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각자의 말이 올려지고
-제가 드리겠습니다.
다시금 당돌한 소녀의 말이 떠올라서, 카이엘은 실소를 터뜨렸다.
“하.”
-폐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힘 말입니다.
“...눈빛 하나는 살벌했지.”
감히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그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 했었지.
‘...그것도 나름 귀엽긴 했...’
갑자기 생각이 이상한 데로 흘러가서, 카이엘은 누가 듣는 사람도 없건만 괜히 흠, 흠 헛기침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치 없는 시종이 카이엘의 헛기침을 귀신같이 듣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폐하,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훈련생들의 명단은 아직인가?”
“훈련생... 아, 백색 사단 말씀이십니까?”
시종은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것이... 사람이 왔다 가기는 했는데 말입니다.”
“왔다가 그냥 갔다고?”
“그... 서류를 잘못 가져왔다고 금방 다시 오겠다고 달려나갔습니다.”
“......”
황제가 직접 내린 명령에 다른 이도 아닌 군인들이 실수를 한다...
‘목숨이 두 개이지 않고서야... 아니면 돌은 건가?’
카이엘은 턱 끝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서늘하게 웃었다.
그 표정을 보자 시종은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이런 표정을 짓고 나면 황제는 꼭 피를 불러오는 명령을 내렸기에.
“지금부터 1분이 지날 때마다 훈련장교들의 머리를 한명씩 베겠다. 제라드가 자리를 너무 오래 비웠나 보군. 이렇게 기강이 해이해져서야.”
“폐, 폐하....”
역시나.
시종은 기겁을 하고 뭔가 말하려 했으나 황제가 더 듣지 않고 돌아서기에 아무 말도 못하고 다시 문으로 향했다.
그 순간, 숨이 턱 밑까지 찬 기사 하나가 문 앞에 당도했다. 그가 우려했던 유혈사태는 일단 피한 셈이었다.
“폐하, 백색 사단 훈련생들의 명단을 가지고 왔습니다.”
“들어와라.”
가엾은 기사는 얼마나 뛰어왔는지 목까지 벌개져 있었다. 시종은 기사에게서 서류를 받아 조심스럽게 황제에게 가져갔다.
“......”
황제는 글자를 읽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기억력도 좋았다. 그가 어린 나이에 권력을 쥘 수 있었던 것은 군사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빠르게 명단을 훑어내려간 카이엘의 표정이 굳었다.
‘...이름이 다르다.’
아까 리안나 왕녀와 헤어진 직후, 그는 훈련장 한가운데로 들어가 훈련생들의 사열을 받았다.
즉흥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훈련생들은 그동안 제대로 훈련을 받았는지 훌륭하게 해냈다.
카이엘은 그들의 이름을 직접 하나하나 듣고 나서, 바로 방으로 돌아와 훈련장교에게 훈련생들의 명단을 가지고 올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가지고 오면 되는 명단을 반 시각이나 기다리게 한 것도 모자라, 가지고 온 명단 중에는 아까 듣지 못했던 이름들이 몇 명 적혀 있었다.
그나마 마흔 둘이었던 총 인원 수는 맞았는데.. 명단을 다시 가져오면서 숫자라도 맞춘 것 같았다.
카이엘은 명단을 가지고 온 기사를 노려보았다. 기사는 잔뜩 긴장한 채 차렷 자세로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이제 막 중급의 기사가 된 젊은이였다. 좋은 집안의 자제이기에, 여기서 훈련생들을 관리하는 일을 하게 됐을 테고, 별 고생 없이 지금의 자리까지 올랐을 터였다.
‘...저 새파란 녀석이 뭘 알고 있기나 할까.’
감히 황제에게 거짓 보고를 할 위인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았다.
카이엘은 리안나가 했던 말과, 사열을 하던 훈련생들의 안색, 그리고 지금 받은 수상한 명단에 대해 잠시 서서 생각하다가 조용히 모두를 물렸다.
