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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황제의 마음을 훔친 소녀
작가 : 맛있는코코아
작품등록일 : 2019.9.12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은 소국에서 인질로 잡혀온 공주 리안나. 리안나의 지상 최대 목표는 심기를 거스르는 자는 가차없이 베어 버리는 잔혹한 황제의 궁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 나아가 궁을 탈출해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
그런데 온갖 멸시와 모욕을 건뎌내며 무사히 탈출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리안나에게 청천벽력같은 황제의 명령이 떨어진다. “발크 국의 왕녀를 황비로 맞겠다.”는. “대체 왜...?”
벗어나려 할수록 황제 카이엘은 리안나를 집요하게 감시하는 한편, 리안나를 유혹하려 하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평온했던 제국은 마물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진다.
“나... 여기서 무사히 나갈 수 있을까?”
황비이길 거부하는 공주 리안나와 폭군 황제의 아찔한 황궁 로맨스가 지금 펼쳐진다.

 
22. 함께 있고 싶은 시간
작성일 : 20-01-26 14:40     조회 : 306     추천 : 0     분량 : 7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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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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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엘은 한 손을 가만히 쥐었다 펴 보았다.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마치 미약한 떨림이 전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떨었던 쪽은.. 나였던가?’

 

 두려웠다.

 

 눈 앞에 있는 여자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지만 그 애는 두려워하지 않았어.’

 

 카이엘은 두 눈을 손으로 가렸다.

 

 그러자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리안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카이엘은 왜 자신이 그녀에게 빠져들었는지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죽음의 냄새가 났지만, 동시에 생명의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의연할 수 있었지? 죽음이 지척에 닿았는데도.’

 

 나는... 나는 그토록이나 무서웠는데.

 

 유일하게 마음을 준 사람이 눈 앞에서 허무하게 사라질까 봐.

 

 ‘그 때처럼...’

 

 눈을 살짝 뜨자 손가락 사이로 발버둥치는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침대 위에서, 고통속에 비명을 지르며 죽어간..

 

 나의 어머니..

 

 

 

 

 그때 들려온 서러운 울음소리에, 카이엘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흑.. 싫어요... 안 갈래요!”

 

 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 같았다.

 아직 어린 여자아이가 서럽게 우는 소리였다.

 

 “잘 하는 짓이야. 알레인은 저 꼴이 되고, 결국 저 어린 애까지 정략결혼으로 보내버리고... 위대하신 테오 3세의 치세에 어떻게 찬사를 보내야 할지.”

 

 어느새 들어왔는지 신시아가 독기를 품고 노려보고 있었다. 울었는지 눈에는 물기가 있고.

 

  “황족으로 태어난 이상 의무가 있는 거다. 이레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뿐이야.”

 

  “이제 열 살이야!”

 

  “열 살이면 충분하지.”

 

  카이엘이 몸을 일으켰다. 그것만으로 위압감이 느껴져, 신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결혼도 아니고 약혼일 뿐이다. 엘로드 대공의 아들도 이제 열 넷... 더없이 완벽한 황족의 혼인이 아니냐.”

 

  “하지만... 이제 황족끼리의 결혼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

 

 “......”

 

  카이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로서도 괴로운 일이었다. 간단하게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던 아틸리안과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엘로드 대공의 손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북부의 피 흘리는 왕, 엘로드 대공은 그 대가로 황녀를 요구했다. 그의 가문의 정통성을 공고히 해 줄 황녀를.

 

 황족끼리의 결혼은 곧 근친을 의미하고, 그것은 곧 또 다른 불행이 시작된다는 의미이기에

 카이엘은 처음에 완강히 거절했었다.

 

 하지만 알레인이 납치당하면서 상황이 달라져 버렸다.

 

 제국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황자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카이엘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흐윽, 황제 폐하! 제발 절 북부로 보내지 말아주세요..!”

 

 “이레네 님, 안에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폐하..!”

 

 문 앞에서 실랑이가 있었지만, 시녀들이 간신히 끌고 나갔다.

