거 꿈 아이재?"
"내가 돌아온 기 꿈 같나?"
"형기가 일 년이나 남았는데 우찌?"
"탈옥한 거 아인깨 걱정마라. 성탄절특사로 가석방된 기다."
"아이 좋아! 오빠가 왔으니 더 이상 바랄 기 없다."
"어머이는 ?"
"좀 전에 잠 들었다."
"초저녁인데 벌써?"
"숟가락 놓으모 자는 습관인 걸 뭐."
민숙이 종구의 손을 잡고 마당을 건너다 걸음을 멈춘다.
"옴마에 대해 오빠가 모르는 기 있다."
"알고 있다. 백치가 됐삔 거."
"변호사를 만났구나."
방문 열고 들어선 종구, 벽에 붙어 모로 누워 잠들어 있는 어머니 모습에 장승처럼 서서 눈물을 흘린다. 민숙에게 등 떠밀려 어머니에게 간 그는 짚단처럼 무너져 내리며 꺼이 꺼이 통곡한다.
덩달아 울던 민숙이 울음을 그치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다.
"배 고플 긴데 밥을 해야지." 하고 민숙이 부엌으로 가버리자 종구는 무릎걸음으로 어머니 곁으로 당겨 앉고는 가만히 어머니 손을 잡고 뺨에 가져가 부빈다.
"어머이! 이 불효자가 돌아왔심더. 일어나서 이 못 된 놈 뺨이라도 때려 주이소."
***
민숙이 가져다 놓은 소반을 들여다 보고 종구가 활짝 웃고는.
"어이구야! 진수성찬을 차렸네."
"있는 거 다 꺼내 음식을 만들었다 아이가. 집밥 얼마만이고?"
"사고치던 해 봄에 묵고는 5년만이야."
"그리 밖에 안 됐는데 나한테는 영원처럼 긴 세월이었어. 오빠 방은 그때 그대로야. 책도, 사진도, 벼릉박에 걸어 둔 고등학생 교복까지도. 옴마가 그 방의 종이 쪼가리 하나도 몬 버리게 했거든."
"그런 걸 없애버리지 뭐 할라꼬 놔도. 네 학교는 우찌 됐노?"
"옴마 간병하로 서울 감시로 그만뒀지 뭐."
종구가 음식을 먹다 말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 보고 있자 민숙이 짐짓 쾌활한 표정을 짓고는,
"밥 안 묵고 뭐하노? 내사마 학교에는 미련 없다."
"와 편지에는 거짓말을 했더노?"
"사실대로 알려서 좋을 기 뭔데? 감방살이만도 힘든 오빠였는데."
잠자코 고개 끄덕인 종구가 다시 수저질을 한다.
******
아침나절, 대문의 요령이 울리자 민숙이 방문 열고 나와 마루끝에 선다.
"거어 눕니꺼?"
"양재만이다. 내 알재?"
"옴마야! 재만이 오빠가 왔네."
그녀가 대문으로 달려 가 문을 따 주고 묻는다.
"우리 오빠 소식 듣고 온 깁니꺼?"
"하. 니는 몬 본 사이에 처녀가 됐구나. 느그 오빠 집에 있재?"
"오빠는 지금 한밤중입니더."
"간밤에 제사가 있었던가베?"
"그 기이 아이고, 우리 오빠는 밤낮을 꺼꾸로 살아 예."
"부엉이, 올빼미도 아인 놈이 와?"
"밤에는 고민이 많아서 잠을 몬 자는 것 같아 예. 오빠 깨울 긴깨 들어오기나 하이소."
"아이다. 글마 깨우지 말고 나랑 얘기 좀 하자. 글마가 집에 온 지 꽤 된 모양이던데 뭐하고 지내더노?"
"말도 마이소. 두 달이 다 돼 가는데 낮에는 두문불출하고, 방구석에 처박혀 지내고, 밤이면 집을 나가 먼동이 틀 때야 돌아오곤 합니더."
"그것 참 이상하네. 사람들 피해 밤에 나가는 건 이해가 되는데 밤새 오디서 뭘 한단 말이고? 밤손님노릇 할 리는 없고."
그때 종구의 방문이 쾅 열리며 발 하나가 쑥 문 밖으로 나왔다가 되돌아 간다. 방에서 종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동생 붙잡고 되잖은 소리 씨부렁대지 말고 들어 와."
"어라! 너 깨어 있었더나?"
"자다가 귀가 간지러워서 깼다 와."
"잠 깼으면 얼른 나와서 성님한테 인사 올리지 않고 냄새나는 발목디로 문을 차?"
마루를 사이에 두고 입씨름하는 오빠들을 보고 빙그레 웃고 있던 민숙이 끼어든다.
"고마 방에 들어가이소. 우리 오빠 집에 돌아온 뒤로 찾아온 친구는 재만이 오빠뿐입니더."
"그래? 나야 의리 빼모 흑사리껍데기제. 민숙아. 술안주 좀 갖다 도라. 김치쪼가리도 괜찮다."
재만이 주머니에서 소주병을 꺼내 보이며 종구 방으로 들어간다. 방안을 훑어 보다가 부시시 일어나 앉는 종구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속옷만 입은 우람한 몸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감옥에서 몸만 만들었구나?"