정황을 봤을 때 무슨 이유에서건 훈련생들이 수시로 바뀐 게 틀림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늘 정확해야 할 명단조차 제대로 관리가 안 됐던 것일 거고.
‘대체 왜...?’
황궁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사망자가 나왔다는 리안나의 말이 사실일까? 그게 백색 사단을 만들기 위한 무리한 훈련 때문이라고...?
카이엘은 깊은 심호흡을 하며 방 안을 서성였다. 백색 사단에 대한 이야기는 최근까지도 소수 측근들만이 알고 있는 기밀이었다.
백색 사단 양성의 총 책임자는 당연히 제라드였고...
만약 백색 사단에 문제가 있는데도 그가 몰랐다는 것은... 이 일의 은폐를 지시한 이가 바로 제라드란 말이 된다.
“제라드.”
카이엘의 낮은 목소리가 공허히 방 안에 울려퍼졌다. 그의 불안한 심정을 대변하듯... 목소리는 얼마 가지 못하고 방 한가운데 꺼지듯이 가라앉았다.
카이엘은 참담한 심정으로 주저앉았다.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너만은... 너만은 날...’
***
케인의 눈을 보니 지금 내가 제정신인지 묻고 싶은 것 같았다.
“제정신이야?”
역시.
“그럼 수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개죽음 당하는 걸 그냥 두고 보자는 거야?”
“그래도 그렇지...”
케인이 두 손에 자기 얼굴을 파묻었다.
“백색 사단 훈련생으로 들어가겠다고 한다고? 그 무슨 황당한.... 그게 될 거 같아?”
“훈련생들한테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잖아! 황궁 안은 경비가 삼엄해서 방 밖에서는 한 발자국도 편히 움직일 수 없다는 거 알면서.”
“...그래서 네가 마법사라는 걸 공개하겠다고? 여기서?”
케인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 한 마디 덧붙였다
“지금 너 마법도 못 쓰잖아.”
“그러니까 이 작전이 가능한 거지.”
나는 씨익 웃었다.
“마력 봉인이 된 상태니까 나는 지금 결코 위력적인 마법을 쓸 수는 없거든. 기껏해야 훈련생들 중에 가장 우수한 수준일 거야. 황제는 고대 마법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으니 사실은 내가 마법사란 걸 알면 날 받아줄 수밖에 ...”
“아니, 그러니까 그 봉인구를 하고 있으면 마력 흐름이 완전히 막혀서 아무것도 못 한다며.... ? 잠깐. 이거 왜 이래?”
케인이 내 오른쪽 손목을 확 낚아챘다. 내 손목에 채워져 있던 마력 봉인 팔찌에 미세한 실금을 본 그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아델 작품이로군.”
“이 정도는 괜찮아. 나도 어느정도 마력을 쓸 수 있어야 다른 사람의 마력을 감지라도 할 수 있잖아? 이 황궁에서 마법사 군대를 양성할 수 있는 누마법사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내 마력을 완전히 막아 놓는 것은 너무 위험해.”
혹시 몰라 아델이 황궁을 떠나기 전, 마력 봉인구에 흠집을 내 달라고 부탁했었다. 부탁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거친 협박성 문구도 있었긴 했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흠집이 난 마력 봉인구는 예전처럼 완벽하게 마력을 봉인하지는 못한다. 즉, 이 실금만큼 가느다란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난 이제 마력은 운용할 수 있단 말이지!
“부상이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마력을 쓰다가,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게 더 위험하다는 생각은 안 들어?”
아아, 또 이 뻔한 잔소리.. 더 듣고 있다간 귀에서 피가 날 게 분명하다.
케인이 정말 화가 났는지 잡힌 손목이 저릿저릿해 왔다.
“알았으니 이 손 좀 ..”
“손은 놓고 얘기하시죠.”
“!”
갑자기 방 한가운데 공간이 쪼개지면서 누군가가 내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아니, 정정한다.
‘누군가가’ 아니라,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녀석은...
“이안!”