 

 카이엘과 신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둘 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한참의 침묵 뒤에, 카이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발크 왕녀는 좀 어때?”

 

 “상처가 심하긴 하지만 잘 회복될 거래.. 아니, 잠깐. 발크 왕녀? 알레인이 아니라?”

 

  신시아는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자신의 오라버니를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카이엘이 잘못 말한 것 같지는 않았다.

 

 “...오라버니는 완전히 미쳤어. 그 말라깽이 왕녀가 대체 뭐라고... 듣자하니 직접 말에 태우고 왔다며?”

 

 온 황궁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신시아는 아들을 꾸짖는 어머니마냥 카이엘을 바라보았다.

 

 “제정신이야? 다들 오라버니가 결혼을 누구와 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왜 그런 왕녀에게 호의를 베풀어?”

 

 “리안나 왕녀가 왜?”

 

 신시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여자의 시녀가 납치극이 벌어진 날 외출해서, 아직 안 들어오고 있다는 건 알아?”

 

 “시녀들의 동향까지 신경쓰진 않아. 단,”

 

 카이엘은 신시아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습격을 받을 때 그 자리에 없던 황족에 대해서는 좀 신경을 써야겠지.”

 

 신시아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황궁에 남아 있는 황족이라고는 카이엘, 알레인, 신시아 그리고 저쪽에서 울고 있는 이레네 뿐이었다.

 

 “기가 막혀! 내가 그랬다는 거야?”

 

 “아를레프 다리와 통하는 길을 훤히 꿰뚫고 있는 건 너 뿐이야. 네 남편을 죽이고 네가 도망쳐 온 길이니까.”

 

 짜악-!!

 

 카이엘의 하얀 얼굴이 붉게 부어올랐다. 신시아는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씩씩거리는 숨소리를 내었다.

 

 “나한테 그 따위로 말을 하다니... 내 쌍둥이 동생을 볼모로 그 일을 하게 만든 게 누군데!”

 

 신시아의 두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흐르고 말았다.

 

 황제, 배다른 오라비는 그녀에게 너무 잔인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독해져야 한다.

 

 이 사람에게서 살아 남으려면.

 

 “그렇게 당당해도 되겠어? 지고하신 황제 폐하께서 동생의 결혼을 미끼로 나라의 대귀족들을 독살한 걸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떻게 할까?”

 

 신시아는 두려움도 잊고 카이엘에게 얼굴을 바짝 갖다대었다. 서로의 호흡이 그대로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둘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카이엘이 슬며시 웃었다. 동시에 그의 금안이 번뜩였다.

 

 “윽..”

 

 어느새 그가 신시아의 가는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말 조심, 해야지. 누가 듣지 않도록...”

 

 컥, 하고 괴로운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카이엘은 손에서 힘을 빼지 않은 채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행동도 조심해야 할 거야.”

 

 신시아는 눈물 때문에 앞이 뿌얬지만, 가까스로 눈을 돌려 카이엘이 바라보는 곳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굳은 표정의 랄프 경이 서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의 손에 널 죽게 하고 싶진 않으니까.”

 

 

 

 

 

 

 

 

 

 ***

 

 

 -마물들은 평소에는 의지도, 지능도 없는 저급한 생명체에 불과하지만 마족의 지배를 받게 되면

 지구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군대가 된다.

 

 -마족이란, 마왕이 직접 창조한 자신의 수급으로 마왕의 분신이자 자식이기도 하다.

 

 -남아있는 수가 몇 안 된다고는 하나, 그들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고 다만 확실한 것은 한 명, 한 명이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피의 전쟁을 이끌었던 마족은 ‘알루카’로 다름아닌 헬레나 여왕의 가장 충직한 심복이었다. 마족은 강력한 마법을 사용하기 때문에 마족을 상대하려면 고위급 마법사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발크와 이오니아는...

 

 

 “하아.”

 

 한참을 써 내려가던 나는 펜을 놓고 한숨을 쉬었다.

