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 성탄절특사란 플래카드가 걸려있고, 한 무더기의 남자 죄수들이 풀려나고 있다.
이십대의 청년을 끝으로 닫히는 철문소리. 석방된 이들이 마중 나온 사람들과 얼싸안기도 하고 두부를 먹기도 한다.
맨 끝에 나온 종구, 청바지에 황토색 점퍼 입고 밤색 챙모자를 눌러 쓴 우람한 청년이 사람들 사이를 뚫고 나와 땅에 시선을 끌며 걷다가 앞을 막는 구두발을 보고 비로소 고개를 든다.
꾸벅 인사하는 청년, 시무룩한 얼굴이다.
"우찌 알고 왔습니꺼?"
"이거 먹어 둬"
고성일 변호사가 검정 비닐봉지에 든 두부를 내밀자 종구는 잠시 망설이고는 두부를 봉지 채 받아 두어 번 베어 먹고는 나머지를 교도소 담벼락에다 패대기쳐버린다.
"여기까지 오시지 않아도 제가 사무실로 찾아갈라 캤심더."
"그래. 하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너한테 두부를 가져다 먹여? 네 변호인으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일이기도 하니까 고마워 할 건 없어."
작달막한 고 변이 앞서고, 그 뒤를 187센티 거구의 종구가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로 그 뒤를 따른다.
정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주차 돼있는 차속으로 두 사람이 빨려들고는 차가 교도소 담벼락을 따라 서행한다.
복잡한 간선도로를 거쳐 자동차 전용도로에 진입하고서야 이야기를 시작한다.
"얼굴 좀 펴지 그래, 자그만치 4년을 감방에서 썩고 풀려났는데, 기쁜 기색이란 없으니. 쯧쯧!"
"지금 제 가슴팍에는 큰 바위가 얹혀 있습니더. 어머니와 동생 얼굴을 우찌 볼고 싶어서 예."
"그런 네 마음, 이해는 가지만 벌써부터 그런 생각에 짓눌릴 건 없어. 그동안 앞날의 인생설계는 충분히 했겠지?"
옆 유리창으로 한숨을 토한 종구, 얼굴을 되돌리며,
"저 같은 놈한테 인생설계가 가당키나 합니꺼? 살인 전과자를 사회가 우찌 보는지는 안 당해봐도 압니더."
"성탄절 특사에 뽑히려면 모범수였다는 건데 사회에 나와 써먹을 기술자격증 몇 가지는 땄을 것 아냐?"
고 변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며 차창을 내다보던 종구,
"그런 얘기 치아뿌고 어머이 얘기를 해 주이소."
하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고 변을 돌아본다.
고개 끄덕인 고 변,
"뭐가 그리 급해?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네 어머니 상태를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부터 말해 봐."
"동생이 곧이 곧대로 알려주지 않았심더. 편지마다 잘 지내고 계시니 걱정말라고만 해서 예."
"네 동생은 그런 애였지. 서울 올라와 어머니 간병을 할 때도 늘 네 걱정이었으니까. 자포자기해 감방에서 사고나 치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날 찾아 오려던 건 어머니 교통사고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였겠지?"
"예. 변호사님한테 감사인사도 드려야 했고 예."
"나도 네가 석방될 날을 고대하고 있었어. 너한테 그 사고의 전말을 사실대로 알려 주기도 하고, 너한테서 받아야 할 약속도 있기에. 아니 맹세를 받아야만 해서."
"주먹 함부로 쓰지 말라는 말씀이면 약속드릴 것도 없심더. 주먹은 안 쓰기로 제 자신한테 맹세했으니까요."
"그래? 반가운 말이지만 내가 받을 맹세는...."
종구를 돌아 본 고 변은 무심한 눈으로 옆 차창을 내다보고 있는 모습에 혀를 차고 만다.
서울 시가지로 진입하여 법원이 저만치 보이는 곳에 왔을 때 침묵하고 있던 종구가 벌떡 상체를 고추 세운다.
포승줄에 결박된 채 몇 번씩이나 드나들었던 곳,
어머니가 재판을 보러 상경했다가 차에 치여 불구의 몸이 되어버린 곳,
헤아릴 수도 없이 꿈에 보았던 그 곳을 앞에 두고 눈에 핏발이 서고 있었다. 이면도로의 어느 빌딩 주차장에 차를 넣은 고 변이 말했다.
"이 건물에 내 사무실이 있어. 어디 가서 밥부터 먹자고."
퍼랗게 굳어있는 종구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 보고 차에서 나온 고 변이 앞장 서 걷다가 한정식 식당으로 들어간다.
한산한 식당의 구석자리를 차지한 두 사람이 음식을 시켜놓고 밑반찬을 안주로 맥주를 따른다.
"반주로 한 잔 마셔."
"술은 입가심만 하것심더."
"축배를 마다해서야 쓰나. 지금부터 할 이야기도 많은데 술이 도움이 될 거야."