아닌 게 아니라 이안이 날 자기 품에 쏙 끌어당겨 놓고는 능글맞게 웃음짓고 있었다.
...네가 진정 죽고 싶은 게로군.
“이 자식..!”
케인은 아예 검까지 빼들었다.
“어엇, 조심하세요. 루시아 양이 다칠 수도 있으니까.”
“? 루시아!”
이안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허공에는 힘없이 축 늘어진 루시아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안은 우리를 놀리듯 손가락을 까닥여 루시아를 천천히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와 동시에 나는 이안을 내팽개치고 루시아에게 달려갔다.
“루시아, 루시아!”
“야! 눈 좀 떠봐!”
내가 세게 흔들어도 루시아가 깨어나지 않자, 케인은 그대로 이안에게 달겨들어 멱살을 잡았다.
“루시아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이라뇨? 전 루시아 양을 구해 온 건데..”
“웃기지 마! 네 녀석이 왜 루시아를..”
케인의 고함소리가 바깥까지 들릴까 걱정될 정도로 커졌을 때, 루시아가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아우, 머리아파...”
“루시아!”
나도 모르게 루시아의 양 어깨를 부둥켜 안았다. 루시아는 눈 빛에 퀭했고 입술은 거무죽죽해져 있어서 마치 몇 달 동안 큰 병을 앓고 온 사람 같았다. 그리고 몸에서는...
‘? 이게 무슨 냄새지..?’
“루시아, 괜찮은 거야?”
“으, 괜찮으니까 큰 소리 좀 내지 말아줄래? 리안나, 너도 좀 떨어지고.”
루시아는 이안을 패대기치고 달려온 케인의 목소리에 머리가 울리는 모양인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연신 눌러댔다.
“말하는 본새를 보니 괜찮은 것 같기는 한데...”
“...특별한 외상도 없는 것 같고. 하나 만들어 줄까?”
나와 케인의 음산한 목소리에 루시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죽다 살아온 사람 앞에 두고 무슨 막말들이야?”
루시아는 낑낑거리며 몸을 일으키더니 우리 뒤 쪽에서 상처받은 척 쭈그리고 앉아 있는 이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번에는 저 꼴보기 싫은 마족한테 빚을 좀 졌어.”
나는 지친 표정의 루시아와, 천연덕스럽게 앉아 있는 이안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
불길한 느낌이 엄습했다.
내가 눈치채지도 못한 순간, 이미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큰 판이 돌아가기 시작한 것만 같은...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방문을 잠그고 가까이 모여 앉았다. 나는 루시아가 편히 기댈 수 있도록 등받이 쿠션을 받쳐주고는 말했다.
“말해줘, 루시아.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요, 황녀님?”
“...그렇게 걱정되면 지금이라도 무를까요, 프리아나 양?”
신시아의 말에 프리아나가 대번 안색이 변하며 탁자 위의 서류를 앞으로 밀었다.
“어머나, 무슨 말씀을요. 이렇게 중요한 거래가 성사됐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서 그런거죠, 호호호.”
‘성사는 무슨... 내 계획에 놀아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한순간 신시아의 얼굴에 싸늘한 빛이 지나갔지만 프리아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희희낙락이었다.
하기는, 그도 그럴 것이 방금 그녀와 신시아가 서명한 이 서류에는 엄청난 거래내용이 적혀 있었다.
앞으로 오년 동안 황실에서 쓰는 의복 원단과 보석 세공품을 로젠의 아르헨 가문에서 사들이겠다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오년 후에는 아예 아르헨 가문에서 제국으로 수출하는 모든 물품에 세금을 매기지 않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오년 동안 물품 공급을 차질없이 수행한다면 세금을 면제해주겠다는 얘기지만, 우리 가문이라면 황실에 물량을 대는 것 정도야 문제 없지.’
아르헨 가문은 로젠 왕국에서, 아니 중앙대륙에서 손꼽히는 의류 상단을 직접 거느린 대귀족이었다. 국가에 헌신하는 군인과 관료를 최고로 치는 제피리움과는 달리, 여러 소국들과 면한 아르헨은 물건을 만들고 팔아 부를 창출하는 상인들이 존경받는 나라였다.