 

 보고서를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있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글을 쓰는 것 자체가 힘든 게 아니라, 루시아의 외출이 길어지는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나보고 대책 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며칠 전, 아틸리안 공작과 그 난리를 치르고 황궁에 돌아왔을 때 루시아는 외출 중이었다. 그날 저녁 때가 되서야 마리 편으로 보내온 쪽지를 보고 나는 혀를 찼다.

 

 -마물들이 나타나는 지역들에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아. 따로 조사하고 돌아갈게.

 

 그 이후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가는데, 루시아는 감감 무소식이다.

 

 ‘궁에는 *악센 에 걸려서 그렇다고 둘러대기는 했지만... 너무 길어지면 의심할 텐데.’

 

 악센은 심한 감기몸살로, 전염성이 높은 데다 치료에도 오랜 시간이 걸려서 악센 환자는 무조건 궁 밖으로 나가야 한다.

 

 마침 악센이 유행하는 철이기도 하지만...

 

 ‘우리와 상의도 없이 단독행동을 하다니. 루시아 답지 않아...’

 

 저녁 때가 다 되서 마리가 가져온 쪽지는 틀림없는 루시아의 필체로 쓰여 있었다. 다급하게 흘려 쓴...

 

 루시아가 이유 없이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더 걱정이었다.

 

 ‘틀림없이 마족이 연관된 일일 텐데, 혼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지?”

 “흐아악!”

 

 나는 깜짝 놀라 의자째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창가에 불쑥 나타난 인물 때문에...

 

 “...괜찮은가?”

 “아뇨, 그게.. 아니, 그보다 왜 거기에..”

 

 당황해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황제, 당신이 왜 거기서 나오는데?

 

 내가 앉아있던 책상 앞에는 바깥으로 열린 창이 있었는데, 거기에 황제가 빛나는 미모를 반짝이며 서 있었던 것이다.

 

 쉬는 중이었는지 평상복 차림에 머리카락도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두어 얼핏 보면 평범한 사내 같았다.

 

 비현실적인 외모만 빼면.

 

 “산책 중에 그대가 걱정되서 와 봤지.”

 

 걱정? 황제가 나를?

 

 어안이 벙벙해 쳐다보고만 있자, 황제가 살짝 웃으며 물었다.

 

 “몸은 괜찮은가?”

 

 ...웃어 본 적이 없나? 표정이 굉장히 어색하다.

 적당히 대답을 하면서, 나는 눈동자를 굴렸다. 이대로 계속 창을 사이에 두고 황제와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였기에.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바깥으로 나가기로 했다. 황제를 이 방으로 들이기도 뭐 하고, 황제는 나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눈치였으니까.

 

 밖으로 나와보니 별궁 앞에 황제가 서 있었고, 조금 떨어져서 시종들 몇 명이 서 있었다.

 

 ‘오늘은 웬일로 ‘그’가 없네?’

 

 늘 그림자처럼 황제를 따라다니는 제라드가 보이지 않았다.

 

 “건강해 보이는군.”

 

 “예... 알레인 황자님께서는 좀 어떠세요?”

 

 “..잘 회복하고 있다. 이제 그 녀석도 좀 사내다워 지겠지.”

 

 황제는 그러면서 내게 병문안도 가지 않는 것이냐며 가볍게 타박했다.

 

 황제와 나란히 걷고 있어서 그런가... 늘 보는 황궁의 풍경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진다.

 

 “폐하께서는 늘 바쁘신 줄 알았는데. 오늘은 쉬시나 봅니다.”

 

 “아... 오랫동안 공을 들인 건이 드디어 결실을 맺어서. 나도 부하들도 휴가를 가지기로 했지.”

 

 오랫동안 공들인 일?

 

 나는 옆의 황제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정말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보였던 걸까? 뜬금없이 찾아오기도 하고.

 

 ‘결실을 맺었다면... 아틸리안 점령을 말하는 거겠지?’