고 변이 한 잔을 단숨에 비워버리자 종구도 마지못한 듯한 표정으로 반 잔을 마신다.
"감방에서 어떤 세월을 보냈기에 얼굴이 가면처럼 굳었지?"
"허송세월만 한 건 아닙니더."
"공부라도 했어?"
"저한테는 무술수련이 공붑니더. 지난 4년간은 잡념없이 수련할 수 있는 기회였고, 기인을 만나 새로운 경지를 엿보는 행운도 있었심더."
"주먹질로 신세 망치고 집안까지 말아 먹은 넌데 여전히 무술에 매달렸다니 께름칙하게만 들려. 아직도 복수심을 버리지 못했군."
픽 웃고 마는 종구를 고 변이 다그친다.
"복수는 안 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이야길 듣고 잘 생각해 봐. 먼저 네 어머니 사고경위부터 설명해주지."
*****
재판정
피고석에 종구가 변호인 고 변과 나란히 앉아있다. 종구에게 5년형이 선고되자 방청석에 앉아있던 시골 아낙이 벌떡 일어나 법정을 나간다.
"네 어머니가 법정을 나갈 때만해도 난 화장실에 갔거니 했어. 네 어머니가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던 가방이 앉았던 자리에 있었거든. 알고 보니 네 어머니는 5년형 선고에 충격 받고 얼이 빠졌던 거야. 사고를 목격한 정문위병이 그러더군. 꼭 자살하려고 차도로 뛰어든 것 같았다고."
"다친 데가 정확히 어딥니꺼?"
"큰 수술만 해도 뇌진탕 수술에다 다리 한 쪽을 절단했지, 수술 중에 운명할 확률이 반이라고 했으니 얼마나 위중했는지 짐작이 갈 거야. 문제는 병원 비용이었어. 그 사고, 전적으로 네 어머니의 과실이었다는 건 알고 있지?"
"예."
"그래도 운전자 부주의를 걸어 약간의 합의금을 받아 냈어. 사고 소식을 전할 겸 니네 집에 찾아갔다가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알아? 알고 보니 꽤나 알찬 살림이었다는데 네가 사고쳐서 다 말아 먹었더구나."
"면목이 없심더. 그럼 병원은 무슨 수로..."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니 일단 내가 끌 수밖에. 그 많은 비용을 내가 감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고민고민하다가 비상수단을 생각해냈지. 그게 뭐냐 하면.... 그말 하기 전에 너한테 다짐을 받아야 하겠어. 무슨 이야기든 화내지 말고 들어."
충혈된 눈으로 고 변을 노려보고 있던 종구가 고개를 떨구어버린다.
"말씀 하이소."
"조만호와 담판을 벌렸어."
종구가 벌떡 일어나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 변이 앉으라는 손짓을 한다.
"진정하고 내 말 마저 들어. 난 원인제공자인 조만호한테서 네 어머니를 살릴 돈을 받아내는 대신 네가 복수하는 걸 막아준다고 약속했어.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는 그가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고."
앉아서 씩씩대던 종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 약속 지켜드리죠. 지금은 안 되지만 변호사님의 은혜도 잊지 않컷심더."
방을 나서는 그의 등에 대고 고성일이 소리친다.
"이 봐. 음식은 먹고 가야지, 그냥 가면 어떡해?"
***
터미널에서 진주행 고속버스 표를 산 종구, 식당에 들러 국수 한 그릇을 게눈 감추듯이 먹어 치운다.
머신에서 뽑은 커피까지 마시고 버스에 오른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자 그날의 회상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온다.
***
아침나절의 서대문 대로변, 가로수 뒤에 숨어서 7층 빌딩을 지켜보는 자신의 모습이 영상처럼 뇌리에 떠오른다. 바로 지금 입고 있는 옷인 청바지와 황토색 점퍼다.
원수 조만호가 승용차에서 내려 빌딩으로 들어가자 종구도 검정챙모자를 깊히 눌러쓰고 빌딩으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탄다.
5층에서 내려 복도를 살피다가 대표이사 명패가 붙은 문 앞에서 큰 숨 들이마시고 문을 연다. 책상 앞에 앉았던 앳된 여비서가 벌떡 일어나,
"여긴 아무나 들어오는 데가 아니예요. 무슨 일로 오셨죠?"
"난 시골서 올라 온 사장님 친척인데 인사드리러 왔심더."
"친척이라고요? 친척 누구라 알릴까요?"
"조캅니더."
여비서가 별 의심 없이 내실 문을 노크하고 들어가자 종구가 그림자처럼 그녀를 뒤따른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막아서지만 손짓 한 번에 가볍게 밀려난다. 책상 앞으로 성큼 다가 온 종구를 조만호는 그다지 놀라지 않는 눈길로 바라본다.
"어느 현장에서 왔는지 모르지만 절차를 밟고 와야지 대뜸 여기로 오면 되겠어?"
