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걱.
밧줄이 잘리는 소리와 함께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럼, 어디 약속했던 최고의 순간을...”
그는 말을 채 끝마치지 못했다. 내가 무릎으로 그의 턱 아래를 차올렸기 때문이다.
“우으읍!”
혀를 깨물었는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목을 타고 무릎까지 흘러내렸다.
감옥 안에 다른 사내 두 명이, 밖에는 세 명이 더 있었다. 그 자들은 뜻밖의 상황에 잠시 주춤했다가 이내 나에게 달려들었다.
“이 년이!”
나는 허리를 뒤로 젖혀 요령 없이 달려드는 자의 턱을 발로 시원하게 걷어차주었다.
그대로 몸을 빙 돌려 착지한 다음 내가 묶인 채 앉아있던 의자를 들어서 그 자의 머리를 내려치면서 마무리.
“뭐, 이런...”
감옥 안에 있던 한 명이 욕설을 내뱉으며 뒤늦게 검을 뽑아 들었다. 밖에 있던 자들도 놀라 알레인을 바닥에 밀치고는 차례로 검을 뽑았다.
“리...리안나 왕녀...?”
알레인은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
‘뭐야, 아직도 정신이 있단 말야?’
“...잡아라! 자객이다!!”
“위장에 속다니!”
“위장은 무슨... 자기들이 잡아와 놓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사내를 슬쩍 피해 그대로 감옥 문을 빠져나갔다. 눈 앞에 검이 번쩍였지만 내가 예상한 범위 안이었다. 나는 몸을 숙여 그의 뒤로 빠진 다음 그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거기, 무슨 일이야?”
아틸리안 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넘어뜨린 사내의 팔을 잡아 내 체중으로 비틀어 꺾었다. 내 등을 찌르려던 다른 놈의 검은 자기 동료의 옆구리를 꿰뚫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그에게 나는 예의상 “땡큐” 한마디를 해주고는 그가 죽인 동료의 칼로 그를 찔렀다.
서로 동료의 칼에 죽었으니, 인질극을 벌인 놈들 치고는 준수한 죽음이겠지.
“으아아아악!”
순식간에 동료 넷을 잃은 자가 짐승같은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내 상대로는 역부족이었다.
마지막 남은 한 명이 비명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쓰러진 후, 나와 알레인 황자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알레인 황자는 퉁퉁 부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더니,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리안나 폰 라인바르크. 당신들이 인질로 불러들인 자 입니다.”
“정말... 발크 국의... 공주...”
“공주라고 해서 검을 못 쓰란 법은 없어요.”
알레인이 허탈한 듯 웃었다.
“궁 안에 인질로.. 당신같은 사람을...”
“당신들이 왕족을 원했잖아요? 그래도 우리 형제들 중에는 내가 제일 실력이 덜 해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서는 그의 뒤로 돌아가 밧줄을 풀어주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물어볼게요. 이본느 공녀 말이에요.”
“......”
“정말 죽었나요?”
“...그건 왜 갑자기... 발표를 듣지 못했습니까?”
알레인 황자가 이런 상황에서 그걸 갑자기 왜 묻느냔 듯이 눈을 깜박였다.
나는 품고 있던 마지막 희망 한 줄기에 기대 보기로 했다.
‘석연치 않은 죽음의 이유, 너무 빠른 처분, 게다가 비공개로… 그리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공녀의 시체.’
“내가 오기 전, 오르비안 공국의 왕자는 반역죄로 몰려 공개재판을 받고 처형됐죠. 아드라스 왕자도 마찬가지에요. 죄목과 처형방법까지 공식 발표되고, 무덤까지 만들어졌는데 후궁까지 됐었던 이본느 공녀만 모든 게 비공개로... 정말 죽었다면 시신은 어디 있죠? 잘게 토막내 아네르 강에 뿌렸나요?”
알레인 황자는 그 일을 생각하기 괴로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아, 어쩌면 숨을 쉬기 괴로운 지도 모르겠구나.
“무슨 일이야....?”
저쪽 복도에서 누군가 물어보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시끄러운 소리가 난 게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빨리. 곧 사람이 올 거에요.”
나 혼자라면 몰라도 이렇게 다친 남자와 함께 여기를 탈출하기는 무리다.