 

 제피리움이 아틸리안 공작과 이본느 공녀의 신변을 확보했다고 발표하자마자, 거짓말처럼 아틸리안은 항복했다. 물론 아틸리안의 코앞에 ‘피흘리는 왕’, 북부 대공의 군대가 당도해 있었던 것도 한 몫 했겠지만.

 

 “늦었지만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곧 황실에 경사가 있지 않나요? 그것 때문에 분주하실 줄 알았는데.”

 

 “이레네의 약혼식을 말하는 건가?”

 

 “네... 북부 대공의 공자와... 약혼식이 있을 거라고 들었습니다.”

 

 내 말에 황제는 피식 웃었다.

 

 “약혼식이야 뭐... 연례 행사같은 것이니 짐이 신경쓸 것도 없지.”

 

 “......”

 

 황궁 사람들은 아주 난리던데. 선대 황제가 남긴 ‘마지막’ 자손의 약혼식이라고...

 

 한편으로는

 

 이번 약혼은 북부 황족과 중앙 황족의 결합이기도 해서, 북부의 ‘피 흘리는 왕’ 엘로드 대공이 아틸리안 점령에 힘을 보태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문에 아직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이레네 황녀가 팔려가듯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돌았다.

 

 ‘동별궁에서 황녀가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데. 아무리 배다른 동생이라지만 이 사람은 아무 감흥이 없는 걸까?’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황제는 웃음을 터뜨렸다.

 

 “궁금한 게 많은가 보군.”

 

 그러면서 내 뺨에 붙어 있던 머리카락 한 가닥을 떼어주는데, 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웃으니까,

 

 좀 사람 같다고 해야 하나.

 

 ‘! 지금 무슨 생각을..!’

 

 “어차피 그대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온 것이니, 좋은 구경거리를 보여주지.”

 

 내적 주접은 황제의 한마디에 바로 잠잠해졌다....

 가 아니라

 

 ‘나랑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왔다고?!’

 

 그냥 지나가다 들른 게 아니라?!

 

 기겁을 하고 쳐다보자 황제는 또 재미있는 걸 봤다는 듯이 쿡쿡 웃었다.

 

 “그 표정을 보니 자꾸 놀라게 해 주고 싶군. 여봐라.”

 

 황제는 뒤쪽의 시종을 불러 말 한 필을 끌고 오게 했다.

 

 그리고는 먼저 올라탄 다음 내게 손을 내밀었다.

 

 “타라. 그대에게 내가 왜 기분이 좋은지 알려주지.”

 

 “......”

 

 승마복도 안 입었는데....

 

 다른 이들의 부축을 받아 말에 타는데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머리를 스쳐갔다.

 

 왜 굳이 말을 한 필만 가져오게 한 거지...?

 

 

 

 ***

 

 

 

 “론도 지역의 농법 개량이 성공했으니, 비슷한 기후를 가진 알베스타, 브렉퍼드, 에스콘에도 시도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소식이네요. 그렇지만 기후 뿐만 아니라 풍토도 고려해야 할 겁니다. 무엇보다 땅이 중요하니까요.”

 

 “네, 잘 살펴서 시행하겠습니다.”

 

 “다음 안건이 있나요?”

 

 “로키아에서 군력 증강을 요청해 왔습니다. 계속해서 이방인들이 접근해 오고 있어, 정찰인력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요.”

 

 “또요...? 대체 어디서 접근해온답니까?”

 

 디온이 얼굴을 찡그렸다. 로키아 섬에 마물도 아니고 다른 대륙인들이 나타난다니, 여간 꺼림칙한 일이 아니다.

 

 “정확히 파악은 못했지만 요즘에는 북단의 에트링어 해협을 통해 넘어오고 있다는 것 같습니다. 우리 발크 섬을 지나는 해로가 막힌 뒤로는요.”

 

 “그 험한 길을 뚫었다고...? 대체 무엇 때문에.”