"저승사자가 절차 밟고 오나?"
"뭐 뭐? 넌 누구야?"
"내 얼굴을 보고 생각나는 사람이 없오? 난 아부지랑 붕어빵인데."
"미친 놈이구먼. 사람 불러 끌어내기 전에 썩 꺼져."
놀란 토끼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여비서가 큰소리로,
"사람을 부를까요?"
조만호는 대답은 커녕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
"내 얼굴 똑바로 보시라니까."
그제야 불청객인 종구의 얼굴을 뜯어 보는 조만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그가 비서에게 나가라고 손짓을 해 보인다.
"이제야 알아 보네요. 만호아재! 나 아재 찾느라 고생 꽤나 했심더. 신이 몇 켤레 닳았는지 알아요? 인종 들끓는 한양에 숨어있으니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였제요."
명패를 들었다가 쾅 내려 놓으며 소리친다.
"이름조차 조일호로 개명했으니 꼬리가 잡히나."
조만호가 꺼질 듯한 한숨을 떨구고 입을 연다.
"코흘리개 꼬마였던 네가 이렇게나 컷다니, 이제 보니 얼굴도, 체격도 명환이와 판박이구나. 이러지 말고 소파로 가 내 말을 좀 들어 봐."
"그 회전의자도 오늘로 끝인데 그냥 앉아서 말해보소. 아재가 회삿돈 싹싹 긁어서 사라져버린 뒤에 우리 아부지가 우찌 됐는지, 또 우리집은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기나 하요?"
조만호가 털썩 의자에 주저 앉는다.
"한참 지난 뒤에 인편으로 들었지. 멀리서 피눈물로 친구의 명복을 빌 뿐이었지만 나로서는 야반도주할 수밖에 없는 사정은 있었어. 어줍잖은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설명할 기회를 주겠니?"
"사기꾼의 세 치 혓바닥에서 나오는 변명 들을라꼬 여어 온 거 아이지만 딱 1분 줄긴깨 말해보소."
"종구야! 이러지 말고 차분히 앉아서 내 말 들어다오."
"구역질나게 내 이름 부르지 마소. 아부지 직인 원수는 불구대천이라 캤는데 한 자리에 앉게 생겼오?"
"날 너무 핍박하는구나. 아무튼 내 얘기를 들어 보렴. 네 아버지는 어차피 죽고, 회사도, 너희 집도 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어.
그 당시의 의술로는 췌장암은 발견이 곧 사망선고였는데 네 아버지는 이미 2기였어. 사장이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진주 좁은 바닥에 퍼지면서 은행은 물론이고 사채업자들마저 등을 돌려버렸던 거야.
자금이 고갈되고, 공사현장이 올 스톱 되자 공사인력은 물론이고 납품업자, 하도급업자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는데 월급쟁이 상무였던 내가 그런 사태를 무슨 수로 수습하겠니? 모진 마음 먹고 가족과 함께 야반도주를 했던 거야."
"닥쳐! 내가 당신의 비행을 모를 줄 알아? 당신은 우리 아부지 암 발병을 누구보다 먼저 알았고, 남들이 눈치채기 전에 온갖 수단으로 돈을 챙겼어.
직원들과 노무자들 임금을 착복한 것에서 은행돈과 사채까지 끌어다 챙겼다는 사실이 다 들어났다고.
그러고도 뭐시라? 우리 아부지는 어차피 죽고, 회사는 망할 운명이었다고?
야이 배신자야! 우리 아부지가 당신한테 어떤 사람이었어?
건달이었던 당신을 데려다 상무자리에 앉힌 은인의 등에 비수를 꽂고는 피눈물로 애도했다고?"
"말이 심하구나. 조상님을 걸고 맹세하지만 내가 그런 식으로 돈 챙겼다는 건 사실이 아니야."
"야이 개자식아! 말종사기꾼아! 아직도 그 더러운 입으로 할 말이 남았어? 오디 주디가 당나발이 되고도 거짓말을 지꺼리는지 보자고."
종구가 조만호ㅢ 안면에 주먹을 날린다.
비서의 연락을 받고 몰려 와 있던 칠팔 명의 직원들이 사장실에서 들려오는 우당탕거리는 소리, 비명소리에 문을 열어 제치고 들어간다.
안면이 피투성이가 된 채 쫒기는 조만호를 몇 사람이 막아서면서 난투극이 벌어진다.
조만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종구와 직원들의 싸움이 되어버리지만 싸움은 더욱 격해진다.
경찰이 들이 닥쳐서야 싸움을 그친다.
수갑 차고 현장을 휘둘러 본 종구, 구석지기에 혼절하여 누워있는 사람 하나를 발견하고는 표정이 어두워진다.
회상을 그치고 눈을 뜬 종구, 주먹으로 자신의 머리를 치며 중얼거린다.
"내가 미쳤었지. 우짜자고 어먼 사람들한테 마구 주먹질을 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