-아틸리안 공작과 담판을 지을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해.
“...공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난 모릅니다, 하지만...”
알레인 황자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더니 말을 이었다.
“형님께서는...그 일을 마뜩찮게 여기셨고... 신시아 누님이... 특히 극렬히 반대하셨어요...”
“...그런데 왜?”
순간 블루아 궁에서 황제와 설전을 벌이던 제라드가 떠올랐다.
“제라드. 그 자가 밀어붙였나요?”
알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기운이 쇠약해지는 것 같았다.
“네. 어느 날 보니 이본느 공녀가 사라졌어요... 형님께 물어봐도 ‘죽었다.’라고만 했죠...”
그러면서 알레인은 평소 황제가 자원이 풍부하고, 북해를 통해 동쪽의 나라들과 교역을 하는 북부 지역을 얻기 위해 혈안이었다고 말했다.
“...쓸모가 없는 자는 치운다... 그게 형님이니까요...”
“..고마워요. 이제 좀 쉬어요.”
알레인 역시 정황상 이본느 공녀가 죽었을 거라고 짐작만 하고 있는 모양인데.
그래도 이 정도면 걸어볼 만 하다.
나는 알레인을 부축해 벽에 기대게 하고는 치맛단을 죽 찢어 출혈이 심한 곳에 감아주었다.
“왜들 대답이 없어?”
다시 아틸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구둣발이 돌바닥을 차는 소리도 들려왔다.
‘...제발 혼자 와라.’
내가 생각한 대로 일이 잘 풀려야 할 텐데.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질 때,
나는 긴장하며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
카이엘은 굳은 표정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저 멀리 베르다의 대저택이 보였다. 산기슭에 있는데다 저택을 빙 둘러쳐 도랑을 파 놓아, 사실 저택이라기 보다는 요새에 가까운 곳이었다.
이 저택의 주인이 북부 대공을 황위로 올리려 했기에 일가족을 모두 참수하고 재산을 몰수했었다.
그런 자가 너무 많아서 그랬던가... 이 저택 역시 황족 재산에 올려만 두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저 자들이 어떻게 이 곳을 알아냈을까.’
아를레프 다리로부터 황궁으로 오는 비밀통로도 그렇고.
황궁 사정을 잘 아는 누군가가 귀띔해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군지 당장 밝혀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리안나.’
리안나가 걱정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알레인이라면 몰라도, 리안나는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었다.
그가 리안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저들이 알 리도 없고.
혹시 리안나가 벌써 무슨 일을 당한 것은 아닐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렸다.
“도착했습니다.”
카이엘이 말을 멈추자, 뒤따르는 기사들도 멈추고 기다렸다.
저택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황량하기만 할 뿐, 아무도 없었다.
“제가 대원 몇 명을 데리고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랄프가 말을 끝내자마자 저 끝쪽에서 두 명이 달려왔다.
“저희도 가게 해 주십시오.”
“......”
카이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오는 둘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리안나의 호위기사인데, 한 명은 누구인지 모르겠다.
“언제 돌아왔지?”
제라드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오늘 수도에 도착했는데, 큰일이 났다고 하여 뒤따랐습니다.”
제라드는 눈빛으로 뒤쪽 기사들을 힐책했지만 기사들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떨궜다. 기사들의 입장에서는 호위기사가 자기가 모시는 공주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 걸 가로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자는 누구지?”
카이엘이 눈짓으로 아델을 가리켰다. 아델은 말에 탄 채로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이오니아 파병군 제2사령관, 아델 레이몬드입니다. 위르겐의 일로 폐하께 청하고 싶은 것이 있어 함께 왔습니다.”
“......”
이오니아의 사령관이 황명도 없이 수도에 왔다는 것은 별로 환영할 일이 아니었지만 제라드도, 카이엘도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논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겠지만.”
제라드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은 우리 황자님까지 연루된 아주 중대한 사태요. 괜히 나서지 말고 우리의 지휘를 따르시오.”
“리안나!”
제라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케인이 소리쳤다.
카이엘이 뒤를 돌아보니, 대저택의 입구에서 리안나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얀 드레스는 심하게 더럽혀져 있었고 심지어 치맛단과 한쪽 소매가 주욱 찢겨나가 있었다.