 

 디온은 턱을 짚고 얼굴를 찡그렸다. 안 좋은 소식을 보고하게 된 장군도 근심어린 표정으로 뭔가를 더 말하려다, 회의실 문 앞에 어린 그림자를 보고 멈춰섰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할까요? 중요한 보고는 다 드렸으니, 조금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 아, 그럴까요... 그럼 로키아에는 에밀 해안의 부대 중 몇 명을 선발해서 보내세요. 그 곳의 수비인력을 그나마 좀 넉넉한 편이니까.”

 

 “알겠습니다.”

 

 국왕에게 인사 한 장군은, 문 앞에 기대 서 있는 여인에게도 허리를 굽혀 깍듯이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헤스터 님.”

 “오랜만이에요, 랜리크 장군.”

 

 여인은 장군을 뒤따라 회의실에서 나가는 모든 이들과 일일이 인사를 하고 나서는, 의자에서 일어나는 디온에게 다가갔다.

 

 “헤스터! 여기까진 웬일이야?”

 

 디온은 일어나며 활짝 웃었다. 올해 스물 여섯인 그에게서는, 아직도 소년같은 천진함이 느껴졌다.

 

 “웬일은. 해줄 말이 있어서 들렀지.”

 

 “그래? 뭔데?”

 

 헤스터는 대답 대신 보랏빛 눈동자를 살짝 굴렸다.

 

 회의실 안팎에 남아 있는 궁정인들이 신경쓰이는 눈치였다.

 

 “아.”

 

 의미를 알아챈 디온은 웃으며 앞장섰다.

 

 “여긴 좀 답답하지? 좀 걸을까?”

 

 

 

 

 

 

 

 

 

 

 둘은 후원 쪽으로 길게 난 회랑을 따라 걸었다. 기둥과 지붕틀로만 이루어져 있는 데다 군데군데 균열이 가고 파열된 부분이 상당히 많은 회랑이었다.

 

 덕분에 후원에 무성한 꽃과 나무들도 잊혀진 폐허처럼 스산한 기운을 발산하는 것 같았다.

 

 “왔다 간지 얼마 안 됐는데, 또 와서 좀 놀랐어. 뭐 나야 반갑고 좋긴 하지만...”

 

 디온은 말을 하면서 슬쩍 헤스터의 눈치를 살폈다.긴 금발머리에 순백의 로브를 입은 그녀는 보기에는 이삼십대로 보였지만, 사실은 몇백 년을 넘게 산 ‘현자’이자 마법사였다.

 

 그러니까, 마족으로서 여기를 통치했던 헬레나 여왕과 아버지와의 결혼, 알루카의 반란부터 피의 전쟁을 거쳐 디온이 왕에 오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지켜보았고, 도왔으며, 그 전의 까마득한 발크의 역사까지 알고 있는... 말하자면 발크 궁의 고문인 셈이었다.

 

 “......”

 

 ”발리드 일도 바쁘다고 들었는데... 아, 혹시 제피리움에서 또 뭔가 소식이 왔어?”

 

 디온은 자신의 통치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후 궁에 잘 나타나지 않던 그녀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자 오히려 초조해졌다.

 

 -현자들은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을 많이 가져 오지요...

 

 대신들 중 누군가가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자 불안감은 더 커졌다. 하지만 헤스터가 말 없이 앞서 걷기만 할 뿐이라 결국 디온은 그녀를 몇 번 더 채근하기에 이르렀다.

 

 “헤스터.. 헤스터!”

 

 디온의 목소리가 조금 커지자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지만 디온은 그녀가 웃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전히 눈치는 빠르네.”

 

 “!혹시 리안나에게 무슨 일이... 아...”

 

 반쯤 고개를 돌린 헤스터를 보고, 디온은 우뚝 멈춰섰다.

 

 다 스러져가는 회랑의 중간 즈음에서, 그에게 고개를 돌리고 웃는 이는 더 이상 헤스터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그가 그리워하던 이.

 

 

 “유노.”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어느샌가 짧아진 그녀의 금발을 살짝, 흔들었다.

 

 동시에 음악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디온에게 전해졌다.

 

 “오랜만이야,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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