"틀린 말 아니야. 만사 잊고 수련에 매달린 결과니까. 앉아라. 지붕 안 무너진다."
양재만이 이불 속으로 다리를 찔러 넣는다.
"집에 온 지 두 달 됐다고? 우리가 친구이긴 하나?"
"니가 내 소식 들으모 찾아 오것지 했어."
"하긴 우리 어른들 볼 면목이 없어서라도 니가 오지는 몬 했것제. 그렇다고 우정을 개똥 취급을 해?"
"민숙이 말 들었으모 알 것 아이가. 나라는 놈은 고향친구들 사이에 기피 대상이 됐다는 소리야."
"알았은깨 고만해라. 근데 밤마다 오딜 싸댕긴 기고?"
"옥산."
"뭐? 거긴 뭐하로?"
"발광하는 기지 뭐. 옥산 꼭대기에 올라가 두세 시간 수련하고 내려오면 첫 새벽이야."
"말 들어 봉깨 니가 무협지에 나오는 고수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높은 산을 밤중에 오른다는 기 말이나 되나?"
"내 몸을 한계까지 몰아가는 기지. 그래야 내가 숨 쉬고 살 수 있은깨."
그때 민숙이 삶은 고구마를 동치미와 함께 가져온다.
"대접할 기 이런 거 뿌입니더."
"촌구석에서 그기모 됐지. 니도 여기 좀 앉아라."
민숙이 종구 눈치를 힐끔 살피고 슬그머니 앉는다.
"느그 오빠 이거 완전 미친 놈이다. 밤마다 옥산 꼭대기에 올라간다 안 쿠나."
민숙이 눈이 휘둥그래진다.
"동네 사람들 말이 맞네. 오빠가 밤중에 산으로 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 쿠더만. 와 그런 위험하고 힘든 짓을 하노?"
"수련하는 기라는데 말이 돼? 간 띠 키우는 수련이모 몰라도."
"밤에 산에서 수련하고, 낮에는 가져 온 저 나무토막들을 깎아 다듬는 일상은 내가 미치지 않고 사는 방편인깨 그리 알고 넘겨."
"말 나온 김에 물어 보자. 방구석에 있는 저 나무토막으로 뭘 만든 기고?"
"알아 맞춰 봐라. 용도가 뭔지."
"북채로 보기엔 굵고 , 몽디로 보기엔 너무 가늘고 짧은 걸. 그래도 니가 만든 긴깨 무기 아니것나."
"무기 맞다. 내 주먹을 대신할 무기 말이다. 주먹땜에 신세 조진 내가 감방에서 생각해 낸 기 단봉술이야."
남자들만의 이야기에 싫증을 내고 민숙이 일어선다. 그러자 재만이 재빨리 화제를 돌린다.
"아참! 니한테 물어 본다는 걸 깜빡했네. 어머니는 어떠시노?
사고 소식 듣고도 한 번 찾아 뵙지를 몬 해 면목이 없다."
"우리 옴마는 백치가 되삤어 예. 아들도 몬 알아봐 예."
그 말을 떨구고 민숙이 가버리자 재만도, 종구도 입을 다물어버린다.
한참만에 생각난 듯이 재만이 숫가락으로 병마개를 따고 술을 따른다.
"종구야. 지난 5년간 내는 니 생각 많이 했데이. 그리움인지 우정인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니가 단짝이란 말이다."
"고맙다. 그리 생각해줘서."
"앞으로 뭐하고 살지 생각 좀 했나?"
"어머이 모시고 양돈이나 하자는 생각이었는데 집에 와 보니 그럴 밑천도 안 남았더라."
"도시로 나갈 계획은 없고?"
"전과자에다 가방끈도 짧은데 도시로 가봤자지. 가진 거라고는 건강한 몸띠랑 무술뿐인데 주먹으로 밥 묵고 살기는 싫다."
서글픈 미소를 매달고 있는 종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재만, 결심한 듯이 말한다.
"종구야. 니 고마 내쾅 부산 가자. 전과자라서 취직은 어렵지만 돈벌이 할 데는 쌨다. 이 몸이 방학마다 부두에서 막노동을 해서 학비를 벌었는데 그런 데서는 신분 안 따진다."
"노가다를 하자 캐도 거처는 있어야 되는데 방 얻을 돈이 있어야제."
"내쾅 자취하모 되제. 난 대학을 2년 댕기고 군에 갔다가 며칠 전에 집으로 왔다 아이가. 곧 복학하로 부산에 간다."
"나더러 빈대 붙으라고? 느그 어른들이 알모 펄쩍 뛸 긴데."
그때 민숙이 방문 열고 들어오며,
"오빠! 뭘 망설여.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도 있는데."
"어! 밖에서 듣고 있었더나?"
그 말에 민숙이 배시시 웃는다.
"우리 오빠 좀 데려가이소. 어머이는 오빠 없이도 내가 잘 모셔왔은깨 걱정할 것 없어 예.
"들었재? 민숙이 말."
"그래, 니한테 빈대 좀 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