“리안나.”
카이엘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리안나는 저택의 입구에서 멈춰 섰다.
그녀의 뒤에는 커다란 칼을 든 사내 두 명이 버티고 있었다.
“저들이 협상을 원하는가 봅니다.”
아델이 손가락을 들어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가보니 저택의 높은 곳, 밖을 바라볼 수 있도록 원형으로 설치된 발코니에도 칼끝에 목이 누인 인영이 있었다.
그게 누군지 알아본 모두의 표정이 굳었다.
알레인 황자였다.
***
리안나와 알레인이 납치되기 몇 시간 전.
루시아는 시내에 있는 길드에 나가 있었다.
발크에서 온 답신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제발 헤스터가 그 마족문자를 해독했어야 할 텐데.’
헤스터는 발크에서 ‘현자’라고 불리는 마법사로, 경험과 학식이 매우 풍부해 발크 왕의 책사로 일하고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대륙에서 마족문자가 발견되다니. 이건 정말 큰일이야.’
루시아는 심각한 얼굴로 길드 접수원에게 금화를 내밀었다.
몇 번 봐서 얼굴이 익숙해진 그는 루시아를 보더니 심각해진 얼굴로 붉은색 상자를 내밀었다.
붉은색... 아니, 정확히는 피로 물든 나무 상자였다.
“검은 라벨이야. 안쪽에 들어가서 확인해.”
검은 라벨은 내용물을 확인하고 바로 폐기하라는 뜻이었다.
루시아는 침을 꿀꺽 삼키고 접수대 뒤쪽에 마련된 작은 공간으로 들어갔다.
사람 두 명이 들어가기도 버거운 작은 공간이었지만 고객이 안에서 일은 보는 동안은 길드의 용병이 안전하게 지켜주도록 되어 있었다.
‘피... 이걸 가져온 사람은... 죽은 걸까?’
루시아는 상자를 열며 생각했다. 하지만 심하게 다쳤든, 죽었든 이미 벌어진 일이다.
이걸 운반한 사람이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여기 든 정보가 그만큼 가치 있는 정보라는 거겠지.
“맙소사...”
내용을 확인한 루시아는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마법으로만 파기할 수 있게 제작된 특수 용지에는, 놀라운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베아녹스의 부활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베아녹스는 까마득한 옛날, 육신이 잘게 조각나 햇빛조차 들지 않는 북쪽 땅에 묻혔다.
이제 북쪽 땅은 수천년 간 견고한 결계 너머 미지의 땅이며, 베아녹스는 그저 전설에만 나오는 이름일 뿐인데...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마족 계보도라니. 이런 건 본 적도 없어!’
루시아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계속 읽어 내려갔다.
거기에는 세 명의 마왕과, 각각 그 마왕을 따르는 마족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그녀가 알고 있는 이름도 있었다.
“하...”
루시아는 헛웃음을 지으며 종이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종이가 금빛 가루가 되어 공기 중에 흩어졌다.
편지의 내용은 모두 다 충격적이었지만, 마지막 문구도 유독 마음에 걸렸다.
‘로키아 섬에 자꾸 제국인들이 나타난다고..? 검은 군대와 마물들 밖에 없는 그 위험한 곳까지 왜 제국인들이...?’
로키아 섬은 발크 섬의 북동쪽에 있는 작은 섬으로, 사람이 발을 디딜 수 있는 땅 중 가장 척박하고 위험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 섬 어딘가에는 위대한 리오넬 왕의 무덤이 있기도 하고...
‘일단 리안나에게 알려야 해.’
루시아는 옷을 갖춰입고 밖으로 나가려다, 우뚝 멈춰섰다.
사위가 너무 조용했다.
“.......”
오가는 사람들의 발소리도, 대화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니,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서늘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루시아는 만약을 대비해 속으로 공격마법의 주문을 외우며 골방의 문을 열었다.
“!”
문을 살짝 열자마자 보인 것은 바닥을 구르는 머리였다. 두 눈을 부릅뜬 머리가 하나, 둘, 셋...
“아이고, 늦어버렸네요.”
접수대 쪽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목소리를 듣자마자 루시아는 망설임없이 공격마법을 날렸다.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하면서.