때문에 아르헨과 같은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도 일찍이 상단을 만들고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들였고, 그 결과 본국인 아르헨 뿐만 아니라 제피리움의 콧대 높은 귀족들이 열광하는 의류와 보석들을 만들어 내는 최고의 의상실을 보유하게 된 것이었다.
‘아무리 우리 물건이 고급이라지만.. 앞으로 오년 간 황실에서 쓰일 물량을 우리 가문에서 주문한다니... 이정도 되는 큰 거래를 황제의 재가도 없이 단독으로 한다고?’
행여나 신시아가 거래를 무를까 싶어 거의 뺏다시피 계약서를 자기 앞으로 가져온 프리아나는, 짙은 녹색 눈을 굴려 신시아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신시아는 그런 프리아나를 보며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싱긋 웃을 뿐이었다.
그걸 본 프리아나는 괜히 초조해져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로 저 황녀가 이 황실의 살림을 도맡아 하고 있나 보군... 이대로라면 내가 정말 황비가 된다고 해도 저 여자에게 휘둘리는 거 아냐?’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어요, 프리아나.”
“네, 네?”
프리아나는 마치 자기 생각이 들킨 것 같아 바보같이 쩔쩔매며 신시아에게 대답했다. 신시아는 그것마저 다 파악했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뒷말을 이었다.
“난 그저 우리 황실과 새 연을 맞을 가문에 힘을 실어주려는 것 뿐이에요. 이 계약문서는 신년부터 효력을 발휘할 테니, 그 때가 되면 아르헨 가문의 위상이 지금과 비교가 안되겠지요.”
‘그렇지, 그렇지. 황실의 모든 인원과 황실을 드나드는 고위 귀족들이 모두 우리 가문에서 만든 것들을 입고 쓰고 걸치게 될 테니까!’
그렇게 되면 외국인을 무시하는 제피리움인들도 감히 이 프리아나 공녀를 깔보지 못할 것이며, 황실과의 독점거래로 막대한 부를 거머쥐게 된 아르헨 가문의 적녀가 황비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프리아는 신시아를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황녀님의 깊은 사려에는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고 있답니다. 로젠 왕국과 아르헨의 이름을 걸고 황녀님과 제피리움의 황실에 도움이 되는 일만을 하겠어요.”
뜻하지 않은 행운에 프리아나가 뛸 듯이 기뻐하며 나간 후, 신시아는 다시 서늘한 표정으로 돌아와 소파에 등을 기댔다.
“저런 멍청한 여자와 매일 얘기를 나누다니.. 이것도 꽤나 피곤한 일이야.”
“...하지만 황녀님, 매년 황궁에서 쓰는 물품의 양은 엄청납니다. 그것을 모두 한 곳에서, 게다가 외국의 귀족에게서 사 들인다니.. 모르긴 몰라도 제국에 엄청난 손실을 가져올 겁니다.”
잠자코 있던 이제닌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얼굴에는 불안해 보이는 표정이 역력했다. 신시아는 웃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바로 그거야, 이제닌. 내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거라고!’
사람들이 다 듣도록 큰 소리로 말하고 싶었다.
“...황녀님?”
“걱정마, 이제닌.”
하지만 신시아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 대신 우아한 표정으로 자신의 시녀를 안심시켰다.
“제국에 위협이 되지 않을 상인 가문을 포섭하기 위한 유인책일 뿐이야. 오빠가 황족과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면 군사력을 가진 북쪽이나 남쪽의 대귀족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 아냐? 그들을 상대하느니 차라리 비단장수가 낫지.”
“네...”
“...오라버니도 이해하실 거야. 이 동생의 깊은 마음을...”
황제의 성격을 잘 아는 시녀는 그 말에도 걱정스런 표정을 숨깆 못했지만 신시아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그녀의 이복 오빠가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